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비동 속의 비동(3)
그르르르륵!
화운이 추모문이 새겨진 벽의 하단을 힘껏 걷어차자 위쪽에 감추어져 있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통로 끝에 가면 머리 셋 달린 이무기가 있습니다. 그놈은 목이 급소인지 강기를 발휘하면 쉽게 잘리더군요. 근데 조심해야 합니다. 목이 잘린 순간 독액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니까요.”
통로를 걸어가며 화운이 설명했다.
혹여 검마가 방심할까 싶어 뱀대가리라 칭하지 않고 이무기라고 했다.
“어찌 그리 잘 아는 것이냐?”
검마는 말이 없었고 무영투가 물었다.
“처음이 아니니까 알죠.”
“진짜 처음이 아니냐?”
“뭔 의심이 그리 많습니까? 영감님도 여기 오는 게 처음이 아닌 건 아십니까?”
“그럴 리가!”
“영감님도 여기서 죽었습니다.”
“거짓말 마라! 이렇게 멀쩡한……!”
“진짜 죽었습니다. 영감님이 죽은 다음에 저도 여기서 죽었고요. 음, 죽는 순간만큼은 내가 먼저이려나?”
“어떤 놈이냐? 설마 여기 검마가 죽인 것이냐?”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드릴까요? 정말 끔찍하게 죽으셨는데…….”
끔찍하다고 하니 더 궁금해진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으니 조심할 수도 있고, 여튼 무영투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죽었느냐?”
“그 이무기를 발견했을 때 그놈이 뭔가를 우리 앞에 뱉었습니다.”
“그게 뭐냐?”
화운은 말하지 않았다.
턱짓으로 무영투를 가리켰다.
순간 무영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나라고?”
“끔찍하죠?”
“그게 말이 되느냐? 내가 그깟 미물한테 잡아먹힌단 말이냐!”
“그깟이라고요? 그놈이 화산파의 고수도 꿀꺽했고, 영감님은 물론이고 나까지 한입에 삼켜버렸는데, 그깟이라고요? 그럼 영감님이 혼자 잡아보십시오. 그럼 영약들을 양보하겠습니다.”
무영투의 눈빛이 잠깐 번뜩였다.
영약들을 양보하겠다는 말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아냐, 아냐! 그 미물이 그토록 무서운 놈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무영투는 깨끗이 단념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아니다. 보물은 먼저 발견한 놈이 임자인 법이다. 영약들은 네놈이…… 어? 어, 어!”
무영투의 눈이 커졌다.
그는 걸음까지 멈추고 화운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놈을 발견했을 때 날 뱉었다고 했잖아! 그 말은 곧 영약들을 먼저 발견한 건 나라는 것이잖아!”
화난 듯 몰아붙이는 무영투의 모습에 화운은 순간적으로 찔끔했다.
하지만 곧 그만의 대응 방법이 생각나 더 강하게 나갔다.
“맞습니다. 영감님이 가장 먼저 발견하셨습니다. 우린 이 비밀통로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근데 그게 왜요?”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까 영약들은 내 것이다. 검마께서도…….”
무영투가 검마를 돌아볼 때였다.
스-릉!
화운이 검을 뽑았다.
“무슨 짓이냐?”
“죽으려고요.”
“뭐랏?”
“쳇! 이번에 죽으면 영감님한텐 절대 알려주지 말아야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화운이 검날을 역으로 잡아 심장을 냅다 찔렀다.
하지만 검끝은 살갗에 상처만 내는 정도로 멈추고 말았다.
무영투가 검의 손잡이를 잡아버린 것이다.
“무슨 짓이에요?”
화운이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진짜 죽으려고?”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했잖아요. 염려 말고 놓으십시오!”
“다시 살아나면 나한텐 말하지 않겠다며?”
“영감님 같으면 하겠어요?”
무영투는 할 말이 없었다.
잠깐 멀뚱멀뚱 쳐다보던 무영투는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자고 생각했다.
“다시, 다시 이야기해 보자. 분명 우리 둘 다 만족할 방법이 있을 거다.”
“내가 원하는 건 검마 대협만큼 강해지는 겁니다. 그러려면 그 영약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영약들이 대체 뭔데?”
“가 보시면 압니다. 그리고 욕심 내지 마시라고요.”
화운이 검끝을 돌려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하자 무영투가 손잡이를 놓았다.
“그것뿐이었느냐?”
“뭐가요?”
“다른 보물 같은 건 없었느냐?”
“암것도…… 아니 모르겠습니다. 고수라는 사람들이 영약들에 미쳐 날뛰고, 그 괴물 같은 놈을 피해 도망치느라 정자 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러냐?”
무영투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화운이 다시 검을 뽑았다.
“영감님께선 그냥 모르시는 게 낫겠습니다.”
“아, 아니 잠깐만! 혹시 이무기라니까 내단이라도 있으면…….”
“내단이든 뭐든 욕심내지 마시라고요.”
“그 단단하다던 비늘이라도 안 되겠느냐?”
