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비동 속의 비동(2)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화운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마지막 기억이 떠올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죽는 게 젤 싫어!’
싫다고 가지 않을 순 없다.
‘공청석유! 인형설삼! 영약들이 있었어!’
보물은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인 법이다.
누구보다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 뱀대가리들을 처리하고 영약들을 손에 넣어야 한다.
화운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황의인을 피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영약들을 독차지하는 데에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시점을 계산해 보면 쥐 상의 노인보다 먼저 뱀대가리들을 만날 수가 없고, 그 뱀 대가리들을 혼자서 쓰러트릴 수가 없다.
‘답은 하나야!’
화운은 냅다 뛰었다.
쿵! 쿠웅!
돌덩이들이 떨어지고.
백나찰이 화운을 쫓았다.
화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암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이전이라면 백나찰을 떨칠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공공무영비를 펼치고 있어 오히려 간격이 벌어졌다.
“가라말!”
달려가는 화운의 외침이 광장을 크게 울렸다.
뒤를 쫓던 백나찰의 검이 화운을 갈라온 순간 질풍 같은 바람이 암로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에 백나찰이 기겁하여 멈추었고.
화운은 질풍에 사로잡혔다.
“넌 누구냐?”
검마였다.
암로 속으로 들어갔던 검마가 질풍처럼 되돌아와 화운의 목을 움켜잡은 것이다.
“전 배운검, 비응삼십이검, 사혼구검까지 익혔고, 연혼팔검은 훗날 제 검이 원혼들로 무거워질 때 배울 생각입니다.”
화운이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당연하게도 검마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그가 익혀온 검학들이 생전 처음 보는 놈의 입에서 술술 내뱉어지고 있거늘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저 암로 끝에는 거대한 수직동굴이 지하 깊숙이 뚫려 있습니다. 사방 벽을 따라 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얼음이 뒤덮여 있어 엄청 미끄럽습니다.”
“……!”
“절 그 아래 바닥까지만 데려가 주십시오. 그곳에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검마는 성에 차지 않으면 죽여 버렸지 시시콜콜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화운이 한 말은 자신에 대해 상세히 알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기를 드러냈지만 꾹 눌러 참은 검마는 화운의 목을 움켜쥔 채 광장 안의 사람들을 둘러본 후 암로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중앙을 조심하십시오.”
쑤-칵!
전방에서 중앙을 가르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검마는 슬쩍 옆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 간단히 피했다.
그리고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선우유성의 목숨을 앗아갔던 적이 있던 기관 앞에 도착하자 화운이 소리쳤다.
“양쪽 벽에서 두 개씩 네 개의 칼날이 튀어나올 겁니다! 이 기관을 부숴주십시오!”
화운의 설명이 무색하게 검마는 그냥 들어섰다.
쓰칵! 쓰칵!
칼날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검마와 화운의 몸을 갈라버리기 전에 멈추었다.
화운은 두 눈을 치떴다.
푸르스름한 강기의 막이 칼날들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검마는 기관 한복판에서 멈추더니 화운의 목을 움켜쥐지 않은 손으로 강기를 발휘하여 칼날들을 후려쳤다.
투캉! 투깡!
칼날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이걸로 유성이가 다칠 일은 없을 거야!’
화운은 그제야 안심했다.
“감사합니다. 계속 가시지요!”
검마가 다시 움직였다.
보통 걸음으로 두 발을 놀리는 것 같은데 화운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검마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얼음으로 뒤덮인 수직동굴 앞에 도착한 검마는 그 거대한 위용에도 아무런 감흥도 없는 모양인지 잠깐 내려다본 게 다였다.
검마는 나선형의 계단을 찾아 아래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바닥에 도착하자 화운을 내려놓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화운이 답답했던 목을 매만지며 숨을 돌렸다.
검마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화운은 손을 들어 제천지존릉을 가리켰다.
“제천지존릉입니다. 안에는 이중으로 된 석실이 두 개가 있는데 그 안엔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었습니다. 그래도 우린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기 보이시죠. 저 얼음기둥을 부수고요. 저 기둥을 부수면 천장이 무너질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무도 우리 뒤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섭니다.”
천장이 무너질 거라는 말에 검마가 화운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제천지존릉에 다른 출구가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운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검마는 검을 뽑지 않았다.
“제가 스스로 죽으려는 놈으로 보이십니까?”
