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검학이라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1)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화운이 신형을 날렸다.
화운이 사라진 공간을 지나쳐간 황의인이 저만큼에서 나뒹굴었다.
쿠웅! 쿵!
돌덩이들이 떨어지고.
채앵!
화운의 검이 백나찰의 협봉검과 부딪쳤다.
백나찰의 협봉검은 사나웠다.
화운은 백나찰에게서 알아낸 천추정한검의 구결을 떠올리며 그녀의 검초를 유심히 살폈다.
‘대각을 건넌다는 게 저거구나!’
백나찰의 천추정한검이 화운의 눈에 낱낱이 분석되었다.
백나찰이 알았다면 미친년처럼 발작하여 화운을 죽이려들 일이었다.
하지만 백나찰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화운이 자신의 검로를 모두 꿰뚫어 볼 정도로 대단한 고수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채채채채챙!
두 사람의 검이 숨 가쁘게 부딪치는 중에 화운은 희열 가득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검학이라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이런 것이었어!”
천추정한검의 구결을 알아낸 후로 골백번을 싸웠다.
백나찰의 검식은 눈을 감고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흉내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젠 다음 상대를 찾아갈 차례였다.
“지금은 서로 시간이 없으니 추후에 그대 가문과 스승님의 비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사? 넌 대체 누구이기에……?”
“화운! 그게 내 이름입니다.”
화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그러다 잠깐 멈추며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백나찰이 된 것입니까? 손속이 너무 매정하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
“아, 미안합니다. 스승님께서 아신다면 가슴을 치실 것 같아…… 주제넘게 나서서 미안합니다.”
“날 도와준 언니가 그랬어. 사내들은 만만히 보이는 여인을 가만 두지 않는다고. 특히 멀쩡한 얼굴로 남을 이용하는 사내는 여인들의 적이니 보이면 먼저 죽여 버리라고 했어.”
백나찰이 싸늘한 얼굴에 진진한 빛을 덧씌워 말했다.
화운은 눈을 크게 떴다.
‘뭔 개소리야!’
***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화운은 납작 엎드려 날아오는 황의인을 피한다음 좌측으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다.
떨어진 돌덩이 너머에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백나찰이 보였다.
화운은 부리나케 신형을 돌리며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쓰-악!
뒤에서 화운의 머리통을 노리던 도살자가 깜짝 놀라 우뚝 멈췄다.
‘이제 너다. 너도 내 머리통을 부쉈었지?’
화운은 도살자를 보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진중한 태도를 취했다.
“백나찰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화운이 먼저 말을 걸었다.
도살자를 벗겨 먹기 위한 사기의 시작이었다.
육살도!
그것이 도살자의 별호다.
백나찰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뒤통수가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지금 도살자가 손에 쥐고 있는 큼직한 육도와 딱 들어맞을 크기였다.
도살자가 백나찰을 죽인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뒤에서.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알아보니 도살자가 백나찰을 노린 것은 복수다.
백나찰이 그의 친구를 죽였다고 한다.
그래, 이해한다.
친구를 죽였으니 마땅히 찾아내 복수를 해야지.
백나찰이 노리는 나를 죽여서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한 것도 이해한다.
그 정도 흉심은 있어야 사파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좋다. 충분히 이해한다.
근데 왜 건질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이냐.
그가 익힌 칼은 광살도라는 도법이다.
미친놈처럼 칼부림하는 도법인데 검을 익힌 나와는 전혀 맞지가 않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였으니 상승의 절예라면 무언가 깨달음의 단초라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를 상대로 백나찰에게서 얻은 천추정한검을 맘껏 펼쳐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제 다음 먹잇감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
이제 나도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가 되었다.
물론 무공이 강한 맹수가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특권을 가진 사기의 맹수다.
저 영감!
작은 키에 쥐 상의 얼굴을 가진 노인.
분명히 기억난다.
암로 앞에서 멈칫거리는 나의 멱살을 잡아채 도살자에게로 던져 버렸던 저 노인의 우악스런 손길을.
틈만 나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자기만 살겠다고 떨어지는 날 도약대 삼아 짓밟았다.
날 던지고 짓밟았으니 무공 한 자락쯤은 내놓아야겠지?
우후후훗! 거기 있으십시오, 내가 갈 테니까!
***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폭풍 같은 기파가 터지고 앞서가던 황의인이 날아왔다.
“머저리! 꺼져라!”
황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나 꺼져!”
화운은 상체를 눕힘과 동시에 오른발을 들어 강하게 걷어찼다.
황의인이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다시 시작해 볼까!”
화운은 신형을 날렸다.
쿵! 쿠웅!
천장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연이어 떨어졌다.
