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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28화 (28/207)

#028. 선우세가(1)

만월이 뜬 밤 아래 화운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눈을 더 크게 떴다.

새하얀 인영이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고 있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휘두르는 검신에 달빛이 부서졌다.

상큼하게 뛰어올라 검신을 쭉 뻗으니 시리도록 차가워 보이는 검광이 번뜩였고, 부드럽게 휘돌아 단호하게 내리그으니 달빛조차 둘로 갈라졌다.

화운은 멍한 상태로 그녀의 검무를 바라봤다.

탄성이라도 터트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엔 더 중한 것이 있었다.

“일각(15분)? 그래, 그때도 일각 정도 전으로 돌아갔었어!”

“누구냐!”

검무를 추던 여인이 사납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당도했을 땐 화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펼쳐 잽싸게 튀고 있었다.

‘왜 하필 이 시점이야! 너무…… 너무 좋잖아!’

화운은 냅다 뛰면서도 히죽 웃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마다 죽음의 손길을 피해야 했던 이전과 달리 아름답기 짝이 없는 여인의 검무를 보면서 살아나니 얼마나 좋은가.

이제는 자신의 삶에 그 지긋지긋한 비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낭왕은 물론이고 북궁무결과 사도강 그리고 흑야의 환사를 혼자서 날려버릴 수 있는 고수로 살아나게 되었다.

품안에 공청석유와 인형설삼, 삼두독각망의 내단도 존재했다.

그러니까 보패를 깨드리기 바로 일각 전으로만 돌아온 것이다.

“크핫하하하!”

대소를 터트린 화운은 단숨에 산 정상으로 달려가 제천마존의 비동 입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용암의 바다를 건너가 보니 역시나 제천마존은 없었다.

경천보패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화운은 경천보패를 가지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죽음 없이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

“어디로 갈까?”

선우유성이 무탈할 거라는 것도 알고, 구룡태자 북궁무결 등과도 실컷 싸우고 죽여 보았으니 혹시라도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비동 입구 쪽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게다가 비동이 너무 지긋지긋하여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가급적 만나고 싶지도 않다.

바깥의 공기를 맘껏 마시며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하고 싶다.

아주 잠깐이라도.

“진짜 어디로 가지? 선우세가로 가 봐야……! 아! 맞다. 숙모님!”

아쉽지만 아직은 여유를 만끽할 때가 아닌 모양이다.

화운은 지금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을 떠올리고는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신룡처럼 허공으로 솟아오른 화운은 바람을 타고 나는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갔다.

지상에서 누군가가 본다면 저게 정녕 사람인지 새인지 몰라 자신의 눈을 비벼댈 것이다.

하단전에 중단전까지 완벽하게 자리 잡은 화운은 무한에 가까운 공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공력들의 소모를 적절히 회전시켜가며 한 번도 땅에 내려서지 않은 채 며칠 동안을 날아갈 수 있었다.

선우세가.

복건성 제일의 무가.

수백 년 전부터 복건성의 패자로써 군림하였으나 두 세대 전부터 급격히 가세가 기울고 있는 실정이었다.

화운이 나타나자 선우세가의 정문을 지키던 무인들이 인상부터 썼다.

“대체 언제 나갔던 건가? 며칠 안 보인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숙모님께 드릴 약초를 구하러 갔습니다.”

“약초?”

“예.”

화운은 대충 둘러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약초를 캐러 갔다는 거지?”

“약초는 무슨 약초! 빈손인 게 안 보이나. 가주님이 안 계시니 어디서든 띵자띵자 놀다 온 거겠지.”

“그런가? 근데 말이네. 어째 좀 달라 보이지 않은가?”

“뭐가 달라져?”

“좀 커 보인 것 같기도 하고, 말끔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늘어지게 잤나 보지. 그럴 시간이 있으면 무공 수련이나 좀 하지. 뭔 일인지는 몰라도 아침부터 따지러 온 우문검가가 오만방자하게 군다던데, 이럴 때에 힘이 있어서 무게 좀 잡아주고 그럼 좀 좋아.”

“아서게. 괜히 젊은 혈기에 검이라도 뽑았다간 더 큰 일이 벌어질 걸세.”

“큰일은 무슨! 세가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는데 차라리 우문검가랑 한판 벌였으면 좋겠구만!”

“어허! 이 사람!”

“답답해서 그러네. 답답해서. 난들 우문검가가 무섭게 커져 버렸다는 걸 모르겠는가.”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의 푸념 섞인 대화는 고스란히 화운에게 들렸다.

딱히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세 번의 환골탈태를 하면서 청력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때문이다.

“가세를 일으키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갑갑하게 구니까 나아지는 게 없지.”

선우세가주를 떠올리며 투덜거린 화운은 가주의 직계들만 거주하는 세가의 내원으로 곧장 향했다.

가는 중에 세가 내의 사람들과 마주쳤으나 누구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늘 그렇듯이 있는 듯 없는 듯 눈길 한 번 준 게 다다.

화운은 익숙한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화운이 멈춘 곳은 선우세가의 가모 즉 선우유성의 모친이 머무는 거처였다.

“숙모님을 뵈러 왔다.”

“여쭤볼 게요.”

시비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화운은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중년 여인이 누워 있었다.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어 수척한 모습이었다.

“넌 나가 있거라.”

화운의 말에도 시비는 나가지 않고 중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중년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밖으로 나갔다.

“일이 있어 며칠 밖에 나갔다가 왔습니다.”

“또 누가 괴롭히더냐…….”

병자답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리고 잠시 후면 맘껏 말씀 하실 수 있을 테니 억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선우세가의 가모이자 선우유성의 모친인 이옥영은 화운의 말에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 화운은 마음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화운이 선우세가를 나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선우유성이 아니라 이옥영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옥영은 오랫동안 아파서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그럼에도 이따금 얼굴을 보러오면 지금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는 포근한 미소였다.

