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선우세가와 함께!(1)
이번엔 검마와 만나지 않았다.
공공무영비를 얻어낸 쥐 상의 노인과도 함께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선우세가와 함께 간다.
그러니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달라질 것 같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방법을 찾아보자.
가장 좋은 방법은 내려가지 않는 것이지만 막을 방법이 없으니 일단 가고 보는 거다.
‘내려가 봐야 제천마존의 유물이라곤 티끌 하나도 없다고 하면 믿을까?’
믿게 하려면 내려가 보았다는 걸 납득시켜야 하는데 시간상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설사 어찌어찌 납득시킨다 하더라도 내려가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는 정파의 선발대이니까.
선발대가 뭔가?
앞장서서 가보는 것이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그러니 막을 방법도 명분도 이유도 없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본대는 비동 입구에 진을 치고 있다.
보물에 눈이 멀어 대거 몰려 들어갔다가 비동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천하의 판도가 뒤집힐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선발대를 먼저 보낸 것이다.
선발대 내에 칠대문파와 다른 오대세가의 주요 인물들 한두 명 씩 포함시켜서.
“여기가 제가 지나간 마지막 기관입니다.”
화운은 자신의 검을 뽑아 커다란 바윗덩이를 발동시키는 석판 앞에 놓고 검집은 건너편에다 두었다.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화운의 뒤를 이어 차례로 건넜고 이어서 한 명씩 차례로 건넜다.
마지막으로 건너온 남궁검가주가 화운의 검을 건네주며 물었다.
“이걸 밟으면 어떻게 되지?”
“모릅니다. 앞서간 분들이 말하길 이걸 밟으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이니 절대 밟지 말라고 했습니다.”
화운은 남궁검가주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밟으면 집채만 한 돌덩이가 굴러온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어찌 살아남았냐는 물음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설마 밟아 보는 건 아니겠지?’
기관을 해체한답시고 그랬다간 다 죽는다.
혹시라도 그럴 기미가 보이면 막고 봐야 한다.
화운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때 남궁검가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머리가 꽤 영특하군.”
“예?”
“지금까지 지나온 기관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잖습니까. 어떻게든 기억해야죠.”
화운은 대충 얼버무린 다음 앞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기관을 해체한답시고 밟으려고 하지는 않고 화운의 뒤를 따랐다.
화운은 안도하며 관심을 전방을 돌렸다.
“전방에 가다보면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울 겁니다. 절대 미끄러지지 마십시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질 테니까요.”
“그래? 좀 전부터 공기가 다소 차가워진 것 같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바닥이 얼 정도란 말이냐?”
“예. 가주님처럼 무공이 뛰어난 분들은 상관없습니다만, 저 같이 무공이 부족한 사람들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화운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시간을 가늠하며 갸웃했다.
선우세가와 합류한 후로 지금까지 오는 동안 최대한 시간을 끌며 왔으니 지금쯤이면 검마와 낭왕이 맞닥트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무너지지 않는 거지? 설마 내가 가지 않았다고 상황이 달라진 건가?’
화운의 의구심이 점점 심각해져갈 때였다.
“너무 천천히 가는 것 아니냐?”
“무슨 기관이 있는지 모르는데 조심해야지요.”
“좀 전에 네가 마지막으로 지나갔던 기관이라고 했었지 않느냐?”
“아, 그건……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기관이 또 있을 수 있잖습니까.”
“허면 내가 앞장을 서마.”
결국 남궁검가주가 앞으로 나섰다.
화운은 남궁검가주가 자신을 의심하나 싶어 괜히 경계심이 들었으나 그래 봐야 의심은 의심으로 끝날 뿐이었다.
남궁검가주가 선두로 나선 잠시 후부터는 화운의 말대로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웠으나 수직동굴이 보이는 통로의 끝까지 가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어허허! 놀랍군!”
수직동굴을 내려다본 남궁검가주의 반응이었다.