“도둑질 많이 했다면서요? 흥청망청 다 써버리지는 않았을 테고 어디든 모아두었을 거 아닙니까? 대체 왜 그리 욕심을 내는 겁니까?”
“도둑이잖느냐.”
“예?”
“도둑이니 당연히 욕심을 내야지. 여기 비동까지 와서 빈손으로 간다면 그게 도둑이겠느냐!”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가 어딨어요!”
“핑계 아니다. 평생 도둑질만 하고 살았고, 잘하는 것이라곤 도둑질밖엔 없다. 도둑질을 해야만 살아 있는 것 같으니 어쩌겠느냐, 숨을 쉬고 있으면 훔쳐야지.”
“하아! 역시 영감님은 안 되겠어요.”
“나도 안 되겠다.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보물이든 뭐든 먼저 손에 쥐는 자가 임자인 법, 난 가서 영약들이랑 내단이나 챙겨야겠다!”
무영투가 총총히 가버렸다.
화운은 인상을 쓰며 뒤를 쫓아갔다.
검마만이 담담한 신색 그대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을 쫓아가는 그의 속도는 충분히 빨랐다.
화운의 말대로 돌로 지어진 정자가 있었다.
그리고 정자 반대편에는 시커먼 동부가 보였다.
무영투와 화운은 조용히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빛이 정자 안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지붕 중앙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빛이 정자 안까지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공, 공청석유!”
무영투가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화운이 영약이라고 하여 백년하수오 쯤으로 여겼었는데 공청석유라니?
정자 안에는 밝은 빛을 받으며 자그마한 돌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옥병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앞에 돌상을 파서 공청석유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으엑? 인형설삼!”
옥병 옆에는 팔뚝만한 청옥함이 놓여 있었고 인형설삼이라고 쓰여 있었다.
무영투는 놀라 자빠질 것만 같은 얼굴로 화운을 쳐다보았다.
“이, 이게 정녕……!”
“정녕이고 나발이고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화운이 반대편의 동부를 살피며 외쳤다.
무영투는 그제야 말도 안 되는 보물을 눈앞에 두고도 화운이 달려들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이야 기관을 의심하는 오랜 습관 때문에 진귀한 것일수록 더 살펴보고 인내한 다음 취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진귀한 것일수록 냅다 집어 들고 만다.
대개의 경우 그러다 기관에 의해 이승을 하직하곤 한다.
“온다……!”
화운이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깟 뱀대가리가 뭐가 무섭다고……!”
긴장하는 화운의 모습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던 무영투의 고개가 위로 젖혀지면서 두 눈은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히엑?”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무영투가 후다닥 물러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도둑질을 하느라 천하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인 무영투였으나 지금껏 이 정도로 거대한 놈은 본적이 없었다.
화운의 말대로 머리가 셋인 놈이 거대한 동체를 드러냈다.
단순히 거대한 정도가 아니라 무지막지할 정도로 거대한 놈이었다.
“뭐, 뭐가 이리 크냐?”
“그깟 뱀대가리람서요?”
“저게 어떻게 그깟이야!”
“영감님이 그깟이라고 했다고요!”
“미쳤나 보지!”
두 사람이 소리치는 사이에 세 개의 머리통이 완전히 동부 밖으로 나온 이무기가 아가리를 벌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위협했다.
번쩍!
갑작스런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검마가 날린 검강이었다.
쾅!
검강이 세 개의 머리통 중 하나에 작렬하자 그대로 터져 버렸다.
확실히 검마의 신위는 엄청났다.
이전에 화운이 보았던 화산의 고수보다 월등히 더 강했다.
“피해요!”
화운이 외치며 석조정자의 천장에 달라붙었다.
이무기의 터져버린 머리통에서 녹색의 독액이 사방으로 튀었던 것이다.
무영투도 잽싸게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검마는 도리어 앞으로 나섰다.
강기의 벽을 일으켜 쏟아지는 독액을 막으며 다시 한번 검강을 날리려고 검을 들었다.
바로 이때, 위험을 감지한 이무기가 두 개의 머리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쉬악! 쉬아악!
두 개의 머리통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니 실로 무시무시했다.
검마는 당당히 서서는 검을 그었다.
번쩍 날아간 검강이 우측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이때 중앙의 머리통이 검마를 삼키려고 덥석 물었다. 하지만 검마가 일으키고 있던 강기의 벽이 마치 방패처럼 막아버렸다.
검마를 물 수 없다는 당황과 양쪽 머리통이 터져버린 고통.
두 눈을 굴리던 이무기의 하나 남은 머리통이 허공으로 빠르게 물러났다가 석조정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화운이 있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공격의 방향을 튼 모양이었다.
“안 돼!”
무영투가 소리쳤다.
석조정자가 무너지면 공청석유가 든 옥병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번-쩍!
새파란 검강이 공간을 가른 건 바로 이때였다.
검마가 검강을 날린 것이었다.
쾅!
