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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2화 (12/207)

#012. 이년아, 난 놀랄 틈도 없었다!

“전 성인군자는 못 됩니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잊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검을 가르쳐 주신다면 제게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겁니다.”

“…….”

누가 봐도 불평등한 거래다.

화운만 이득이 크다.

하지만 검마의 입장을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검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늘이 내린 수명이 끝나가고 있었다.

칠십을 훌쩍 넘어 팔십을 바라보고 있으니 많이 남아야 삼 년이다.

후계를 키우기엔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검공을 사장시킬 수도 없다.

물론 전신의 내력을 총동원한다면 수명보다 일, 이 년은 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심유하기 짝이 없는 검공을 온전히 가르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전할 수도 없으니.

거칠 것 없던 검마답지 않게 침묵이 길어졌다.

화운은 검마의 고민을 이해했다.

이 거래는 단순히 실익을 계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무공을 전수한다는 건 그의 이름과 자존심 그리고 선대의 가르침까지 고스란히 이어준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검마에겐 시간이 없고, 자신에겐 그 시간이 넘치다 못해 남아돌 정도니까.

화운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오랫동안 침묵하던 검마가 화운의 여유 있는 모습에 돌연 눈빛을 달리하며 물었다.

“몇 번째냐?”

“여섯 번째입니다.”

“내가 검을 가르쳐 주었느냐?”

“배운검(徘雲劍)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배운검은 검마의 입문검공이었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전 성인군자는 못 됩니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잊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검을 가르쳐주신다면 제게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겁니다.”

“…….”

오랫동안 침묵하던 검마가 눈빛을 바꾸며 물었다.

“몇 번째냐?”

“열두 번째입니다.”

“어디까지 배웠더냐?”

“배운검 열두 초식을 익혔고, 비응삼십이검(飛鷹三十二劍) 여섯 번째 초식을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몇 번째냐?”

“서른세 번째입니다.”

“어디까지 배웠더냐?”

“배운검, 비응삼십이검까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사혼구검(死魂九劍) 차례로군.”

“몇 번째냐?”

“아흔아홉 번째입니다.”

“어디까지 배웠더냐?”

“배운검, 비응삼십이검, 사혼구검(死魂九劍)까지 익혔습니다.”

“남은 건 연혼팔검(鍊魂八劍)뿐이다. 허나 그건 가르쳐 줄 수 없다.”

“이해합니다.”

“아까워서 가르쳐 주지 않는 거라 여기느냐?”

“지금껏 가르쳐 주신 것만 해도 분수에 넘칩니다.”

“내 앞에선 혓바닥 함부로 놀리지 마라.”

“가벼워 보인다는 걸 압니다만, 진심이 그러합니다.”

화운은 거리낄 게 없어 검마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연혼팔검은 살검이다. 손에 피를 묻혀야만 익힐 수 있다.”

“알겠습니다.”

“무인의 길은 곧 살행이다. 훗날 네놈의 검이 원혼들로 무거워질 때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찾아오너라.”

“감사합니다.”

“사혼구검까지 익혔다고 하니 지금부턴 검공과 검초를 근본부터 되짚어 보겠다.”

화운과 검마가 함께 한 시간은 한 달이 조금 못된다.

제천지존릉에 갇힌 화운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버틴 시간이다.

남궁검가주는 검마가 화운에게 검을 가르치자 안쪽 석실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주었다.

화운은 이백 하고도 스물세 번을 더 갇혔다.

그러니 그 시간을 다 합친다면 무인이 일생 동안 수련할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검공에 매진한 터라 성취가 대단했다.

하지만 한 가지 모자란 게 있었다.

바로 공력이었다.

화운의 육체가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성장해 버려 혈도들은 막히고, 단전은 기틀조차 갖추지 못하고 퇴보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검마가 혼원신공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지지부진한 이유였다.

“몇 번째냐?”

“이백하고 스물네 번째입니다.”

“어디까지 배웠더냐?”

