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이제 밖으로(2)
화운과 검마는 석조정자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말로 바깥세상으로 나갈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바로 나가지 못했다.
‘사라락!’ 하는 소리가 한쪽 벽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보니 시커먼 암벽 위쪽에서 어둠보다 더욱 시커먼 무언가가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안력이 이전 보다 월등히 발달한 화운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저거 지네인데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어른몸통만 한 지네 수십 마리가 벽을 따라 바글바글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흐음, 영물이 있는 곳엔 영과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엔 영과가 없어 이상하다 싶었다. 아마도 이무기는 저놈들을 잡아먹기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나보다.”
지네들은 이무기의 사체를 향해 몰려갔다.
그리고 곧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잡아먹힌 동족들의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만 가시지요.”
화운과 검마는 천장에 뚫린 구멍을 쳐다보았다.
빛의 기둥이 쏟아지고 있는 천장의 구멍은 사방 벽이 유리처럼 반질거렸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바깥에서 비추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고 반사하여 아래까지 끌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전의 화운이라면 절대 오르지 못했겠지만 공공무영보를 상당한 수준으로 익힌 데다 공력까지 지대해진 화운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구멍을 따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세차게 부는 바람이 맞아주었다.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을 타고 부는 바람이라 옷자락이 찢어질 듯 나부꼈다.
화운과 검마가 밖으로 나온 위치는 까마득한 높이의 상층부 중간이었다.
두 사람은 벽을 박차고 신형을 솟구쳐 절벽 위로 올라섰다.
“멋지군요!”
주위를 내려다본 화운이 감탄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나 있는 수많은 기암괴석들 중 한 곳의 정상에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있는 기암괴석들 사이사이로 새하얀 운무가 휘감고 있어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보아야겠다.”
검마는 자연의 풍광에 감흥을 받을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삶이 아직 여유가 있다면 화운에게 무공을 가르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화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복잡했다.
그리고 복잡한 만큼 짧은 이별을 택했다.
검마는 화운이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신형을 아래로 날렸다.
화운은 검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공손히 포권했다.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제가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드려야 하거든요.”
화운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검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포권하였다.
***
“형?”
화운이 임시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선우유성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작스런 화운의 등장에 놀랐고, 뭔가 많이 달라져 보여 또 놀랐다.
“어, 나다. 대단한 곳에 간다기에 걱정이 되서 와봤는데 멀쩡하네?”
화운이 선우유성의 위아래를 살펴보며 말했다.
다행히 어디 한 군데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나야 멀쩡하지, 근데 뭔가 이상해. 형이 이렇게 컸었나? 원래 나보다 작지 않았어? 그리고 얼굴이 되게 달라져 보여.”
“세가 내에서 눈치 밥 먹느라 항상 웅크려서 작아 보였나 보지. 근데 얼굴은 뭐가 달라져 보인다는 거냐?”
“이상하게 잘생겨 보여. 깨끗해서 그런가?”
선우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간만에 씻어서 그런가 보다.”
화운은 대충 얼버무렸다.
“비동은 위험하지 않았냐?”
“비동의 일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깊은 곳까진 들어가 보지도 못했어. 그보다 이렇게 와도 돼? 가주님께서 근신하라고 하셨잖아.”
선우유성의 말에 화운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는데 잘되었다. 다시 시작해도 검마 대협이랑 처음부터 동행하면 유성이가 다칠 일은 없겠다.’
화운은 그렇게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말은 다 들어도 가주님 말씀만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러다 어쩌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렇게 말을 멈춘 화운은 천막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명문대파의 후기지수라는 걸 복장과 얼굴 표정으로 한껏 과시하고 있는 청년들과 이제 막 미모가 활짝 피어오른 소녀들이 보였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잘나가는 후기지수들인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화운이 어울릴 수 없는 딴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일단 나가자.”
“나가긴 뭘 나가. 이 기회에 인사나 나눠.”
선우유성이 돌아선 다음 화운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여긴 내 사촌형님이십니다. 인사들 나누십시오.”
선우유성이 소개하자 화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화운입니다. 피가 섞였다는 핑계로 선우세가에서 밥만 축내고 있지요. 변변한 무명조차 없으니 그저…….”
화운은 말을 멈추었다.
선우유성이 형이라고 부르자 관심을 보이던 이들이 사촌이라는 말에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끔한 화운의 얼굴에 혹했던 소녀들조차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봐라. 그냥 나가자고 했잖아.”