“앞서 간 천사련의 무리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내려가는 길이 있는 모양이네.”
선우세가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는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경외심을 좀 갖게.”
“천하에 그 어떤 위대한 것도 내겐 절대검공보다 못하네.”
남궁검가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선우세가주가 신념에 찬 얼굴로 대꾸했다.
남궁검가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검공이라는 게 있겠나? 천하제일을 다툴 검공이야 여럿 있겠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하여 없는 것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네.”
“하아! 어렸을 적부터 하던 논쟁이 이 나이 들어서까지 하게 될 줄이야.”
논쟁을 시작하는 것조차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린 남궁검가주가 화운을 향해 물었다.
“그래, 이 아래는 가보지 못했다는 거냐?”
“예.”
“왜지?”
“저쪽에 길이 있습니다. 가보시면 압니다.”
남궁검가주는 화운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그러는 사이에 화운은 의혹 가득한 얼굴로 수직동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왜 무너지지 않은 거지? 안 싸운 거야? 왜? 대체 왜?’
화운의 의문이 커지는 사이에 남궁검가주가 돌아왔다.
그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나선형의 계단을 확인하고 왔다.
“확실히 위험해 보이긴 하더군.”
남궁검가주의 말투엔 그럼에도 내려가지 않은 게 납득이 안 된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먼저 내려간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길이 끊겼다고요.”
“길이 끊겼다고?”
“예.”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
“비명 소리로 짐작하건데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떨어졌다면…… 죽었겠군.”
“아마도요.”
“그래서 포기한 거고.”
“그들은 저보다 경신술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야 그들을 열심히 따라다니다 보니 운 좋게 왔습니다만, 저런 빙판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남궁검가주는 화운의 속을 꿰뚫어보겠다는 듯 빤히 응시하였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우린 아래로 내려가 볼 생각인데, 여기서 기다릴 것이냐?”
“아뇨. 유성이가 간다면 저도 갑니다.”
“경신술이 떨어진다며?”
“오면서 내내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화운은 자신의 검을 뽑았다.
“이 검을 두 뼘 크기로 동강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걸로 어떻게 하겠다고?”
“손에 쥐고 빙벽을 찍어서라도 내려갈 겁니다.”
“용기는 가상타만 손이 먼저 잘릴 거야.”
“옷으로 감으면 됩니다.”
여기까지가 화운이 고민하고 생각해 둔 것들이었다.
저 아래로 내려간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는 아직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흐음…….”
남궁검가주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넌 여기서 돌아가라.”
이때까지 화운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선우세가주가 끼어들어 말했다.
화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에 선우세가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때 남궁검가주가 얼른 입을 열었다.
“벽호공이라는 게 있다. 아느냐?”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벽호공은 경신술의 일종이다.
도마뱀이 벽을 오르내리는 모습으로 보고 만들어진 무공으로 익히기가 난해하다거나 내력소모가 많은 것이 아니어서 강호활동이 많은 무문에서는 기초무공으로 가르치곤 한다.
“벽호공은 벽을 타는 공부다. 본가와 선우세가에서는 다들 익히고 있는 것이다. 한식경만 배워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것이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금방 익힐 수 있을 터인데, 들어본 적도 없다면 아예 모르겠구나.”
“예.”
“흐음.”
고민이 된다는 듯 빤히 바라보던 남궁검가주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받거라.”
화운이 받고 보니 두 자루의 비수였다.
“여기까지 무사하도록 안내해 준 감사의 표시다. 하지만 그걸로 안전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말거라. 경신공부가 부족하다면 많이 위험할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하마.”
씩 웃은 남궁검가주는 슬쩍 선우세가주의 눈치를 보며 한 발 물러났다.
“가주로서 명한다. 여기서 돌아가라.”
선우세가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화운은 그제야 그를 향해 마주서며 말했다.
“전 화씨 가문의 핏줄로서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화운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선우세가주가 호통을 치기도 전에 선우유성을 향해 돌아섰다.
