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다시 시작하다(2)
마경은 남궁검가의 이동 경로가 예상과 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앞에 허공에서 낙뢰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화운이었다.
“선우세가랑 남궁검가는 건들지 마라.”
화운은 검을 뽑아 다짜고짜 검환을 날렸다.
그냥 검환도 아니고 검멸이라 명명한 화운만의 검환이었다.
쾅쾅쾅쾅!
마경이 쪼개진 장작처럼 날아갔다.
“크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선 마경의 전신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암흑대절을 발휘한 것이다.
“머리통을 뽑아버리겠다!”
마경이 흉악한 기세를 터트린 순간 화운이 날린 검환이 날아들었다.
쾅쾅쾅쾅쾅쾅쾅쾅!
마경은 암흑대절을 발휘했음에도 다시 한번 날아갔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쿨럭!
피를 토하는 마경.
상당한 내상을 입었으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선우세가랑 남궁검가는 건들지 마라.”
화운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마경은 살기가 시퍼런 눈으로 화운이 사라지는 광경을 쏘아봤다.
***
“형!”
화운을 발견한 선우유성이 반갑게 불렀다.
화운 역시 멀쩡한 선우유성을 보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어! 무사하구나!”
“응. 비동이 무너졌는데 다행이 아무도 다치진 않았어. 그것보다 여긴 어쩐 일이야? 뭔가 좀 달라 보이는 것 같은데…….”
“숙모님께서 보내셨다. 세가의 이름에 먹칠할까 봐 깨끗이 목욕하고 와서 다르게 보이나 보다.”
“그런가?”
“그래, 그것보다 가주님은 어디 계시냐?”
“저쪽에 남궁숙부님이랑 함께 계셔.”
화운은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남궁검가주와 선우세가주에게로 갔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선우세가주가 인상부터 쓰며 물었다.
화운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답을 꺼냈다.
“가모께서 보내셨습니다. 풍어제 일정이 촉박하여 혹시나 못 오시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럴 일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유성이한테 가보겠습니다.”
선우세가주가 고개를 끄덕일 때다.
“이 친군 누군가? 유성이를 편하게 부르는 걸 보면 그냥 심부름꾼은 아닌 것 같은데?”
남궁검가주가 선우세가주를 향해 물었다.
“동생의 아들 녀석이네.”
“동생?”
“비연이 말이네.”
“아! 그 녀석! 나 싫다고 가 버린……?”
“자네가 싫어서가 아니네. 어쨌든 그 녀석 맞네.”
선우세가주의 대답을 들은 남궁검가주의 시선이 화운에게로 향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비연이의 아들이면 나와는 아주 남이랄 수 없다. 앞으로는 날 숙부로 대해도 좋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비연이는 잘 있고?”
“돌아가셨습니다.”
“……!”
“절 낳으실 때부터 몸이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작년에 아버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아버님도 돌아가셨다는 거냐?”
“예.”
“안 됐구나. 참으로 단아한 아이였는데…….”
“전 괜찮습니다. 두 분이 함께 계실 거라 생각하니 슬프지 않습니다.”
화운은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 그대로를 따라한 후 유성이에게로 물러가려고 했다.
그런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검가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화운이 돌아보니 화산파의 복장을 한 무인이 빠르게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쪽이네!”
남궁검가주가 대답하자 화산파의 무인이 경신술을 펼쳐 한달음에 달려왔다.
“백리세가와 황보세가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소림과 무당이 황보세가 쪽으로 갔으니 남궁검가는 백리세가 쪽으로 합류해주셨으면 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백리세가와 황보세가가 변을 당했다고?”
남궁검가주가 눈을 크게 뜨며 화산의 무인에게 물었다.
“예.”
“피해가 얼마나 된다던가?”
“두 세가 다 가주님들을 포함해서 전멸한 걸로 압니다.”
“허어!”
탄식하던 남궁검가주가 선우세가주를 돌아봤다.
선우세가주 역시 크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화운은 혼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랏? 백리세가도 공격을 당했다고? 황보세가야 소패룡 그 자식이 아비를 내놓았다고 했으니 그쪽에도 일이 터졌겠지만, 백리세가까지라고?’
