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비동 속의 비동(1)
“그는 이곳에 있었다.”
검마가 대답했다.
쥐 상의 노인이 어디에 있었냐는 화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안을 살펴보아야겠소.”
칠대문파의 고수들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천사련의 고수들도 들어가려고 바짝 다가왔다.
남궁검가주는 검마를 바라보았다.
“검마 선배, 그 노인은 지금 이 자리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통로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검마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칠대문파와 다른 오대세가의 고수들을 필두로 하여 천사련의 무인들까지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먼저 찾으려고 경쟁하는 건 용납하겠으나 상대를 해치려는 자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과열을 우려하여 남궁검가주가 소리쳤다.
내력까지 실어서 외친 것이라 우르르 몰려갔던 자들이 조금은 진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남궁검가주가 검마에게 물었다.
검마는 남궁검가주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남궁검가주의 태도는 정중했고 가식이 없었다.
그래서 의아했다.
강호를 주유하는 동안 자신이 검마라는 걸 알고도 선배라 칭해주는 이는 남궁검가주가 유일했다.
겉으로나마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의 숫자조차 손가락에 꼽았으며 특히 사십대의 중년 아래로는 역시 남궁검가주가 유일했다.
“남궁검가의 가풍이 훌륭한 건가, 아니면 지금의 가주가 특이한 건가?”
“……!”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던 남궁검가주는 이내 옅은 웃음을 흘리며 포권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탈하신 것 같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예를 갖추더니 한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남궁현이 달려왔고 얼떨결에 선우유성이 따라왔다.
“이 녀석은 제 아들놈인데 저 못지않게 특이한 놈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선우세가의 잠룡입니다. 둘 다 인사 올리거라.”
남궁검가주의 명에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공손히 포권했다.
“남궁현입니다. 검마 어르신을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입니다.”
“선우유성이 어르신께 인사올립니다.”
두 사람의 인사를 묵묵히 받던 검마가 툭 내뱉었다.
“마인과 가까이 해서 이로울 게 없다.”
“이로움을 따져가며 사람을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남궁현이 씩씩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선우유성도 한 마디 했다.
“진짜 마인이라면 남궁숙부님께서 인사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검마는 남궁현과 선우유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모습이 화운이 보기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손자가 생각나신 모양이군.’
화운이 안타까워 할 때 감정을 추스른 검마가 다시 말했다.
“이로움을 따지진 않더라도 마인은 멀리 하거라. 넌 어른의 말을 따르는 건 좋으나 맹목적인 건 옳지 않다.”
“명심하겠습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포권하며 감사를 표하자 고개를 끄덕인 검마가 화운을 슬쩍 바라보더니 남궁검가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안엔 모든 게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있지만, 딱 한 군데 그렇지 않은 곳이 있지.”
“……!”
“그것이 숨겨진 통로를 찾는 열쇠가 될지는 모르겠군.”
검마가 앞장을 서자 남궁검가주와 화운이 서로를 쳐다본 후 뒤를 따랐다.
남궁현과 선우유성 그리고 선우세가주와 두 가문의 무인들 역시 줄지어 뒤를 따라갔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자 앞서 들어갔던 사람들이 온 사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특히 단상과 추모문이 새겨져 있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검마 역시 석실을 가로질러 단상이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추모문 아래.”
검마의 말에 남궁검가주가 나섰다.
“추모문이 새겨진 벽의 하단부를 살펴보시오!”
“글을 지운 건지 벽을 긁은 것 같은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소!”
이십여 명이 달라붙어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내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땐 그런 흔적이 없었는데, 좀 전에 눈을 뜨고 둘러보니 그 흔적이 생겼더군.”
검마가 한 말이다.
그에 남궁검가주가 소리쳤다.
“한번 밀어보시오!”
“꿈쩍도 하지 않소!”
“비켜라!”
검마와 남궁검가주의 등장에 슬그머니 다가와 있던 천사련의 고수들 중 하나가 소리치며 나섰다.
벽을 살피던 사람들이 비켜서자 그가 냅다 걷어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걷어찬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머리 위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르르르륵!
사람들의 고개가 소리 나는 곳으로 쏠렸다.