“저 아래서 보자. 조심 또 조심해라.”
“형…….”
선우유성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화운은 걱정 말라며 씩 웃어준 후 나선형의 계단으로 갔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손에 비수를 나누어 쥐고는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것인데다 높이가 아찔할 정도로 높았다.
“젠장할……!”
결국 반의 반도 내려가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기에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었다.
화운은 일곱 번을 떨어져 죽고서야 비수를 이용해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에 익숙해졌고, 다섯 번을 더 죽고서야 수직동굴의 바닥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래에 도착해 보니 의외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이미 얻어터진 후잖아!’
낭왕을 비롯한 천사련 고수들의 행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핏물을 내비치는 꼴이 딱 봐도 호되게 당한 모습이었다.
검을 늘어트리고 있던 검마는 검을 집어넣으며 나선형의 계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대론 못 보낸다!”
남궁검가주를 비롯한 정파의 인물들을 힐끔 쳐다본 낭왕이 버럭 소리쳤다.
검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썅! 가려거든 머리통은 두고 가라!”
구환도로 빙판 바닥을 그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낭왕.
화운이 계단 위에서 볼 때만 해도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물불 안 가리고 끝장을 볼 기세였다.
‘뭐야? 저 늙은이, 정파 앞에서 수치를 당하기 싫다는 거잖아!’
화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천천히 다가가던 낭왕이 구환도를 끌어당기며 빙판을 빠르게 미끄러지다 허공으로 솟구쳤다.
“내가 낭왕이다! 죽어라!”
부가아악!
낭왕의 구환도가 허공을 둘로 쪼개며 덮쳐오자 검마가 검을 뽑으며 빙글 돌았다.
번-쩍!
새파란 섬광이 폭발하였다.
콰앙!
굉음과 함께 낭왕이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거대한 얼음기둥에 부딪쳤다.
“크윽! 개 같은……!”
구환도로 빙판 바닥을 짚고 벌떡 일어선 낭왕.
그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뭐야, 똑같잖아!”
화운이 놀라 부르짖었다.
분명 한차례 싸움이 벌어지고 난 후인데도 낭왕이 얼음기둥에 부딪치고 발작하듯 날뛰려는 광경이 이제야 벌어지고 있었다.
“크크크크큭!”
낭왕이 괴소를 흘리는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화운은 유성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뛰어!”
“예?”
“죽기 싫으면 뛰라고!”
화운이 다급히 외치며 뛰자 유성이 얼떨결에 뛰었고, 순간 남궁검가주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는 소리쳤다.
“모두들 운이 뒤를 따라라! 현아! 뛰어라!”
남궁검가의 무인들이 화운의 뒤를 따라 뛰었고, 바로 이때.
“썅! 다 죽는 거다!”
낭왕이 발작적으로 구환도를 휘둘렀다.
쿠앙!
쩌저저저저저저! 쩌저저저적!
얼음기둥 위쪽으로 금이 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수직동굴 한복판을 받치듯 천장까지 닿아 있던 거대한 얼음기둥이 기울어졌다.
끄그그그그그극!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던 얼음기둥의 밑동이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굉음을 터트리며 터져 버렸다.
기울어지던 얼음기둥은 벽에 부딪쳐 커다란 크기의 수 조각으로 부서지며 아래로 쏟아졌다.
“크하하하! 검마! 함께 죽자!”
낭왕이 검마를 향해 성큼 성큼 다가갔다.
“하! 낭왕 개새꺄! 뒤지려면 혼자 뒤지던가!”
화운이 빠르게 달렸다.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경쾌했다.
함께 달리던 선우유성이 놀랄 정도였다.
‘어? 형이 이렇게 빨랐어?’
선우유성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화운은 지금 공공무영보를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삼 단공 수준이었다.
공공무영비를 알지 못했을 때와 비교한다면 세 살 박이 아이와 열 살 아이 정도의 차이가 났다.
“곧장 뛰어!”
허공을 쳐다본 화운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