화운이 돌아서며 선우유성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이런 결례가 어딨어?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선우유성이 화를 냈다.
그러나 콧방귀를 뀌는 이들은 있어도 미안해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 같은 광경에 선우유성이 더 크게 분노하려고 하자 화운이 재빨리 말했다.
“날 봐. 날 보라고 했잖아!”
화운의 음성에 거부치 못할 힘이 느껴져 막 화를 터트리려던 선우유성이 돌아봤다.
“거목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진짜 거목이 되고 싶거든 자잘한 것들에는 일일이 반응하지 마. 넌 그냥 앞만 보고 가도록 해.”
가까이서 바라본 화운의 눈빛은 참으로 깊었다.
무언가 거대하게 웅크리고 있는 힘이 느껴져 선우유성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방금 자잘한 것들이라고 했나?”
불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화운이 고개를 돌려보니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문가의 잠룡이라고 불리는 우문산이야. 형, 내가 알아서…….”
“아니 형이 한다. 자잘한 것들은 형이 전문이거든.”
화운이 앞으로 나섰다.
우문산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얼굴에 불쾌하다는 기색들이 가득했다.
“자잘한 것들이라고 했는데, 그게 왜?”
“닥쳐라! 날 모욕하는 건 본가를 욕보이는 일, 이대로 묵과할 순 없다!”
“웃기는군.”
“지금 웃기다고 했나? 선우세가의 피가 섞였다고 하여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대세가 중 수위는 남궁검가와 황보세가다.
바로 그 다음이 백리세가고.
과거엔 선우세가 역시 그 두 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었는데, 두 세대 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지금은 오대세가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반면 우문세가는 선우세가가 잃어버린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날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문산은 선우세가의 소가주를 쓰러트려 자신과 가문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먼저 형이라는 자를 쓰러트리면 선우유성이 나설 수밖에 없을 터, 그때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붙여 창피를 주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널 모욕한 대가는 뭐지?”
화운이 물었다.
“팔 하나는 내놓아라.”
우문산이 기세를 일으키며 말했다.
오른손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무력을 써서라도 팔 하나는 잘라놓겠다는 뜻이다.
‘선우유성이라 하더라도 날 능가하진 못해. 저 사촌형이란 자는 말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어.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자야.’
우문산은 자신만만했다.
“좋아.”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대로 순순히 팔 하나라도 내놓겠다는 거야?’
우문산이 의아해 할 때였다.
“널 모욕한 대가는 들었고, 이제 날 모욕한 대가를 알려줄 게.”
“뭐?”
“난 화씨가문의 문주다. 누구든 날 모욕한 자는 주둥이부터 뭉개버릴 거다!”
화운이 차갑게 말하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선우유성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두가 놀랐다.
선우유성은 화운이 이토록 막나갈 줄을 몰랐고, 다른 이들은 감히 우문가의 소가주를 상대로 싸우자고 들 줄을 몰라서 놀랐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또 있었다.
화운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일으키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다.
삼류처럼 건들거리는 모습 뒤에 어떠한 기세가 도사리고 있는지.
성큼 내딛는 일보마다 강렬한 기운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문산을 응시하는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못해 심장을 얼려버릴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우문산은 얼어붙었다.
전신이 주박에라도 걸린 듯 옴짝달싹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패기 넘치고 극도의 수련을 한 우문검가의 핏줄이었다.
‘이건 사술이다!’
우문산은 강한 부정으로 내부의 힘을 폭발시켰다.
내력이 휘돌고 우문가의 검공이 맘껏 활개를 칠 준비를 마쳤다.
오른팔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지고 화운이 자신의 간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우문검공의 발검세가 폭발하였다.
번쩍!
욱일승천하는 우문검가의 힘을 과시하듯 찰나에 피어오른 검광이 눈부셨다.
쓰-캉!
불똥이 튀었다.
우문산의 검은 허공에 우뚝 멈추었다.
그의 검을 막은 건 화운의 검이었다.
씨익!
화운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른 순간.
뻐억!
우문산의 고개가 돌아갔다.
화운이 공공무영보를 펼쳐 찰나의 순간을 쪼개고 달려들어 검을 쥔 팔꿈치를 휘돌려 우문산의 턱을 후려쳤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우문산의 능력으로는 움찔거리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선우세가의 피가 섞였다고 하여 가만히 둘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너야말로 우문가의 핏줄이라 하여 대충 넘어갈 거라는 기대는 모기 오줌만큼도 하지 마라.”