추모문이 새겨져 있는 벽 위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벽의 일부가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이다.
“내가 먼저 가겠다!”
천사련의 고수들 중의 하나가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다른 천사련의 고수들도 앞다퉈 뛰어들었고.
“천사련에 빼앗길 수 없소!”
정파의 고수들도 날렵하게 신형을 날려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남궁검가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선우세가주를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이곳을 지킬 인원을 배치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겠지?”
“같은 생각이네. 어차피 출구가 막혔으니 앞으로 가볼 수밖에.”
“자네가 뒤를 맡아주겠나?”
“그러지.”
남궁검가주는 검마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시지요. 제가 큰 도움이야 되겠습니까만, 선배를 귀찮게 할 일 쯤은 사전에 차단해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그럼에도 함께 가기로 한 건 화운 때문이다.
화운이 한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직 혼란스러워서다.
“그럼 출발하지요.”
남궁검가주가 먼저 뛰어올랐고, 뒤를 이어 검마가 신형을 날렸다.
화운 역시 벽을 한 번 박차는 것으로 단번에 올라갔다.
공공무영비를 수련한 덕분에 날렵하기 짝이 없었다.
“형이 언제 저렇게 늘었지?”
뒤에서 지켜보던 선우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통로는 어두웠다.
간신히 한 사람이 움직일 크기였다.
몇 개의 야광석에 의지하여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보니 점점 밝아졌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는 모양이라며 기꺼워했다.
한 식경 정도 이동하다 보니 야광석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다시 일다경을 더 나아가니 육안으로 서로의 얼굴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다경이 더 지나자 통로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시원하게 펼쳐진 바깥의 풍광이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암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널찍한 광장이었다.
하지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허공을 쳐다보니 까마득하게 뚫려있는 위쪽 구멍을 통해 한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와 바닥을 내리 꽂히듯 비추고 있었다.
빛이 닿는 곳엔 놀랍게도 작은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었는데, 나무가 아닌 돌로 지어진 것이었다.
“저기 뭔가가 있다!”
석조정자를 발견한 사람들이 앞다퉈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공청석유를 내놔라!”
“어림없다!”
“그건 인형설삼이잖느냐! 썩 내놓지 못할까!”
“누가 내놓을까 보냐! 죽어라!”
정자 안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고함을 쳐대며 쫓고 쫓기는가 하면 서로 칼부림을 하는 등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함들을 들어보면 정자 안에 영약들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공청석유라고? 인형설삼? 여기가 진짜 비고라는 거잖아!’
공청석유(空淸石乳)!
동질의 영기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법.
대지의 영기가 억겁의 시간동안 서로 응집하다 보면 우윳빛 액체로 방울지게 되는데 이를 공청석유라 한다.
공청석유는 한 방울만 먹어도 죽은 혼백을 다시 불러오고 썩어가는 육신에도 새살을 돋게 만들 정도로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인형설삼(人形雪蔘)!
수십 년 자란 삼(蔘)의 뿌리는 대개 사람(人)의 형상을 한다. 그리고 그 효험은 약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인형설삼은 삼 중의 삼으로 까마득한 과거 천하제일의원으로 명망 높았던 화타가 설산을 넘어가던 중 살아 움직이는 영물을 잡아놓고 보니 동자의 모습을 한 설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자삼, 동자설삼이라고도 불리는데, 화타는 당시에 잡은 인형설삼을 복용하여 수백 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 마디로 영약 중의 영약이 그것도 두 가지나 있으니 어찌 난리가 나지 않을까.
‘으흐흐! 아무리 날뛰어봐라. 그게 다 누구 게 되나!’
놀라던 화운이 득의만만한 기색을 내비친 순간이었다.
“으악! 이게 뭐야!”
공청석유를 가지고 반대편의 시커먼 동부 안으로 도망쳤던 이가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그의 경악성이 어찌나 컸던지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였다.
화운 역시 그쪽을 바라봤다.
시커먼 동부가 보였다.
그리고 동부 입구를 채색한 것처럼 보이는 시커먼 어둠을 헤치고 거대한 뭔가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고수라는 사람들이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서며 허공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거대한 머리통 세 개가 허공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마, 맙소사!”
