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제천마존(2)
묻혀 있던 기억들이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빛이 나는 구슬이 머릿속에 선명해진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기억들!
그때 화운은 죽음의 직전에 빛이 나는 구슬을 쥐었고 단단한 바닥에 떨어뜨렸다.
손에 쥔 그 빛이 나는 구슬이 박살이 난 순간 천상의 울림 같은 준엄한 일갈이 혼백까지 뒤흔들었다.
천지간의 간극을 뒤틀어 시와 간을 바꾸니 이를 경천보패라 한다!
그 뒤를 이어서 들렸던 게 억겁의 기다림이 이제야 끝난다던 제천마존의 음성이었다.
화운이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다.
[이 땅에 무인들의 시대가 열리기 전에 천신과 마신들이 전쟁을 벌이던 신들의 시대가 존재하였다. 경천보패는 당시에 유실된 신들의 유물이 아닐까 짐작한다.]
“정확히는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화운은 제천마존의 육신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천신과 마신 그리도 신들이 전쟁을 벌이던 시대.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무척 궁금해졌다.
[수십 년 동안 천하를 뒤진 끝에 알아낸 게 까마득한 상고시대에 신들의 시대가 존재하였다는 사실뿐이었다.]
“신들의 시대…….”
궁금증만 더 커진 느낌이다.
화운은 답답한 얼굴로 제천마존을 응시하였다.
“억겁의 시간은 고통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처음엔 축복이라 생각하였다. 즐거운 삶을 살았다. 거만의 부를 쌓아 세상을 조롱하는 삶도 살아보았고, 천하를 구한 영웅의 삶도 살아보았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반복 될수록 가슴이 공허해지고 모든 게 부질없어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조차 내 삶의 장식품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오롯이 존재하는 건 나뿐이었다.]
“그게 고통이라는 겁니까?”
[고통이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화운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것이 어찌 고통이 될 수 있을까?
암만 생각해 봐도 그저 하늘이 내린 축복으로만 여겨지는데.
“전 아직 모르겠습니다. 여튼 그 고통을 제게 주신 게 미안해서 그 선물들을 남겼다는 것이고, 제가 이곳으로 와서 경천보패를 발동시킬 거라는 건 시공안이라는 능력으로 내다보았다는 것입니까?”
[반만 맞았다.]
“예?”
[네가 이곳으로 올 거라는 걸 알았다기 보다는 네가 이쪽으로 오도록 유도했다는 게 맞다.]
“이해가 안 됩니다.”
[이 비동을 만들고 장보도를 천하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어떤 자들이 몰려오는지. 통로마다 기관을 만들고 그에 따라 몰려온 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내다보며 한 명씩 길을 열어 이곳으로 이끌었다.]
화운은 제천마존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멍청히 듣기만 하였다.
[경천보패를 손에 쥔 자는 많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뜻을 행하지 않았다.]
“네?”
화운은 저도 모르게 경천보패를 바라봤다.
뜻을 행한다는 게 무슨 소리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실망스러웠다. 그때 네가 보였다. 누군가에게 걷어차여 볼썽사납게 용암에 타죽던 너. 본좌는 네가 이곳으로 닿을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그리고 널 지켜보았다.]
“에엑?”
화운이 눈을 치뜨며 괴성을 냈다.
하늘이 내린 운명이 아니라 제천마존이 판 함정에 빠져 그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제천마존 덕분에 하늘의 축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이만한 축복이라면 그 정도 개고생은 해야지!’
화운은 애써 위안하며 화를 털어냈다.
어쨌든 지금은 궁금한 것들을 해결해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른 사람이 경천보패를 발동시키면 이전에 발동시켰던 저는 어떻게 됩니까?”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평범한 사람이 된다.]
“제천마존께서는 절 기억하고 계시잖습니까?”
[입신의 경지에 올라서면 그 어떤 외력도 스며들지 못한다. 그것이 설령 신들이 남긴 보패의 힘이라 하더라도!]
“모든 기억이 사라질 거라는 건 어찌 아십니까?”
[네가 경천보패를 발동하자 그 힘이 본좌의 혼백을 다스리려고 들었다.]
“혼백의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는 겁니까? 그래서 막았고요?”
[그렇다.]
“기억이 혼백에 남는 건가? 흠……!”
갸웃하던 화운은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경천보패를 발동시키면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요. 그런데 제천마존께서는 어찌하여 죽어 있었던 겁니까?”
[경천보패의 힘이 발동하여 다시 살아나는 건 혼백이 육신에서 떨어져 나갈 때다. 본좌는 공력의 힘으로 육신에 혼백을 봉인해 두었다. 하여 육신이 죽었음에도 다시 살아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걸 누군가가 깨트려 발동시키면 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는 거로군!”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고민하던 화운은 문득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떠올라 다시 제천마존을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이 시점에서 이걸 또다시 발동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
제천마존의 대답이 없었다.
지금까지 준비해 놓은 해답처럼 잘도 대답하더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화운은 의구심이 들어 다시 물었다.
“혹시 안 해보신 겁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큭!”
화운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찌 웃는 것이냐?]
“입신의 경지에 든 지 까마득한 분께도 빈틈이 있는 것 같아섭니다.”
[빈틈?]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니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다시 살아나는 시점을 원하는 대로 맞출 수 있다면 좀 덜 하지 않겠습니까?”
[그 반대다.]
“예?”
[시간이 한참 흐른 훗날로 다시 살아난다면 그 흘러 버린 시간만큼 네가 할 수 있는 게 줄어들 것이다. 놓아버린 촌각의 시간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때가 있다.]
“저도 바보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이 비동만큼은 한순간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 어떤 선택도 너의 몫이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지금까지였으니.]
