#035. 그녀와 대화를……
백리세가의 위치에서 반나절 떨어진 곳.
‘늦었다!’
황보세가주가 죽었다.
시체들만 즐비했다.
화운은 혹시라도 모를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세 곳을 다 구할 순 없다.
물론 다시 살아나자마자 곧바로 움직이면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가겠다.
언제까지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만 할 순 없잖은가.
이젠 나도 나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더더욱!
황보장! 넌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거다.
***
“백리세가가 세가로 돌아가던 길에 습격을 받았다면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는 백리세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두 가주들은 백리세가주를 만나 안위를 살핀 다음 흉수가 구룡태자라는 걸 듣고는 대노하여 천사련에 따져야 한다고 성토했다.
화운은 선우세가의 무인들 틈에 섞여서 백리세가주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백봉은 어디에 있지?’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동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쓸쓸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뭐든 혼자 삭이는 성격인가 보군!’
화운은 백리연의 성격을 알 것 같아 곁에 있던 선우유성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백봉이 혼자 있잖아! 가서 뭐라고 위로 좀 해줘라.”
“내가 가서 뭐라고 해?”
“너한테 그랬다며, 무시받지 말고 무시해 버리라고. 이번엔 니가 힘 나는 말을 해줄 차례야.”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니가 말해줬으니까 알지.”
“내가?”
“그래, 그러니까 얼른 가봐. 가서 언제고 복수해 줄 날이 있을 거라고 해줘.”
“형이 하면 되겠네.”
“야, 난 생판 모르는 사이야. 얼른 가.”
화운은 선우유성을 억지로 떠밀었다.
선우유성은 엉거주춤 망설이다 백리연에게로 다가갔다.
화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쭈뼛쭈뼛 다가간 선우유성이 백리연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백리연이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유성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도망치듯 돌아왔다.
“뭐라든?”
“고맙대.”
“잘했다.”
화운이 선우유성의 어깨를 두들겨 줄 때였다.
선우유성을 기억해 낸 백리연이 고개를 돌리다 화운을 발견했다.
화운도 그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화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백리연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사정이 있으니 모른 척해달라는 말을 기억해 낸 것이다.
‘화운…….’
백리연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
자신 앞에 철탑처럼 서서는 경악할 정도로 강한 구룡태자를 일방적으로 날려 버리던 모습도 기억했다.
그런데 모른 척해달라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백리연은 고개를 슬쩍 돌려 화운을 훔쳐봤다.
그러다 다시 한번 눈길이 마주쳤다.
백리연이 모른 척해줄 거라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선우유성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백리연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심장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
한 명의 청년도사가 달려왔다.
“무당제자 청인입니다. 여기 계신 협웅들께서는 남과 동에서 천라지망을 펼쳐 주셨으면 한다는 전갈입니다.”
“무당과 화산, 소림이 북서를 맡겠다고 하셨는가?”
“예.”
청인의 대답에 남궁검가주가 백리세가주를 바라봤다.
움직일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난 괜찮으니 함께 흉수들을 잡도록 함세.”
“알겠습니다.”
이후 남궁검가주의 지휘아래 남궁검가, 백리세가 그리고 선우세가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진영을 갖추어 천라지망을 펼쳤다.
화운도 함께 움직였다.
‘걔들이 아직 있겠어? 환사가 멀쩡하니 진즉 도주했겠지.’
***
백리세가가 구룡성의 소성주이자 천사련의 소련주인 구룡태자에게 공격을 받고, 황보세가가 이화태양종의 소종주인 태양소마에게 공격을 받았다.
백리세가는 귀인의 도움을 받아 무사했지만, 황보세가는 가주를 비롯하여 몰살을 당했다.
각파로 돌아가던 정파는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인근 수십 리를 훑으며 흉수들을 찾아보았으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정파는 흉수를 찾지는 못했으나 이 모두가 천사련의 음모일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천년소림, 대무당파, 화산파, 아미파, 점창파, 청성파, 곤륜파, 남궁검가, 백리세가, 황보세가, 선우세가, 우문검가.
당금의 정파를 대변하는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다.
한자리에 모인 각파의 대표들은 천사련이 마각을 드러낸 이상 힘을 합쳐야 한다는 중론을 모아 각파로 보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각파 장문인들의 답신을 받아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결과로 정파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정파무림연합맹!
교통이 발달한 동정호 남쪽 장사에 본단을 세우기로 하고 각파에서는 대대적인 지원을 그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호남성 장사로 가는 길.
점심도 먹을 겸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뭐하니?”
백리연이 찾아왔다.
“아! 오셨어요?”
선우유성이 먼저 반가워했다.
선우유성은 천하의 백봉과 이렇게 사적인 자리를 함께하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
같은 세가여도 몰락해 버린 세가와 한참 융성한 세가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백리세가의 여식이기에 주눅이 들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서 또 한 번 주눅이 드는 존재가 바로 백봉 백리연이었다.
“육포 먹고 있었어요. 혹시 드실래요?”
선우유성이 육포를 내밀자 백리연이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선우유성은 그게 또 감격스러워 헤벌쭉 웃었다.
“백리연이에요.”
백리연이 화운을 향해 인사했다.
“화운입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며 마주봤다.
“제 형이에요. 사촌이긴 하지만 친형 같은 분입니다.”
선우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백리연의 말에 화운이 살짝 당황했다.
그러자 백리연이 웃으며 말했다.
“본가가 공격받았다고 달려와 주셨잖아요.”
“아, 네.”
“에이, 그거야 어른들이 하시는 대로 따른 것뿐인데요.”
선우유성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고마워.”
“헤헤헤!”
백리연이 거듭 고맙다고 하자 선우유성의 입가가 더욱 벌어졌다.
