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선우세가(2)
이옥영은 여장부 같은 성격이었다.
부군인 선우세가주를 돕고자 내공수련을 무리하다 화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외부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할 정도로 상황에 따라서는 괄괄할 정도로 당찬 여인이었다.
“가모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정녕 가모님께서……!”
냉큼 달려와 놀란 눈을 치뜨는 양우관.
이옥영은 손을 들어 양우관을 만류하고는 우문검가의 총관을 쏘아보았다.
“우문가에서는 그리 가르치더냐! 다른 세가에 가서 가모를 주둥이로 능멸하라고!”
“모, 모르고 그런 것이…….”
“닥쳐라! 모르고 한 것이면 가모를 능멸해도 된다는 것이냐! 당장 목을 베어버려야 할 놈이로다!”
이옥영이 옆에 있던 화운의 검을 뽑아 냅다 휘둘렀다.
우문검가의 총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인지 어렵지 않게 피했다.
그런데 그가 이옥영의 검을 반사적으로 피한 순간 거친 발길질이 그를 저만큼 걷어차 버렸다.
“어이쿠! 큰일 날 뻔했습니다. 길가에 똥을 싸지르는 똥개라도 함부로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숙모님 고정하십시오.”
우문검가의 총관을 걷어찬 화운이 이옥영의 팔을 붙잡았다.
“놔 보거라. 이참에 본가를 능멸하는 것들의 목을 베어버려야겠다.”
이옥영이 검을 고쳐 잡았다.
“뭐하십니까. 어서 가십시오!”
화운이 우문검가의 총관을 향해 소리쳤다.
“가, 가십시다!”
우문검가의 총관이 비대한 몸집의 노인을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목을 놓고 가지 못할까!”
이옥영이 금방이라도 쫓아갈 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쥐고 있던 검을 화운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동 노야, 실망이 큽니다.”
동태전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옥영이 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건강을 되찾은 걸 보니 다행입니다.”
“좋은 자리에서 들었으면 좀 좋습니까.”
“가모, 세가의 상황은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어민들에게 풍어제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행사를 저런 모리배들에게 맡기겠다는 겁니까?”
“허면, 선우세가가 무얼 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풍어제 때문에 저들 손을 들어준 줄 아십니까. 해적들의 횡포와 약탈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선우세가는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알겠습니다. 이번 풍어제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천마존의 비동이 무너져서 가주님께서 빨리 돌아오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누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제가 있고, 여기 운이가 있습니다.”
“예?”
“동 노야께선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어등쟁투는 무사히 잘 치러질 것입니다.”
명태전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이옥영에게, 그것도 몇 년 만에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에게 선우세가는 손을 떼는 게 좋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 한숨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렇게 명태전이 돌아가자 양우관이 달려들 듯 다가와 물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양 총관은 내가 건강을 되찾은 게 안 반가운 모양이지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며 버럭 소릴 지르는 양우관의 모습에 이옥영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 운이가 좋은 영약을 구해다 줘서 일어날 수 있었고, 워낙 귀한 영약이라 다른 탈이 날 일은 없어요.”
“정말이지요? 다시…… 다시 그러지는 않겠지요?”
“그래요.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이지?”
양우관이 화운에게도 물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양우관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자, 이제 내가 일어났으니 본가의 상황에 대해 들어볼까요.”
이옥영의 말에 기뻐하던 양우관이 화운을 쳐다봤다.
“아뇨. 앞으로는 운이도 본가의 일에 적극 참여할 거예요. 운이도 여기 앉거라.”
이옥영이 단호한 투로 말하자 양우관은 살짝 당황했고, 화운은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다.
긴 겨울이 가고 이제 막 봄이 온 것 같은데 벌써부터 여름이 올 모양인지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우문검가의 총관은 행여나 누가 들으면 안 되는 것인지 창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있었다.
“선우세가의 가모가 병상에서 일어난 것만으로도 어민들의 민심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민심이라는 건 개울의 흙탕물과 같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기 마련이야. 그러니 민심 따위는 신경 쓰지 마. 중요한 건 풍어제에서 선우세가를 완전히 제외시키는 것이야. 그래야만 존재감마저 잃고 급속도로 무너질 거야. 그때가 되면 민심도 알게 되겠지. 힘이 없는 무가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점잖은 투로 말하고 있는 검은 수염의 중년인은 우문검가주의 동생인 우문낙성이다.