“지난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연혼팔검은 가르쳐 줄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훗날 제 검이 원혼들로 무거워질 때 이 순간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화운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의 본산이 소림이라면 검학의 본산은 무당이랄 수 있다. 너의 시간을 이용하여 그들의 무학을 접할 수 있다면 익혀두도록 해라. 화산의 검까지 엿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보다 이젠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

“대협의 사연 말입니다. 알아야 약조를 지킬 수 있습니다.”

화운은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경청하겠다는 뜻이다.

검마는 그런 화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화운은 다시 시작했다.

쉬악!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피하자마자 백나찰의 검이 날아왔다.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동안은 빨리 검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에 그냥 지나쳤다만 이젠 아니다!’

백나찰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데다 더 이상 검마를 찾아갈 필요가 없게 된 화운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꾹 눌러 참았던 가슴속의 분노를 터트릴 때였다.

채채챙! 체재재재쟁!

화운이 백나찰의 공세를 막았다.

사혼격, 사혼망, 사혼폭으로 이어지는 사혼구검의 전반부를 쉴 새 없이 펼치자 백나찰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년아, 난 놀랄 틈도 없었다!’

화운은 백나찰의 천추정한검을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사혼구검을 상당한 경지로 익혔다.

백나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이유였다.

스-악!

파상적으로 펼쳐지던 사혼구검의 공세 속에 느닷없는 벼락 한 줄기가 폭발하였다.

사혼섬!

빛살의 빠름을 추구한 사혼구검의 검초.

한 줄기 핏물이 튀었다.

당황한 백나찰의 얼굴이 튀어 올랐다.

빙글빙글 돌다가 툭 떨어졌다.

“한 번!”

냉랭히 말한 화운이 빙글 돌아섰다.

저쪽에 다가오던 것을 멈추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육살도!

화운이 도살자라 부르던 바로 그다.

‘너도 내 머리통 참 많이 땄어. 그치?’

화운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가가는 중에 검을 들었다가 허공에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니 도살자가 움찔하여 뒷걸음 했다.

“겁먹지 마. 그렇게 아프진 않아.”

히죽 웃은 화운이 갑자기 빠르게 달렸다.

“으헉?”

깜짝 놀라 허둥대는 도살자.

질풍처럼 달려든 화운의 검이 순식간에 팔을 자르고 머리통을 잘라 버렸다.

화운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도살자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도살자의 얼굴이 화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꼬나봐! 니들이 누군가를 죽일 땐 니들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화운은 저쪽에 죽어 있는 백나찰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핏물 속에 잠겨 있었다.

“흥! 아직 멀었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수십 번, 수백 번을 죽여줄…… 테니까!”

화운은 눈을 크게 떴다.

수백 번을 죽여주겠다고 말하다 보니 불현듯 떠오른 바가 있어서다.

-연혼팔검은 살검이다. 손에 피를 묻혀야만 익힐 수 있다.

-무인의 길은 곧 살행이다. 훗날 네놈의 검이 원혼들로 무거워질 때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찾아오너라.

“어, 어어!”

화운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검마가 남긴 경고 때문에 암로 속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략 오십이 살짝 넘어가는 숫자다.

그들은 뒤쪽에서 화운과 백나찰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고 일부는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제천마존의 비급에만 온 정신을 팔린 사람들이라 모르는 이들이 싸우든 죽든 관심이 없었다.

화운은 암로 앞에서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사람들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미친놈처럼 히죽 웃었다.

“살검…… 크크큭! 오십이 오백이 되고, 오백이 오천이 되는 법! 수천, 수만을 베다 보면 언젠간 살검이 되겠지!”

아닌 척했지만 검마의 연혼팔검이 탐이 났다.

연혼팔검을 익히고 공력을 좀 더 쌓는다면 검마만큼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으후훗!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순 없지!”

화운은 암로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은 화운에겐 관심도 없어 돌아보는 이조차 없었다.

그래서 화운이 외쳤다.

“내가 화운이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뚝! 뚝! 뚝!

검신을 타고 핏물이 떨어졌다.

“후욱! 후욱!”

숨이 거칠었다.

찰박찰박!

걸을 때마다 핏물이 밟혔다.

