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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22화 (22/207)

#022. 이제 천하제일인은 접니다!(1)

“낭왕께선 어인 행차시오? 여긴 아이들밖에 없는 곳인데 말이오.”

귀에 익은 목소리다.

화운이 돌아보니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남궁검가주였다.

선우세가주도 보였고 다른 고수들도 보였는데, 나머지 삼대세가의 가주들인 것 같았다.

낭왕은 대꾸하지 않고 화운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남궁검가주 등이 중간을 막아서기 직전에야 걸음을 멈추고 구환도를 뽑아 화운을 가리켰다.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다.”

선전포고에 가깝다.

남궁검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설명을 말이오?”

“저놈! 저놈 정체가 무엇이냐?”

낭왕의 구환도는 여전히 화운을 가리키고 있다.

남궁검가주가 화운을 돌아봤다.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들끼리는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남궁검가주는 다시 낭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하시오.”

“아니 저놈의 정체부터 밝혀라. 아니면 전쟁이다.”

“우리가 전쟁을 꺼려하는 것 같소?”

“이번만큼은 꺼려해야 할 것이다. 이대로 전쟁이 나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명분이라는 게 우리 쪽에 있는 것이니까.”

낭왕의 언사엔 거침이 없다.

뭔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리라.

“우선 저 아이의 정체부터 알아보는 게 좋겠소.”

남궁검가주의 곁에서 백의인이 말했다.

백리세가의 가주다.

남궁검가주는 남궁현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는 사이더냐?”

“이제 막…….”

남궁현은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했다.

남궁검가주의 미간이 찌푸려질 찰나.

“제 형입니다.”

선우유성이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선우유성에게로 향했다.

잠깐 움찔했지만 선우유성은 일부러 가슴을 펴며 당당하려 애썼다.

“전 선우세가의 소가주이고, 저와 사촌간인 형님이십니다. 신분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우유성의 말에 남궁검가주가 선우세가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던 선우세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낭왕이 쩌렁 외쳤다.

“역시나 이 모두가 정파의 음모라는 것이렸다!”

“밑도 끝도 없이 그 무슨 중상모략인 것이오?”

“중상모략? 그렇다면 비동이 무너지기 전에 검마와 함께 들어간 저 놈이 버젓이 이곳에 서 있는 이유를 설명해 보아라!”

“……!”

남궁검가주는 물론이고 정파의 모든 고수들이 할 말을 잃고 화운만 바라보았다.

“비동이 무너지기 전에 들어갔다는 것이 사실인가?”

남궁검가주가 물었다.

“사실입니다.”

화운이 대답했다.

화운은 거리낄 게 없었다.

아니 싸우고 싶어 안달인 것을 참는 게 더 곤욕이었다.

“푸하하하하!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대로 전쟁을 할까 아니면 무슨 음모를 꾸민 것인지 순순히 밝히겠느냐?”

“음모 같은 건 없소.”

“그럼 증명해 봐. 음모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란 말이다!”

낭왕은 물 만나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우리가 당신들 같은 줄 아시오? 정정당당하지 않으면 정파가 아니오. 음모 따윈 없소.”

“정녕 그럴까? 정녕 그렇다면 저놈을 우리가 데려가서 문초해도 되겠구나!”

낭왕이 기세등등하였다.

바로 이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선우세가주였다.

“감히 선우세가의 사람을 본 가주의 허락도 없이 데려가겠다고? 용납할 수 없다!”

낭왕의 얼굴이 흉악하게 와락 일그러졌다.

“그럼 전쟁이로군.”

낭왕이 살기를 일으킨 순간.

“이 문제는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상황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차분한 음성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우문검가의 가주였다.

“설마 저 아이를 내놓기라도 하자는 것이오?”

남궁검가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음모를 꾸미지 않았다고 말한들 저들에겐 억지일 뿐이오. 그리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였소.”

“지금 선우세가가 음모를 꾸미기라도 했다고 의심하는 것이오?”

남궁검가주가 언성을 높였다.

우문검가주는 태연히 사람들의 반응을 주시하며 말했다.

“모르니까 확인을 해보아야지요. 그리고 음모 같은 게 없다면 천사련에 내주지 못할 까닭이 무에 있겠소?”

“음모가 없다면 더더욱 내주지 말아야지 어찌 내놓는단 말이오?”

“그럼 저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오? 이 사달을 일으킨 원흉 하나 살리자고 전쟁이라도 벌이자는 것이오? 우문검가는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피를 흘릴 것이오만, 사사로이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을 지키는 것이라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릴 생각이 없소.”