별호는 장천검이고 의협심이 꽤나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보여주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일 뿐이고, 우문검가주와 함께 선우세가를 집어삼키고 싶어 안달이 난 인물이다.
“허면 어찌합니까? 이대로 준비를 합니까?”
“준비하도록 해. 선우세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비동이 무너진 덕분에 선우세가주가 제 때에 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제 가모가 일어난 데다 그놈이 있습니다. 선우세가의 식충이라고 무시했었는데 오늘 보니 범상치 않은 놈이었습니다.”
우문검가의 총관은 화운에게 걷어차인 옆구리가 무척 아팠다.
그땐 워낙 놀란 데다 경황이 없어 아픈 줄도 몰랐는데 선우세가의 정문을 나설 때부터 욱신거려 허리를 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놈이 문제라면 그놈만 처리하면 되겠군.”
우문낙성이 화운의 운명을 이야기 할 때였다.
갑자기 창문이 안쪽으로 부서지면서 뭔가가 난입하였다.
“감히!”
우문낙성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쾅!
굉음이 터지면서 우문낙성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곧 어둠에 잠겼다.
실내를 밝히고 있던 유등이 꺼져버린 것이다.
이 느닷없는 상황에 우문검가의 총관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다 우문낙성이 신음 하는 곳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감히 본좌의 밥상에 숟가락을 대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지?”
음산한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우문검가의 총관이 깜짝 놀라 부서진 창밖을 바라보니 어두운 허공에 시커먼 그림자가 둥실 떠 있었다.
“저기다!”
“전부 따라와라!”
밖에서는 우문검가의 무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전부 물려라!”
우문검가주 다음으로 강한 우문낙성을 일격에 처박아버린 존재의 명이다.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을까.
우문검가의 총관은 큰 소리로 외쳤다.
“물러가라! 총관의 명이다! 오지 말고 물러가라! 어서 물러가라!”
총관이 악을 쓰듯 소리치자 몰려오던 무인들이 주춤거리다가 총관의 외침이 계속 되자 빠르게 물러났다.
“선우세가는 본좌의 밥상이다. 누가 감히 손을 댄단 말이냐?”
“그, 그것이…….”
“가주는 어디에 있느냐? 거기에 있는 약골이 가주는 아닐 터.”
“가, 가주님께선 제천마존의 비동에…….”
“흥! 그깟 비동에서 무얼 얻겠다고!”
“…….”
“이제 어찌 할 것이냐? 모조리 목을 내놓겠느냐?”
“요, 용서를……!”
“선우세가를 어찌할 생각이었더냐?”
“어찌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머리통을 따버려야 사실을 말할 것이냐!”
“사실입니다. 같은 정파라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만들 생각으로 풍어제에서 완전히 제외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립이 되다 보면 사람들 인식에서 존재감마저 사라지게 될 거고, 결국엔…….”
“그런 조잡한 방법으로 감히 본좌의 밥상을 넘봐? 이것들이 본좌를 우습게 보는 것이렷다!”
갑자기 번쩍 하며 새파란 청광이 날아와 우문검가의 총관이 서 있는 옆의 벽을 단박에 날려버렸다.
그에 기겁한 총관이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해, 해적들을……!”
“해적? 자세히 말해 보라!”
“선우세가가 기어이 나서게 되면 해적들이 쳐들어와 난리를 치게 될 겁니다. 그 와중에 선우세가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선우세가가 지켜주지 못한다는 인식을…….”
“흐음. 그건 괜찮군.”
“저어, 누구신지 알려주시면 가주님께 말씀드려 정중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닥쳐라! 우문가 따위가 감히 본좌와 겸상을 하겠다는 것이냐!”