구룡태자와 마경 그리고 소패룡.
세 사람의 작당질이 꽤나 요란했다.
이 정도면 정사대전이 발발하는 걸 절대 막지 못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굳이 막을 생각도 없는 화운이지만.
“백리세가가 세가로 돌아가던 길에 습격을 받았다면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네.”
남궁검가주가 말했다.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보자면 선우세가와 백리세가는 동쪽에 위치한다. 남궁검가는 그보다 조금 위쪽이고 황보세가는 좀 더 위라 동북방향에 가깝다.
“그렇겠지.”
선우세가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검가주는 주위를 향해 말했다.
“다들 들었겠지! 당장 출발할 것이니 대열을 갖추도록 하라!”
남궁검가주의 외침에 두 가문의 무인들이 재빨리 도열하여 출발할 준비를 했다.
화운은 조용히 움직여 선우세가가주의 눈길을 피했다.
혹시라도 돌아가라고 할까봐서였다.
다행히 심각한 상황이라 생각이 많아서인지 화운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는 백리세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시체, 시체 그리고 시체.
화산파 무인의 말대로 백리세가가 전멸을 당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흉수는 누구라던가?”
남궁검가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나 화산파의 제자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아직 찾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백리세가엔 소식을 전했다던가?”
“그런 것으로 압니다.”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남궁검가주는 선우세가주와 함께 시신들의 상흔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때 화운은 한 구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백리세가의 여인이었구나!’
화운은 가슴이 길게 갈라져 있는 여인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던 그 여인이었다.
“백봉 백리연. 형, 너무 안 됐어. 슬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여인이 백봉이야?”
“어. 세가 모임 때 본 적이 있어. 다른 사람들한텐 도도하고 냉랭하게 굴었는데, 혼자 있던 나한텐 무시당하지 말고 무시해 버리라고 알려줬어. 좋은 누나인데…….”
선우유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운은 백봉 백리연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혼자만의 고민에 휩싸였다.
‘구해야 하나?’
당연히 구해야지. 정파잖아!
‘내가 무슨 대협객도 아니고 어떻게 다 구해?’
구할 수 있는 데까진 구해야지!
서로 돕고 사는 게 인간이니까!
‘그야 그렇지만 내가 죽어가면서까지 그래야 해?’
그래야 해. 할 수 있으니까 해야지!
화운의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이건 강기에 베인 거네. 백리세가주를 단번에 베어버리다니 굉장한 고수네.”
남궁검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접전이 아니었어. 한 자리에 서서 그냥 베어버렸어. 그러려면…….”
선우세가주의 말이었다.
“저기로군. 저쯤에서…… 이상하군! 저 거리에서 검강을 날리지 않고 베어버린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백리세가주 같은 고수를!”
남궁검가주가 모르겠다는 기색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싸움의 흔적을 살폈다.
이때 화운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한 사람을 퍼뜩 떠올렸다.
‘구룡태자! 흉수는 그 자식이야!’
그를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이토록 무참한 짓을 벌여놓고도 다음 세대의 무인들을 위해서라는 웃기지도 않은 말을 뻔뻔하게 내뱉은 놈.
‘좋아! 너 이 자식 한 번 더 봐야겠다!’
맹세코 여자라서 살려주고 미인이라서 더 살려주고, 그 아름다운 검무를 또 보고 싶어서 살려주고.
나 화운은 그러는 사람 절대 아니다. 절대!
***
만월이 뜬 밤 아래 화운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새하얀 인영이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고 있었다.
백봉 백리연!
바로 그녀다.
벌써 몇 번째 보는 것이지만, 백리연의 검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화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지켜봤다.
‘널 구해주겠다. 이토록 아름다운 검무를 보여준 답례다.’
맞다.
답례다.
다른 흑심은 없다. 절대!
***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순백의 무복에 머리마저 백발이라 무척이나 인상적인 용모의 청년이었다.
‘누굴까? 비범해 보여!’
백리연은 백발의 청년에게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백발의 청년은 백리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새하얀 검을 뽑았다.
“구룡성의 태자로구나!”
백리세가주가 북궁무결을 알아봤다.