우문검가주가 합리성을 내세우며 선우세가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그 속셈을 알기에 남궁검가주는 더욱 화가 났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이 일은 본가가 책임질 일, 다른 세가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니 염려 놓으시오.”

선우세가주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낭왕을 향해 다가갔다.

“본가는 음모 따위는 모른다. 그럼에도 음모 운운하려거든 본가주를 먼저 쓰러트려라.”

지금의 선우세가주는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는 물러날 줄을 모른다.

가문을 일으키는 데에 일생을 바치고 있으면서도 타협을 모르니 세가의 가세는 자꾸만 기울어지고 있었다.

“선우세가가 가는 길에 남궁검가가 빠질 순 없지.”

남궁검가주가 나서서 선우세가주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선우세가주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럴 필요 없네.”

“입장을 바꿔 자네라면 날 그냥 두고 보겠는가?”

선우세가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었어도 내버려두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니까.

“싸울 때 싸우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는 게 우선이지 않겠나?”

남궁검가주가 화운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아인 반골기질이 다분하지만, 음모를 꾸미고 할 정도로 삐뚤어지지는 않았네.”

“자네가 믿는다면 나도 믿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믿어달라고 종용할 순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맞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선우세가주는 그제야 화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때 화운은 선우세가주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화운이 움직였다.

그는 선우세가주와 남궁검가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낭왕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다가갔다.

검을 뽑았다.

그리고 기세를 일으켰다.

우문산을 상대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화운에게서 휘몰아쳤다.

선우세가주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남궁검가주도 선우세가에 이토록 대단한 후기지수가 있었나 싶어 눈을 치떴다.

우문검가주 역시 놀랐다.

반드시 밟고 올라서야 할 선우세가에 저토록 강한 후기지수가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으흐흐!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낭왕이 입맛을 다셨다.

“비동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그럼 날 쓰러트려 봐.”

화운이 히죽 웃었다.

“다들 들었지? 저놈 나한테 검을 뽑았어. 나서지 마. 누구든 나서면 전쟁이야!”

낭왕이 살기를 드높이며 구환도를 흔들었다.

남궁검가주와 선우세가주는 이대로 화운이 혼자서 싸우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둘 보다 한 발 앞서 말한 자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무인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오. 정과 사를 따지고 그럴 일은 아닌 듯싶으니 양쪽 다 나서지 말아야 할 것이오!”

우문검가주다.

그가 낭왕이 맘껏 화운을 요리하도록 자리를 깔아버렸다.

훗날 우문세가의 걸림돌이 될 것이 다분해 보이는 선우세가의 싹을 낭왕의 칼을 빌어 잘라 버리겠다는 악독한 심보였다.

“아니 될 말이오!”

남궁검가주가 나섰다.

그는 화운에게서 선우세가의 희망을 보았기에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선우세가주조차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이보게.”

“무인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네.”

“자네 허락 없이는 데려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데려가려 한다면 내가 나설 것이네. 하지만 공정한 싸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무인의 당당함은 힘이 아니라 언행일치에서 나오는 것이네.”

“자네 정말……!”

선우세가주의 꽉 막힌 사고에 남궁검가주가 답답함을 느낄 때였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는 소리가 장중하게 울렸다.

남궁검가주가 반색하며 돌아보니 누런 가사를 걸친 노승이 네 명의 노인들과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노승의 정체는 천년소림의 나한당주였다.

그리고 그 옆의 고상한 인상을 풍기는 노도사가 바로 대무당파의 우진궁주였고, 날카롭게 잘 벼려진 검을 보는 듯은 중년검객은 화산파의 매화검주 그리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파가 아미파의 멸절신니였고, 마지막으로 서책깨나 읽을 것 같은 노년의 학사 같은 노인이 바로 점창파의 일양신수였다.

정도를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이라고 하여 정도십주라 불리는 열 명의 고수들 중 다섯이 나타난 것이다.

나한당주를 비롯한 고수들이 나타나자 천하의 낭왕조차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오.”

나한당주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낭왕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운을 끌고 갈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건너 버린 삼도천이라 누구도 돌이킬 수 없으니 땡중께선 나서지 마시오.”

“돌이키지 못할 걸음은 없다 하였소. 낭왕 시주께선 화를 가라앉히시고 차분히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떻겠소?”

“나서지 말라고 하였다!”

화가 극도로 치민 낭왕이 버럭 소리치자 나한당주와 함께 온 이들 중 가장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멸절신니가 마주 호통을 터트렸다.