목소리에 진기를 실은 것인지 분노의 바람 같은 파장이 몰아쳐오자 총관이 기겁하여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어차피 벌어진 일, 본좌가 허락할 것이니 선우세가가 풍어제에 나서도록 두어라. 대신 해적들을 동원할 수 있는 대로 동원하여라.”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일 일이 어긋나 본좌가 다시 찾아오게 되면 우문 씨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알았느냐!”
“넵! 존명하겠습니닷!”
“좋다. 본좌가 계속 지켜보겠다.”
검은 인영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총관이 긴 숨을 토해낸 후 신음하고 있는 우문낙성을 향해 기어갔다.
***
“정파라는 것들이 해적들이랑 짝짜꿍하고 있었어? 이것들 아주 제대로 걸렸어!”
화운은 선우세가로 돌아가는 동안 우문검가를 어떻게 혼내줄지 생각했다.
그냥 힘으로 날려 버리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자칫 선우세가가 손가락질 받을 우려가 있다.
지금처럼 정체를 감추고 날려 버리는 방법도 있으나 그건 최후의 수단이다.
“그 해적들의 대가리들을 잡아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문검가랑 짝짜꿍했다는 걸 실토하도록 족쳐볼까? 흐음, 잘하면 재밌는 그림을 만들 수 있겠는걸.”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키득거리기도 하던 화운이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건물 삼 층 높이까지 올라서더니 멈추지 않고 계속 솟구쳤다.
오 층, 칠 층, 구 층…… 십삼 층…….
지상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솟구쳤다.
공공무영비 팔 단공 운해비룡(雲海飛龍)의 경지.
화운은 구름의 바다를 날아다니는 비룡처럼 별이 총총한 어둠을 뚫고 까마득하게 솟구쳤다.
어느덧 정점을 찍은 화운은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먹물을 쏟아놓은 듯 진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이 총총했다.
스-릉!
검을 뽑아든 화운은 밤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검마에게 배운 배운검, 비응삼십이검 그리고 사혼구검의 절초들을 하나씩 펼쳤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어둠속에 새파란 청광이 빛났다.
화운의 경지는 검의 초식에 얽매일 단계를 지났다.
각 검법들의 초식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펼쳐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어느 검법의 초식인지 알 수도 없었다.
화운은 손이 가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때로는 검이 가고 싶은 대로 놓아두기도 했다.
화운이 검을 이끄는 것인지, 손이 검을 이끄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검이 화운을 이끄는 것인지.
시간이 지나자 그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무의미해져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무아지경에 든다면 이러할까.
화운은 자신과 시간마저 잊어버린 채 어둠이 옅어질 때까지 검무를 췄다.
화운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건 여명이 터올 때였다.
침상 위로 올라간 화운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하자 더 이상 혼원여의공이랄 수 없는 공력이 하단전과 중단전에서 각기 일어나 기경팔맥과 사지백해를 나누어 휘돌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극에서 하늘과 땅이 열리고, 생성과 소멸, 음과 양의 변화가 시작되니 태극이라.
도가에서 익히는 선기의 정점인 태극의 기운.
지금 화운의 몸 안에서 휘도는 기운이 그와 같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화운의 몸은 가부좌를 튼 모습 그대로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운기행공의 막바지에 이르자 정수리를 뚫고 튀어나온 청홍의 빛이 이무기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한 형상들을 만들었다.
서로의 몸을 휘감으며 용틀임 하던 두 개의 형상들이 어느덧 서로의 꼬리를 물고 청홍의 원을 만들었다
번-쩍!
눈부신 광채가 뿜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시비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광채에 깜짝 놀라 부리나케 고개를 돌렸다.
이때 더욱 찬란한 빛을 뿜은 청홍의 형상들이 허공을 유영하다 정수리 속으로 사라졌다.
화운이 눈을 떴다.
청홍의 광채가 번뜩이다 차분히 가라앉았다.
담담하고 말간 눈빛이 얼빠진 듯 눈만 크게 치뜨고 있는 시비를 응시했다.
“다음부턴 허락하기 전엔 들어오지 말아라.”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알았다. 무슨 일이냐?”
“마님께서 식사하시라고 하십니다.”
“그래, 가자구나.”
침상에서 내려온 화운은 시비를 앞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걸음마다 여유가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