이제 남은 건 한 명뿐이다.

쥐 상의 노인, 바로 그다.

화운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늘어트린 채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으흐흐! 이리 오십시오! 썩 목을 내미십시오!”

화운이 음산하게 말했다.

“미친놈! 살검에 먹혀 버렸구나!”

“살검! 맞습니다! 살검을 익힐 겁니다!”

화운이 와락 달려들었다.

쓰-악!

허공을 가르는 검.

어찌나 빠르게 긋는지 검신에 묻어 있던 핏물이 마치 허물처럼 벗겨졌다.

쩌-엉!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

화운의 검이 막혔다.

노인의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쇠로 만들어진 철곤이 들려있었다.

‘어랏! 숨겨둔 절학이 또 있었어?’

화운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순간 철곤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뚜다다다당! 따다당!

순식간에 십여 번을 부딪쳤다.

화운은 부딪칠 때마다 손아귀가 욱신거렸다.

‘내력에서 밀리는군.’

아쉬웠다.

하지만 괜찮다.

노인이 철곤을 휘두르는 곤술은 공공무영비만큼이나 대단한 무공이다. 그럼에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역시 검마다.

성명절학인 연혼팔검이 아님에도 이토록 대단하다니!

잠깐 탐이 났던 노인의 곤술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쓰악!

화운은 더욱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어떻게든 노인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듯이 살심을 품었다.

하지만 세상엔 역부족인 경우가 있다.

딱!

손목을 맞았다.

‘이런!’

당황한 순간 손에서 검이 떨어지고.

빠각!

머리통이 깨졌다.

***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나찰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화운을 향해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 뒤에 숨어서 여기까지 온 자야. 멀쩡한 얼굴로 남을 이용한 자들은 백해무익하니 죽여야 한다고 했어!’

저런 사내들은 특히 여인을 이용하고는 가차 없이 차버린다고 했다.

보이는 족족 죽여야 하는 이유라고 가르쳐 주었다.

목을 베야 하는 이유다.

“……!”

백나찰은 걸음을 멈출 정도로 깜짝 놀랐다.

화운이 날아오는 황의인을 눈으로 보지도 않고 검을 뽑아 머리통만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간결한 동작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지?”

저런 무위를 가지고도 왜?

백나찰의 의문은 오래 가지 못했다.

화운의 검이 그녀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언니 말이 맞았어! 이유 없이 날 죽이려고 하잖아!’

백나찰은 살기를 일으키며 화운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녀의 천추정한검은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스-악!

백나찰이 보는 세상이 빙글 돌았다.

“일곱 번!”

화운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뚜다다다당! 따다당!

순식간에 십여 번을 부딪쳤다.

화운은 부딪칠 때마다 손아귀가 욱신거렸지만, 꾹 참고 검을 휘둘렀다.

갈수록 노인의 철곤이 빨라지고 강맹해졌다.

그러나 상대하는 화운 역시 그만큼 단단해졌다.

일곱 번을 죽을 때까지 십여 합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다.

반복은 곧 익숙해짐을 의미 하는 법.

게다가 노인을 다시 상대하는 간격이 무척 짧아서 노인과의 싸움을 주구장창 이어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운은 백나찰을 상대할 때처럼 노인이 펼치는 곤술에 익숙해졌다.

노인이 펼치는 필살의 초식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막거나 피해 버렸다.

그에 노인은 초식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강기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우웅!

철곤이 울었다.

묵빛의 광채를 머금은 채.

그 모습을 보며 화운이 히죽 웃었다.

“영감, 그거 알아? 일백하고 서른두 번째 보는 곤강이라는 걸!”

“미친놈!”

노인이 강기를 일으킨 철곤을 휘둘렀다.

하지만 화운은 물러나지 않고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쭉 뻗은 검이 쥐어져 있었다.

쉬-악!

화운의 검이 예기치 못한 궤적을 그리며 노인의 손목을 찔렀다.

노인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강기라고 상대 못할 건 없더라고! 쓰러트려야 할 건 강기가 아니라 사람 몸뚱이니까!”

화운이 히죽 웃으며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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