“이제 주무십시오.”

화운은 수혈을 짚어 이옥영을 재웠다.

그런 후 품에서 공청석유를 꺼내 이옥영의 입을 벌리고 두 방울을 넣어주었다.

그 정도면 내공수련을 무리하게 하다 혈도들이 막혀버린 이옥영을 거뜬히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화운은 이옥영이 일어나면 선우세가의 재건을 위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여장부 기질이 있는 그녀라면 선우세가주와는 달리 말이 통할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친정인 선우세가의 재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어머니의 가슴에 남아 있던 한을 이제라도 풀어줄 생각인 것이다.

‘제가 선우세가를 일으켜줄게요. 그러니 더 이상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곳에서 아버지랑 웃으며 지켜보세요.’

화운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옥영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한 시진 후.

이옥영이 눈을 떴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온몸에 기력이 충만한 것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꿈인 것이냐?”

이옥영이 화운을 보며 물었다.

목소리조차 평소와 다르게 힘이 넘쳐났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변화가 도통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꿈입니다. 그러니 일어나셔서 맘껏 걸으셔도 됩니다.”

화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긴가 민가 하는 표정을 짓던 이옥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자신이 스스로 일어선 것에 탄성을 지른 이옥영은 화운을 한 번 보고는 걸음을 뗐다.

건강했을 때처럼 내딛는 걸음이 자연스럽고 아무런 고통이 없자 더욱 눈을 치뜨며 침상 아래까지 내려갔다.

“정말 꿈인 모양이구나! 네 녀석이 말끔해 보이는 것을 보니.”

“제가 그렇게 너저분했습니까?”

“너저분하다기 보다는 우중충해 보였다.”

“하긴 사는 게 고역이긴 했습니다.”

화운의 말에 빤히 바라보던 이옥영이 손을 뻗었다.

“아얏!”

볼이 꼬집힌 화운이 아프다고 소리쳤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니구나.”

“진짜 꿈인 줄 아셨습니까?”

“분명 꿈은 아닌데 꿈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화운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한참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몸이 멀쩡하게 건강을 되찾았거늘.

“어찌 된 것이냐?”

“산에 올랐다가 영약을 캤습니다.”

누구도 믿지 못할 소리다.

이옥영은 화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아이는 아니다. 거짓을 말한다면 필경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옥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추어야 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말 할 거면 좀 더 그럴 듯하게 하거라.”

“나중에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말씀드릴게요. 그저 제게 영약이 있어서 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러마.”

“그럼 이제 세가의 재건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화운이 빙긋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여유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

선우세가의 총관 양우관.

지역 학사출신으로 선우세가주와는 어려서부터 호형호제 하던 사이다.

선우세가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나이 서른이 되자 스스로 찾아와 총관직을 달라고 했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선우세가주가 하는 꼴을 보니 세가의 몰락만 더 빨라지고 있어서였다.

학사출신 답지 않게 손익 계산에 제법 빠르고 유들유들할 줄도 아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쾅!

양우관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어등쟁투는 오래전부터 본가가 도맡아왔소. 한데도 그걸 외지인인 우문검가에 맡기겠다는 것이오?”

팔뚝 굵기의 대나무로 건물 오층 높이의 탑을 만들고 그 꼭대기에 물고기 모양의 등을 단다.

그 어등을 노리는 이무기를 물리침으로써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바로 어등쟁투다.

이때 이무기는 대나무 살과 창호지로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외지인은 무슨.”

맞은편에 거들먹거리고 앉아 있던 우문검가의 총관이 한 마디를 하자 양우관이 서슬 푸른 기색으로 쏘아봤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말이 틀렸냐는 듯 쳐다봤고, 양우관은 그를 상대할 필요도 없어 비대한 몸집의 노인과 구릿빛 피부의 노인을 번갈아보았다.

선주들의 대표들이었다.

비대한 몸집의 노인이 서른셋 척, 구릿빛 노인이 열한 척의 어선을 소유하고 있어 비대한 몸집의 노인이 선주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 어르신, 이게 말이 됩니까?”

양우관은 특히 구릿빛 노인에게 따져 물었다.

비대한 몸집의 노인은 돈만 된다면 해적들에게도 어등쟁투를 맡길 자였지만, 구릿빛 노인 동태전은 달랐다.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 중 선우세가에 호의적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두 눈마저 감아버렸다.

“아직 소식을 못들은 모양인데 제천마존의 비동이 무너지는 바람에 가주님들이 돌아오는 게 예정보다 훨씬 늦어질 거요. 그런 마당에 선우세가에 누가 있어 어등쟁투를 맡겠다는 것이오?”

우문검가의 총관이 빈정거렸다.

양우관은 그의 말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동 노인만 바로 보았다.

그 모습에 심술이 난 비대한 몸집의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선우세가는 어찌 그리 욕심이 많은 겐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언제까지 과거의 위명에 기대 우리들의 피를 빨려고 든단 말인가.”

“말이 심하시오!”

양우관이 다시 소릴 쳤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대청의 문이 활짝 열렸다.

“쯧쯧! 아무리 몰락했어도 그렇지 기본적인 위계질서마저 망가진단 말인가.”

우문검가의 총관이 혀를 차며 비웃었다.

그런데 양우관의 두 눈이 급격히 커졌다.

“가, 가모님!”

양우관의 말에 비대한 몸집의 노인과 동태전 그리고 우문검가의 총관이 흠칫 돌아보았다.

양우관의 말 대로였다.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고 알려진 선우세가의 가모 이옥영이 활짝 열린 대청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내 집에서 날 비웃는단 말이냐!”

이옥영의 호통이 대청을 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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