정확히 목을 강타한 검강이 이무기의 하나 남은 머리통을 단박에 잘라놓았다.
둥실 떠오른 이무기의 머리통이 독액을 폭포수처럼 쏟았다.
다행히 누구도 독액을 뒤집어쓰지 않았다.
“내 보물!”
어느새 신형을 날린 무영투가 석조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땐 화운이 지붕의 천장에서 뛰어내려 돌상을 살피고 있었다.
“비켜라!”
무영투가 화운을 잡아채려고 손을 뻗었다.
“이거 이상한데요?”
화운의 말에 무영투가 잽싸게 멈추었다.
“왜?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느냐? 뭘 건드린 거냐?”
“그게 아니라…….”
화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한 손을 뻗어 돌상 위를 가리키고 고개는 돌려 무영투와 검마를 쳐다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절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무슨 귀신 헛구역질하는 소리야!”
무영투가 다가와 화운이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공청석유와 인형설삼이 든 옥함이 돌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절반의 빈 공간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억겁의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들로나마 위안 삼기를 바라노라.
“니 이름이 억겁이냐?”
“그럴 리가요.”
“그럼 시간이나 고통이냐? 아니면 이것이나 위안이냐?”
“아뇨.”
“그럼 이게 왜 널 가리키는 거냐?”
“전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억겁의 시간이잖습니까.”
“그렇게 갖다 붙이면 노부를 가리키는 걸 수도 있다.”
“어떻게요?”
“도둑질에 대한 노부의 탐욕은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끝이 없을 테니까.”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화운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 영약들 분명 내 거야. 날 위해 남겨둔 거야. 누가? 제천마존이? 억겁의 시간을 안다는 건……!’
화운이 눈을 부릅떴다.
‘그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거야!’
화운은 자신이 생각하고도 너무 놀라 무영투를 한 번 보고는 검마를 한 번 보았다.
그러다 곧 석조정자의 난간에 주저앉듯 걸터앉았다.
‘억겁의 시간…… 억겁의 시간…… 분명 들은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을까?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마치 안개 속에 감추어진 기억의 일부가 보일 듯 말 듯하는 것 같았다.
화운이 기억해 내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돌상 주변을 샅샅이 살핀 무영투가 공청석유와 인형설삼을 취하고자 양손을 동시에 뻗었다.
여차하면 두 영약들을 들고 석조정자 밖으로 신형을 날릴 준비까지 마쳤다.
그러데 무영투의 손이 두 영약이 든 옥병과 옥함을 집어 들기 직전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를 물씬 풍기는 검날이 불쑥 끼어들었다.
“으엑? 깜짝이야!”
무영투가 황급히 두 손을 거둬들였다.
“그 자리에 그냥 두는 게 좋겠군.”
검마였다.
검마가 무영투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쪽에게 어울리는 건 따로 있어.”
검마가 등을 돌렸다.
무영투는 검마가 멀어지고 있었음에도 공청석유와 인형설삼을 취하지 못했다.
“나한테 어울리는 게 뭔지 궁금해서 참는다.”
무영투는 투덜거리며 검마의 뒤를 따라갔다.
검마는 이무기의 시체로 걸어갔다.
신경이 살아 있어서인지 이무기의 동체가 아직도 꿈틀거렸다.
다시 검강을 일으킨 검마는 검으로 이무기의 아랫배를 확 그었다.
그러자 내장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쏟아졌다.
검마는 검으로 내장 여기저기를 들추었다.
그러자 어른주먹만 한 검은 구슬이 보였다.
“내단이다!”
놀라 소리친 무영투가 잽싸게 달려왔다.
무영투는 검마가 내단을 집어 들자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한테 어울리는 것이오?”
“비늘은 관심 없어.”
무심하게 내뱉은 검마가 가버렸다.
무영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개썅!”
돌아가던 검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놈의 이무기……! 뭘 처먹었기에 속이 이리 시커먼 거냐!”
무영투는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검마를 상대로 시비를 걸 순 없는 노릇이라 애꿎은 이무기의 사체만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하지만 곧 발을 감싸 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가 이리 단단해? 꼭 무쇠기둥을 찬 것 같잖아!”
무영투는 잽싸게 이무기의 비늘을 만져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쇠처럼 단단했다.
무영투는 품에서 새하얀 비수를 꺼냈다.
신월비(新月匕)라는 것으로 천하제일 대장장이라 칭해지는 신월이 만든 오대신병 중의 하나였다.
무영투는 신월비로 이무기의 비늘을 그었다.
“엇?”
무영투가 놀람을 터트렸다.
비늘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검기를 일으켜 다시 그었다.
마찬가지였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오오! 맙소사! 이거라면 최강의 병기를 수십 개는 만들 수 있겠다!’
무영투가 놀란 눈을 치뜨며 둘러보았다.
부르는 게 값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병기를 제작할 재료가 눈앞에 무수히 많았다.
무영투는 검마와 화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잽싸게 외쳤다.
“비늘은 다 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