“어린놈이 어디서 침을 튀기고 지랄인 것이냐! 주둥이를 찢어놓아야 닥치고 고분고분 할 것이냐!”

멸절신니의 고함에 낭왕이 찢어죽일 듯이 쏘아본 순간이었다.

“쯧쯧! 일만을 이끄는 수장에게 어린놈 운운하는 것을 보니 멸절은 관에 들어가야 할 모양이다!”

칼칼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주위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화운이 의아하여 둘러보니 어디선가 검은 안개가 몰려와 사위를 뒤덮고 있었다.

“흑야(黑夜)……!”

“환, 환사가 나타났어……!”

정파의 군웅들이 두려움에 떠드는 순간.

“담화를 나누는 자리이니 야주께선 얼굴을 보이시는 게 좋겠소!”

듣기 좋게 울리는 중후한 음성과 함께 한 줄기 새하얀 빛이 치솟아 어둠을 쪼개기 시작했다.

화운이 이건 또 뭐냐는 얼굴로 돌아보니 노년의 학사 같은 외양의 일양신수가 한 손을 뻗고 있는 게 보였다.

새하얀 빛은 검지와 중지만을 붙여서 곧게 편 그의 검결지에서 발출되고 있었다.

“점창의 일양지로군. 떠도는 말로 일양지가 흑야와 상극이라던데, 어떤가? 이참에 그 말이 맞는지 확인을 해 보는 것이.”

“풍문은 풍문일 뿐. 일일이 확인하려든다면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니 사양하겠소!”

“어허허!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나 보군.”

“맞소. 내 싸움에 애꿎은 희생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가 없소.”

“허면 충분히 뒤로 물리면 되겠군.”

환사가 말 꼬리를 계속 물고 늘어지자 성질 급한 멸절신니가 더는 못 참겠다며 검을 뽑아 던졌다.

“시끄럽다! 빈니가 상대해 줄 테니까 썩 모가지나 내밀어라!”

멸절신니가 던진 검이 한줄기 노을빛이 되어 어둠을 갈랐다.

꽝!

굉음이 터졌다.

노을빛이 어둠과 함께 부서졌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검은색 일색인 수백 명의 무리들 앞에 세 명의 고수가 보였다.

가슴께까지 길게 기른 수염마저 검은 색인 흑면의 노인, 그가 바로 흑야의 주인인 환사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대도를 등에 지고 있는 적의 청년이 서 있었고, 환사와 적의 청년의 사이에는 순백의 무복에 머리마저 백발이라 무척이나 인상적인 용모의 청년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의 등장에 특히 백발 청년의 모습에 정파 진영이 무겁게 침묵했다.

백발 청년은 두 팔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서 있었는데 멸절신니가 날렸던 검은 그의 바로 앞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돌아와라!”

멸절신니가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자 검이 되돌아왔다.

백발청년은 검이 되돌아가는 광경을 무심한 눈길로 지켜보기만 했다.

무척이나 오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오만함이 묘하게 어울렸다.

‘난놈 중의 난놈의 등장인 건가?’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화운도 알아보았다.

‘구룡성의 태자!’

천사련의 중심인 구룡성(九龍城)의 소성주 구룡태자 북궁무결!

그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적성대도문(赤星大刀門)의 소문주인 신풍대도 사도강이겠군!’

둘은 항상 붙어 다닌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사도강이 북궁무결에게 패해 그의 심복이 되었다고 했고, 또 일각에서는 둘의 뜻이 맞아 의형제를 맺었다고도 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둘의 무위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화운은 보는 것만으로도 둘이 자신을 능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았다.

‘실망할 필요는 없어!’

맞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저들은 이미 완성된 무인이다.

하지만 화운 자신은 아직 미완성이다.

공력은 준비가 되었지만, 자신의 성명절학으로 삼아야 할 검학은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풍검.

화운은 부친이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풍검을 자신의 대표 무학으로 삼을 생각이지만, 아직 반의반도 익히지 못했다.

‘좋아! 목표 조정이다. 지금부터 내 목표는 바로 너다!’

화운의 시선이 북궁무결에게 꽂혔다.

맹수는 맹수를 알아보는 법.

북궁무결의 시선 역시 화운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 순간 화운이 씩 웃었다.

북궁무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운의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가 없어서다.

북궁무결에게 궁금증만 떠안겨준 화운은 시선을 돌려 낭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큼 걸었다.

“이만하면 구경꾼들도 충분히 모인 것 같으니 이제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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