“앉으십시오. 여기 경치가 제법 괜찮습니다.”
화운이 선우유성과 함께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작고 잔잔한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제법 운치가 있네요.”
백리연이 말했다.
그리고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선우유성을 쳐다봤다.
“오면서 보니까 남궁현이 너 찾는 것 같더라.”
“아, 그래요?”
선우유성은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백봉이지 않은가.
“실은 내가 형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자리 좀 비켜주겠니?”
“예? 아, 예.”
선우유성은 시무룩해져서 자리를 떴다.
그런데 저만큼 가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근데 어떻게 형을 아는 거지?”
돌아보니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둘이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선우유성은 히죽 웃으며 남궁현을 찾아갔다.
“고마웠습니다.”
백리연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야 말로 고맙습니다. 모른 척해주셔서요.”
“가주님께서는 모르시나 봐요?”
“뭘요?”
“소협께서 그토록 강하다는 걸요.”
“……!”
모른 척해달라는 것 하나로 그렇게 쉽게 눈치챌 만한 건가? 아니면 눈치가 비상한 건가.
화운은 잠시 침묵하다 무슨 상관이냐 싶어 사실대로 말했다.
“예. 모르십니다. 유성이도 모르고요.”
“더 물으면 실례가 될까요?”
“아무래도 대답하기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백리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 할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이다.
어색한 침묵이 싫었던 화운은 두 사람의 공통된 화재가 될 만한 이야기 거리를 찾아냈다.
“구룡태자란 자 말입니다.”
백리연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아찔했던 순간이 떠오른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괜한 말을 했습니다.”
화운이 사과했다.
“아, 아니에요. 그자를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고 소름끼치고 그러면서도 분하고 화가 나고 그래서요.”
“이해합니다.”
“근데 그자는 왜요?”
“구룡태자, 그자의 강기는 좀 특이하더군요.”
화운이 말했다.
‘뭐가 특이하다는 거지?’
백리연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북궁무결의 공격에 부친이 튕겨버리는 광경 그리고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오던 검세.
‘그러고 보니 그건 강기라기 보다는 새하얀 섬광에 가까웠어!’
강기를 날리는 탄강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격 범위가 굉장히 넓었다.
‘그만큼 엄청나다는 건가?’
백리연이 인상을 쓸 정도로 궁금해할 때였다.
“강기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화운의 말에 백리연이 고개를 들었다.
화운은 그녀를 마주보며 검마에게 들었던 내용을 이야기했다.
“익힌 공력에 따라 모든 걸 태워 버리는 극양의 강기가 있고, 얼음처럼 얼려 버리는 극음의 강기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폭발형 강기가 있는데, 극양이나 극음보다 더 보기 어려운 한 가지가 있다더군요.”
“그게 뭔가요?”
“검처럼 절삭력을 극대화한 강기요.”
“절삭력이요?”
“예. 강기 본연의 특성 그대로 응축한 것이 아니라 절삭력, 즉 베는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강기 본연의 특질을 바꾸고 검처럼 얇은 형상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익히기가 무척 난해하다고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강기보다 공력을 많이 소모하지도 않아서 상대할 때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백리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장점은 빠르다는 것과 강기를 다스리는 공부가 뛰어나다 보니 공격 범위가 넓다고 하더군요.”
“아!”
섬광 같은 강기.
백리연이 가만 생각해보니 그날 북궁무결은 아주 기다란 백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그랬던 것 같아요.”
백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곧 화운을 이채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상대할 방법이 있나요?”
“짧고 무거운 쇠망치를 든 자가 길고 가벼운 검을 든 자를 상대하는 방법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짧고 무거운 쇠망치를 가지고 검을 든 자를…… 간격! 자신의 간격으로 싸워야 한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상대를 자신의 간격 안에 들어오도록 접근해야 한다더군요.”
“그렇군요.”
백리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궁무결을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곧 다른 방법으로 상대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는 놀란 눈을 치떴다.
‘화운 공자는 어떻게 상대한 거지?’
그날 화운은 백리연의 앞에 철탑처럼 서서는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굉음이 터져 나왔고 결국 북궁무결이 맥없이 날아가 버렸다.
새파란 검환을 두세 개씩 날린 것인데, 화운이 바로 앞에 서 있었기에 백리연은 시야가 가려져 볼 수가 없었다.
‘절삭력을 극대화하여 간격이 넓은 강기의 고수를 제자리에 서서 날려버리려면?’
공격 범위가 비슷한 동종의 강기를 발휘하는 고수이거나 그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강환의 고수이어야 한다.
‘설마?’
백리연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화운을 쳐다봤다.
강환의 고수.
그게 말이 되나?
명문대파에서조차 그런 고수를 찾아보기가 힘들거늘 이제 스물이 될까 말까한 나이에?
백리연이 호기심과 의문을 듬뿍 담아 바라보고 있을 때 화운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호수를 응시했다.
시원하게 그려진 옆모습이 백리연의 눈에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표정.
그러고 보니 훤칠한 키에 깨끗한 피부 그리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분명 평범함을 넘는 외모다.
절세미남 소릴 듣기엔 다소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보면 볼수록 눈길이 가는 단정한 얼굴이다.
저런 외모에 그 엄청난 무위.
그런데도 구룡태자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가공할 신위에 걸맞는 절세고수의 위엄 같은 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도심을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면 자신감이나 오만함 같은 기도를 내보이기 마련인데…….’
구룡태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그저 서 있는 모습에도 특권의식 같은 게 넘쳐났다.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말 강환이었을까?’
백리연이 세차게 고개를 저을 때였다.
“형!”
선우유성이 달려왔다.
화운과 백리연이 돌아보자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소패룡! 황보장 형님이 황보세가를 이끌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