“에? 가시게요? 아직 궁금한 게 너무 많은데!”
[이제 정말 끝이로구나! 아이야, 억겁의 시간을 끝낼 수 있게 해주어 진심으로 고맙구나!]
제천마존의 육신이 풀썩 부서져 먼지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화운은 부리나케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물어볼 것이 있는데 그 어디에도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제천마존이 보이지 않았다.
‘아, 이렇게 가버리면…….’
화운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시작점이 달라져도 문제가 될 건 없다.
공청석유와 인형설삼 그리고 내단을 복용하지 않고 챙겼으니 어느 시점에서 살아나더라도 그것들이 사라질 일도 없다.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을 굳이 찾자면 검마와 무영투에게 자신의 비밀을 영영 감출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고, 자신이 암로로 들어간 후에 무너진 것을 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화운은 망설였다.
‘패를 깨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
일단 정리할 건 정리해 놓고 라는 생각을 한 뒤 화운은 자신의 심장을 터트렸다.
제천마존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냥 그렇게 보내줄 거라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화운은 자신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두 분껜 미안하지만 경천보패에 관한 건 알려주지 않는 게 좋겠다.’
생각과 동시에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펼쳐 검마가 앞서간 암로로 질풍처럼 뛰어 들어갔다.
워낙 빠르게 달려간 것이라 누구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누구냐!”
무영투가 소리치며 따라붙었다.
하지만 곧 화운이 날린 검강에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화운은 더욱 빨리 달려가 검마를 따라잡았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가 소리치며 일검을 휘둘렀다.
바짝 쫓아간 화운은 마주 검강을 발휘하였다.
콰앙!
암로가 송두리째 무너질 것처럼 요동친 순간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극성으로 발휘하여 주춤 하는 검마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어림없다!”
검마가 다시 검강을 발휘하였지만 마주 휘두른 화운의 검강에 되레 상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입고 말았다.
화운이 이제는 검마조차 눈 아래로 볼 고수가 된 것이다.
‘죄송합니다.’
화운은 그대로 검마를 지나쳐 간 후 검멸을 발휘하여 천장을 후려쳤다.
쿠-웅! 콰르르르!
그 단단하던 천장이 무너졌다.
검멸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드러난 광경이었다.
암로가 무너졌으니 이제 검마를 비롯하여 누구도 화운의 뒤를 따르지 못하게 되었다.
화운은 그렇게 제천마존의 비동 깊숙한 곳까지 혼자서 갔다.
비동 속에 감춰진 비동으로 들어간 화운은 삼두독각망의 머리 셋을 일검에 베어버리고 공청석유와 인형설삼 그리고 이무기의 내단까지 다시 취했다.
화운은 삼두독각망의 사체를 응시했다.
‘비늘은 다음에 필요할 때 챙기러 오자.’
지금 급한 건 제천마존을 다시 만나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화운은 비동 밖으로 나갔다.
만월이 뜬 밤 아래 새하얀 인영이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고 있었다.
다시 봐도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검무였다.
화운은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잠깐 넋을 잃은 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자리를 떠 산 정상으로 향했다.
공공무영비 칠단공 부풍무영을 펼쳐 제천마존의 비동 입구를 지키는 무인들 뒤로 조용히 내려선 화운은 광장을 향해 곧장 달렸다.
잠시 후 용암의 바다를 건너 제천마존을 만났던 곳에 도착한 화운.
“……!”
화운은 당황했다.
제천마존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왜, 왜 없지?”
억겁의 시간을 끝내고 보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더니 정말인 건가?
이미 죽어버린 육신에 혼백을 봉인 해 둔 것일 뿐이기에 경천보패의 신력에도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럼 난 누구한테 물으라고! 무극! 시공안! 그게 대체 뭐냐고!”
짜증까지 실어 소리쳐 보지만 들리는 건 자신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뿐이다.
“제천마존-!”
목에 힘줄이 불거지도록 외쳐보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가 대답할 리 만무했다.
“진짜! 쳇!”
화운은 신경질 적으로 혀를 차며 경천보패를 집어 들었다.
제천마존이 사라져도 경천보패는 원래 그대로 오색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 고통이라고?”
죽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기사.
그 덕분에 틀어지고 어긋난 삶을 다시 바로 잡을 수가 있다.
“아냐! 내겐 축복이야! 이것 덕분에 이만큼 강해졌고, 앞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어!”
화운은 저승에 간 제천마존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 후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뒤쪽에 석문이 있었고, 개패장치 또한 쉽게 눈에 띄었다.
화운은 석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만월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화운은 경천보패를 들고 고민했다.
“이걸 다시 깨트리면 어떻게 될까?”
너무 궁금했다.
혹시 경천보패가 진짜 박살이 나서 다시는 전과 같은 묘용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혹시 경천보패를 깨서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그동안 익혔던 무공도, 쌓았던 공력도 전부 사라지고 결국 기억조차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슬쩍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알고 싶었다.
경천보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더 할 수 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하나라도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까짓 거!”
화운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다시 시작해도 한 번 와봤던 길이다. 또다시 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것보다 보패가 깨지고 나면 벌어질 일을 모른 채 사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시간은 항상 자신의 편, 그 시간이 어찌 변할지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이다.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화운은 들고 있던 경천보패를 단단한 바닥에다 힘껏 찍었다.
번-쩍!
경천 보패가 깨지면서 눈부신 섬광이 폭발하였다.
천지간의 간극을 뒤틀어 시와 간을 바꾸니 이를 경천보패라 한다!
천상의 울림 같은 준엄한 일갈이 혼백까지 뒤흔든 순간 화운은 눈앞의 광경을 두고 자신이 뒤로 확 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