사파의 연합체인 천사련의 소련주이기도 한 자가 백리세가의 앞에서 검을 뽑았다는 건 불손한 의도일 수밖에 없다.
“기습에 대비하라!”
짧게 명을 내린 백리세가주는 검을 뽑아들고 북궁무결을 향해 다가갔다.
천하십대검객에 들어가는 고수답게 칼날 같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백리연은 의아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버님 앞에서 검을 뽑은 거지?’
당랑거철.
제 분수도 모르고 수레바퀴를 향해 대들려는 사마귀.
백리연의 눈에는 북궁무결이 사마귀처럼 어리석게만 보였다.
그러나 백리연의 의아함은 곧 충격과 놀람으로 바뀌었다.
북궁무결이 일검을 휘두른 순간 새하얀 섬광이 폭발적으로 뻗었고 마주 검을 휘두르던 백리세가주가 맥없이 튕겨 버렸다.
“……!”
백리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번-쩍!
새하얀 섬광이 튕겨가는 백리세가주를 노렸다.
오른발을 뒤로 크게 디디며 튕겨가는 것을 멈춘 백리세가주가 신형을 빙글 돌리며 난화십이검(亂花十二劍)의 절초 난화분분을 펼쳤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검화들.
하지만 순간을 가르고 날아드는 새하얀 섬광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콰앙!
백리세가주의 두 발이 땅거죽을 찢으며 주르륵 밀렸다.
이때 백리세가주가 미처 신형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세 번째 섬광이 날아왔다.
보다 못한 백리연이 땅을 박찼다.
물을 박차고 날아가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쏘아간 백리연은 북궁무결을 직접 노렸다.
콰앙!
세 번째 격돌음이 터졌다.
백리연은 부친을 믿고 곧장 북궁무결을 향해 검을 뽑았다.
이때에야 비로소 북궁무결이 백리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무 무심하여 냉막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백리연이 섬뜩함을 느낀 순간 북궁무결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백리연은 난화십이검의 절초 난화검향을 펼쳤다.
북궁무결의 강함을 알았기에 정면격돌을 피하고 검의 방향만 틀어놓은 다음 손목을 그어버릴 생각이었다.
뚜다다다다당!
난화검향의 검세가 숨 가쁘게 작렬하자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북궁무결의 검은 일직선으로 뻗어오던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조심하거라!”
뒤쪽에서 백리세가주의 경고성이 들려온 순간 북궁무결의 검이 백리연의 가슴을 찔렀다.
새하얀 가슴팍에 붉은 피가 혈화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
백리연의 눈이 와락 커진 순간.
한 줄기 낙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쿠-웅!
백리연의 심장을 찔러 들어가던 새하얀 검이 낙뢰를 피해 물러갔다.
백리연은 핏물이 번지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두 눈을 치떴다.
낙뢰처럼 등장하여 자신을 구해준 사내가 북궁무결을 공격하고 있었다.
백리연의 앞에 철탑처럼 서서는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귀청을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쉬지 않고 터졌다.
쾅쾅쾅쾅쾅쾅쾅!
정신없이 막던 북궁무결이 결국 뒤로 날아갔다.
순간 시커먼 기운이 북궁무결을 감싸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흑야의 환사 그도 있었던 것이다.
백리연을 구해준 사내가 검을 집어넣으며 돌아섰다.
화운이었다.
백리연이 화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화운도 그녀를 보았다.
가까이서 그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살짝 당황한 화운은 백리연과 저쪽에서 이제 막 일어서는 백리세가주를 향해 번갈아 포권했다.
“선우세가의 화운입니다. 사정이 있어 그러니 다시 보게 되더라도 절 모르는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화운은 그 말을 끝으로 공공무영비를 펼쳐 사라졌다.
“엇!”
화운이 가버린 후에야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백리연이 당황성을 흘렸다.
답례로 그녀를 구해주었다.
만족한다.
모른 척해달라고 한 건 선우세가주가 알게 되면 어떻게 강해졌는지 물을 것이고, 어떻게 대답할지 상황이 꼬일 것이기 때문이다.
백봉 그녀에게 신비한 척하려고 한 게 아니다.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