화운이 진지한 빛으로 말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검마가 말했다.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럽니다. 저 석실 안으로 피한 다음에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검마가 움직이지 않았다.
화운은 나선형의 계단을 힐끔 돌아본 후에 말했다.
“키 작은 노인을 보셨습니까? 그 노인의 경신술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무영투.”
“예?”
“그가 무영투다.”
검마는 무영투를 한눈에 알아보았었다.
광장에서 몰려오던 사람들을 일검에 날려 버린 건 무영투에 대한 경고였다.
자신보다 앞서가지 말라는.
“그 노인네가 무영투라는…… 공공무영비! 이런 멍청한! 공공무영비를 얻어 배워놓고도 무영투일 거라는 걸 짐작도 못하다니!”
화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무영투는 도둑이다.
그것도 보통 도둑이 아니다.
도둑 세계에서는 전설로 대우받는다.
“어쩐지 감춰진 비밀통로를 잘도 찾아냈다 싶더라니…… 여튼 무영투 어르신이 오면 안 됩니다. 그 전에 석실 안에는 우리 둘만 갔으면 합니다.”
화운이 다시 한번 나선형의 계단 위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마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신을 타고 시퍼런 검강이 가공할 기세를 날름거렸다.
“전 경신술이 모자라니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얼음기둥을 부수고 바로 움직이십시오.”
화운이 제천지존릉을 향해 뛰었다.
검마는 그 모습을 힐끔 보다가 얼음기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새파란 검강이 공간을 가르고 날아가더니 얼음기둥에 작렬하였다.
콰-앙!
얼음기둥은 굉음을 터트리며 부서졌고 금세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두르십시오!”
제천지존릉을 향해 저만큼 뛰어간 화운이 소리쳤다.
그제야 돌아선 검마가 얼음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순식간에 쏘아져가며 화운을 따라잡았다.
“석문을 후려쳐서 문틈에 얼어 있는 얼음들을 떼어내야 열릴 겁니다. 먼저 가십시오!”
화운의 외침에 검마가 속도를 올렸다.
수십 장의 간격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검마는 석문을 후려치고 있었다.
화운은 공공무영보를 펼쳤다.
빙판 위를 제법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석문을 연 검마는 문 앞에 서서 화운을 지켜보았다.
“젠장, 저 앞으로 간 다음에 부숴달라고 할 걸.”
살짝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미리 출발한 데다 공공무영보를 펼쳐가며 미친 듯이 달린 덕분에 돌덩이에 깔려 죽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쿠콰콰콰콰콰앙!
무너진 천장이 석실의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흙구름이 안으로 휘몰아치자 화운과 검마는 석실 안쪽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흙구름이 가라앉았다.
시퍼런 불빛이 사위를 비춰주었다.
검마가 검강을 발휘한 것이다.
푸르스름한 빛을 받은 검마의 얼굴이 화운을 향했다.
착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의 눈빛이 서늘했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목을 잘라 버릴 기세였다.
“믿기 어려운 말일 겁니다. 끝까지 듣고 판단해 주십시오.”
화운이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였다.
토르르르-툭!
입구를 막고 있던 돌무더기에서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화운이 고개를 돌린 순간 돌무더기가 들썩거렸다.
“어, 억? 설마 낭왕이?”
이전의 기억 때문에 화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순간 들썩거리던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날아가며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가 깨졌는지 얼굴 한쪽이 피투성이였다.
“으엑?”
화운이 괴성을 질렀다.
피를 철철 흘리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쥐 상의 노인이었다.
“뭐, 뭐야? 영감이 거기서 왜 나와?”
“왜 천장을 무너트리고 지랄이야!”
쥐 상의 노인, 무영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순간 검마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확 쏟아져 화운과 무영투를 찍어 눌렀다.
“더는 못 참겠군. 둘 다 죽이고 그냥 가던 길을 갈까?”
“여기서 말하라고요?”
화운이 무영투를 힐끔하며 말했다.
“밖이라면 그를 잡지 못하지만, 이 안에서라면 내 검을 피하지 못한다.”
검마가 말했다.
화운은 내심 고민했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검마는 성격 상 그의 복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영투는 믿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면 무슨 짓을 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래, 뭐 다시 시작하면 되지. 이 망할 노인네가 쫒아오지 못하도록 더 서두르면 될 거야.’