뻐억!
우문산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화운의 왼쪽 팔꿈치가 그의 턱을 후려친 것이다.
주르륵!
우문산의 입에서 부러진 이들이 붉은 피와 함께 쏟아졌다.
“흑도에서는 너 같은 새끼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아?”
“……!”
우문산이 넋 나간 얼굴을 간신히 쳐들었다.
“우선 무릎을 꿇려.”
화운이 양쪽 정강이를 차례로 걷어차자 우문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지금 니 모습이 함부로 기어오른 놈들의 말로야. 거기에 좀 성질 더러운 놈들한테 걸린다면 목이 댕겅 잘리는 거지.”
거기까지 말한 화운이 자신의 검을 우문산의 목에 댔다.
검날의 차가움에 우문산이 움찔 하였다.
“니가 보기엔 어떨 것 같냐? 내가 좀 성질이 더러워 보이냐?”
“혀엉!”
선우유성이 소리쳤다.
화운이 일합만에 우문산을 제압해 버리는 광경에 놀랐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이다.
화운은 왼손을 들어 나서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오만무례하게 무시하던 이들을 쓱 둘러봤다.
모두들 경악한 모습들이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이들도 있었지만, 우문산을 압도하는 화운의 무위에 감히 나서진 못했다.
“그래 이해한다. 니들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격이 떨어져 보였을까. 세상을 아무리 아름답게 보려고 해도 결국은 피가 흐르는 곳이니 힘이 우선이겠지. 나 역시 니들이 더 강해 보였다면 그냥 고개를 돌리고 나갔을 거다. 그러니 니들도 대들지 못하겠거든 그렇게 빳빳하게 쳐다보지 말고 고갤 돌려!”
화운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그 사나움에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 자가 없었다.
이때였다.
천막의 입구가 와락 들춰지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 무슨 일이래? 누구 아는 사람…… 엇!”
안의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놀란 이는 남궁검가의 소가주인 남궁현이었다.
스-릉!
“누구야 당신!”
남궁현이 검을 뽑아 화운을 경계하였다.
순간 선우유성이 잽싸게 남궁현의 옷자락을 잡았다.
“내 형이야.”
“뭐?”
남궁현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사촌형인데, 우문산이랑 시비가 있었어.”
“그-래?”
남궁현이 화운과 우문산을 돌아보더니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던 얼굴을 풀며 말했다.
“시비가 붙다보면 피도 보고 그러는 거지. 남궁현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남궁현이 화운을 향해 포권했다.
왠지 우문산의 모습에 속 시원하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화운은 검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짧게 포권했다.
“화운이오.”
화운은 이전의 반복 중에 남궁현을 만난 적이 있지만, 남궁현은 기억을 하지 못하니 지금이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화운이 이름을 말하자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 남궁현이 선우유성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천사련이 여기를 에워싸고 있어.”
남궁현의 말에 모두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운 역시 궁금하여 다가왔다.
남궁현이 모두가 보라는 듯이 천막의 입구를 완전히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자 선우유성과 화운이 뒤를 따라 나갔다.
나가보니 남궁현의 말 대로였다.
딱 봐도 사파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흉악해 보이는 자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엔 낭왕이 보였다.
“저자입니다! 분명 저자가 검마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낭왕의 곁에서 굽실거리며 따르던 자가 화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화운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자신과 검마가 비동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이후에 무너졌다.
그런데 자신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까.
지금 화운 자신을 가리키는 자는 천사련의 끄나풀쯤 되는 자일 것이고, 무영투와 함께 움직이던 일반 군웅들 틈에 있었을 것이다.
“형……!”
선우유성이 돌아봤다.
“괜찮아. 하늘이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 겁 먹지 마.”
화운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낭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당한 걸음, 오만한 표정.
낭왕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리낌 없었다.
밖으로 나온 정파의 후기지수들은 낭왕이 보이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현 마저 침착하지 못했다.
낭왕을 비롯한 천사련의 고수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으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화운은 달랐다.
희한하게도 손이 근질거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신경들이 곤두섰다.
전신의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지며 맘껏 폭발하기를 기대하였다.
호승심이다.
싸우고 싶은 거다.
무인이라는 족속들은 힘이 생기면 써보고 싶어 안달한다.
화운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
낭왕이라면 훌륭한 상대다.
수백 번의 죽음으로 익힌 무공들을 맘껏 풀어보고 싶다.
화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화운은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낭왕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맹수가 먹잇감을 노려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