“괴물……이다!”
정말 괴물이었다.
머리 셋 달린 거대한 뱀이 괴물이 아니면 뭐겠는가.
그것도 머리마다 뿔이 달려있거늘!
“용…… 삼두룡……!”
“아냐! 저건 대망이야! 이무기라고!”
“머리 셋 달린 이무기도 있어?”
“그럼 머리 셋 달린 놈이 용이겠어?”
남궁검가의 무인들이 놀란 눈을 치뜨며 떠들었다.
괴물 같은 놈이 거대한 몸집을 동혈 밖으로 절반쯤 드러냈다.
몸통이 얼마나 굵은지 거대한 황소 대여섯 마리도 넉넉히 들어갈 것 같았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고수들이 슬쩍 슬쩍 서로를 경계하며 어찌 할지 고민할 때였다.
세 개의 머리 중의 하나가 아래쪽으로 쓱 내려오더니 입을 쩍 벌리며 뭔가를 토했다.
툭!
묵직하게 떨어져 땅바닥을 구르는 것의 정체는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으헉?”
“뭐, 뭐야!”
“사람이닷!”
“저, 저 노인이에요!”
화운이 놀라 부르짖었다.
틀림없이 쥐 상의 노인이었다.
얼굴 살이 상당부분 녹아내렸으나 특유의 쥐 상을 한 얼굴은 아직 그대로였다.
“……으헥?”
사람들은 놀라 기절할 뻔했다.
경악스럽게도 쥐 상의 노인이 눈을 뜬 것이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보고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삶에 대한 미련도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마저 끝나 버린 처연한 미소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이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전신의 터럭이 곤두설 정도였다.
쉬이이잇! 쉬이잇!
뱀 대가리들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아마도 꺼지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수라 자부하던 이들이 머리 셋 달린 뱀이 무서워 도망칠 리 만무했다.
“쳐랏!”
누군가의 고함과 동시에 천사련의 고수들이 신형을 날렸다.
쉬-웅!
도끼가 날아가고.
번쩍!
도강이 작렬하고.
콰웅!
권강이 쏘아졌다.
꿈틀거리는 괴물의 몸뚱이는 너무 컸고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쾅쾅쾅!
굉음이 잇달아 터졌다.
그러나 괴물의 성질만 건드려 놓았다.
단단해 보이는 비늘들이 터져나갔으니 성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강기를 발휘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 미미했다.
“모두 함께 달려드시오!”
화산파의 고수가 검을 뽑아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에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키에에엑! 키엑! 키에에에에엑!
머리 세 개가 괴성을 지르며 녹색의 독액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드러낸 몸통을 이리저리 용틀임하며 꼬리로 사방 벽을 후려치자 천장과 벽에서 돌덩이들이 쏟아졌다.
그 탓에 들어왔던 통로로 도망치려던 남궁검가와 선우세가의 무인들은 쏟아지는 돌덩이들을 피해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화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악!”
“독이닷!”
“크악!”
독액을 뒤집어 쓴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금세 얼굴 살이 녹아내렸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쏟아지는 돌덩이에 깔리는 자들도 속출했고, 꼬리에 맞아 쪼개진 장작처럼 날아간 이들도 있었다.
“감히 미물 따위가!”
화산의 고수가 고함을 터트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일검을 그었다.
번-쩍!
가장 우측에 달린 뱀 대가리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목 부분이 가장 약한 급소였는지 단박에 잘렸다.
하지만 그것이 더 큰 화를 불렀다.
목이 잘리면서 그 안에 있던 독주머니를 잘라놓아 독액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가장 먼저 화산의 고수가 흠뻑 뒤집어썼다.
허공에서 미처 신형을 날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 피할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그 아래쪽 가까운 곳에 있던 화운 등이 날벼락을 맞았다.
이때 화운은 선우유성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자신이 이곳으로 가장 먼저 도착할 방법을 강구하느라 여념이 없어 미처 피하지를 못했다.
“니미랄 화산!”
화운은 녹아내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악을 질러댔다.
바로 이때 쩍 벌린 아가리 하나가 화운을 덥석 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