화운은 결심했다.
다시 시작하기로.
물론 지금의 이 시점에서는 끝까지 가볼 생각이다.
그 뱀대가리들을 죽이고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전 죽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화운이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검마의 표정은 일절 변화가 없었고, 무영투의 얼굴엔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화운은 광장에서 자신이 빠졌던 바닥의 구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영투가 그곳으로 가서 자신이 겪고 있는 기사의 비밀을 알아내어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걸 가로채갈까 봐 염려가 되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그것만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야겠군.’
생각해보면 그렇다.
검마라고 거길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 능력은 어떻게 얻은 것이냐?”
검마가 물었다.
“이 황당무계한 말을 믿는 것이오?”
“제 혈족에 관한 것이라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중히 사양한 화운은 검마가 더 묻기 전에 무영투를 돌아보았다.
“못 믿겠다니, 믿게 해드려야겠군요.”
“웃기는 소리! 노부가 그리 만만한……!”
비웃으려던 무영투의 두 눈이 함지박 만하게 커졌다.
화운이 석실 안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어설펐지만 분명 공공무영보이거늘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너, 너너! 너 뭐하는 놈이냐!”
무영투가 대노하여 화운을 덮쳤다.
콰-앙!
새파란 강기가 날아가 무영투와 화운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벽을 후려쳤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 아이의 몸에 손을 댄다면 반드시 죽는다.”
“검마도 봤잖소! 방금 놈이 공공무영보를……!”
“그대가 가르쳐준 것이거늘 누굴 원망해!”
“으억?”
무영투가 이제야 알아들은 듯 입을 쩍 벌리고 화운을 돌아보았다.
“너, 너너. 정말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공공무영보를 어디서 배우고, 검마대협의 검공을 어떻게 배우겠습니까?”
“아냐, 아냐! 이럴 순 없어. 검마야 워낙 오만한 사람이라 오히려 속이기 쉬울 수 있어. 하지만 날 속일 순 없어! 너 뭐냐, 사실대로 말해라!”
무영투의 말에 순간적으로 검마의 살기가 요동쳤다.
하지만 화운을 바라보는 무영투의 얼굴이 진지함이 넘치다 못해 간절함까지 엿보여 살기를 터트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영감님이 젤 쉬웠는데요. 듣고 싶어요?”
“그럴 리가 없다! 이놈 어디서 사기를 치는 것이냐!”
“영감님, 여기 제천마존의 비동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에 대한 정보와 공공무영보의 구결 중 일부, 그것도 구결들을 전부 열이라 치면 그중 하나인 부분. 바꾸겠습니까?”
“당연히……!”
무영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뭔가를 깨달은 듯 화운을 다그치듯 물었다.
“반복해서 하나씩 알아냈단 말이냐?”
“영감님이 속일까 봐 열둘, 열다섯, 스물로도 나누어도 보았고, 영감님이 가장 좋아하는 구결, 가장 싫어하는 구결, 가장 손쉽거나 가장 어려운 부분. 여튼 수십 번을 반복한 덕분에 다 알아낼 수 있었습지요.”
화운이 히죽 웃었다.
놀랍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무영투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죽이게요? 그러십시오. 다시 살아나면 영감님한텐 절대 알려주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화운이 천연덕스레 말하자 무영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냥 제자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되지 뭘 그리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그럽니까. 괜히 민망하게시리.”
“놈! 이게 제자를 들인 것이냐? 무공을 도둑맞은 것이지!”
무영투가 부아를 터트렸다.
그런데 화운이 듣고 보니 자신이 꼭 미안해 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마주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도둑놈이신 분께서 그러면 안 되죠! 남의 것을 훔칠 땐 좋았을 거 아닙니까! 잃어버린 분들은 지금 영감님이랑 같은 기분일 텐데.”
“그건 경우가……!”
“뭐가 다릅니까! 생각해 보니까 진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네! 영감님은 훔쳐도 되고, 다른 사람은 훔치면 안 됩니까?”
무영투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화운은 그런 무영투를 뒤로 하고 검마를 향해 말했다.
“가시지요. 이제 뱀대가리들을 잡고 영약들을 취할 시간입니다. 아! 참고로 영감님은 욕심내지 마십시오.”
화운이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영약들이라는 말에 급 관심을 보이던 무영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싸가지 없는 새끼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