전방으로 튀어나간 화운은 빙글 돌아섬과 동시에 검을 뽑아 쭉 뻗었다.
그의 검끝이 백나찰의 미간을 일직선으로 가리켰다.
내공이라고는 한줌도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들고 선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웠다.
백나찰의 천추정한검을 수련하면서 검학의 이치를 체득한 덕분에 갖추게 된 화운 나름의 기도였다.
화운을 쫓아오던 백나찰은 자신의 미간이 찔린 것처럼 깜짝 놀라 멈추고 말았다.
“서로 돕고 사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야. 약자가 강자의 그늘에 숨는다고 죽을 이유가 될 순 없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 화운은 검끝을 돌려 도살자를 가리켰다.
“그대의 친구를 죽인 백나찰은 이 여인이 아니야.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말고 둘이 잘 이야기해 봐.”
화운의 말에 도살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저 둘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못할 것이다.
화운은 당황하는 백나찰과 도살자를 두고 암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마가 앞서 들어간 암로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검마의 경고 때문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화운은 쥐 상의 노인 옆으로 갔다.
하지만 노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어떻게 작업을 걸지 난해했다.
‘좋아, 일단 노인에 대해 알아볼까!’
화운은 노인을 향해 다짜고짜 포권을 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감히 검마께 우리들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할 수 있다는 건가?”
노인이 황당한 빛으로 물었다.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네. 그럴 정도로 대단하다면 여기서 이렇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겠는가?”
노인의 얼굴엔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 영감, 내 말발로 어쩔 수 있는 늙은이가 아니군!’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좋아, 거저 주지는 않겠다 이거지? 하지만 그거 알아?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씩 웃은 화운은 옆에 있던 누군가의 손에서 횃불을 낚아채고는 암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화운은 군웅들을 이끌고 수직동굴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중간에 쥐 상의 노인이 기관들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는 것이냐고 반 협박을 하며 물었다.
화운은 기관을 마저 통과한 후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목숨 걸고 왔다. 이 정도 얼음이 두려워서 주저할 정도면 오지도 않았다. 먼저 갈 거 아니면 비켜라!”
“맞다! 우리가 먼저 가겠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그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소리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운이 비켜서자 사람들이 나선형의 계단으로 몰려가 미끄럼을 타며 내려갔다.
“뭐 하느냐, 어서 내려가지 않고!”
쥐 상의 노인이 채근했다.
“기다려 보십시오.”
“뭘 기다리라는 것이냐!”
노인이 다시 소리치자 화운은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반 각, 반각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유가 무엇이냐?”
“반각 후엔 자연 알게 될 겁니다.”
화운의 수상쩍은 언행에 노인은 입을 다물고 청력을 높였다.
이윽고 반각이 지난 후.
“엇! 길이 없다!”
“뭐?”
“없어! 없다고! 조심해!”
“뭔 개소리야!”
“멈춰! 멈추라고!”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화운이 노인을 향해 물었다.
“들으셨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잠깐 기다리고 있자니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아악!”
“끝, 끝이다!”
“안 돼!”
화운은 노인을 향해 바로 섰다.
“제가 여기까지 기관을 잘 알고 있었던 건 장보도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오랫동안 본가에 전해지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기관에 대한 설명만 되어 있어서 그게 뭔지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지요. 저 역시 그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제천마존의 비동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이라는 것을.”
“기관이 얼마나 더 있느냐?”
쥐 상의 노인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냥은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뭐라?”
노인의 얼굴이 서슬 푸르게 변했다.
“주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거래를 하자는 것이냐?”
“예. 범상치 않은 분이시라는 걸 압니다.”
“……!”
“광장에서 어르신께 일부러 말을 걸었습니다. 어르신께 원하는 게 있어섭니다.”
“……?”
“어르신께서 원하는 걸 드릴 테니 제가 바라는 걸 주십시오.”
화운의 말에 노인이 표정을 바꾸며 관심을 보였다.
“주겠다는 건 장보도 내용일 거고, 그래 받겠다는 건 무엇이냐?”
확실히 노인은 보통이 아니었다.
화운이 말하는 바를 금세 알아차렸다.
화운은 노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익힌 경신술!”
“응?”
“많이도 안 바랍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상승의 절예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 수 있게 아주 쬐끔요.”
“뭐, 이런…….”
“진짜 많이도 안 바랍니다. 구결 전부를 열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중 하나만 가르쳐 주십시오. 음… 여섯 번째 어떠세요. 제가 그 숫자를 좋아하거든요.”
화운이 히죽 웃었다.
노인은 기막히고 황당하여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황당한 놈이 다 있어?’
***
화운의 검끝이 백나찰의 미간을 일직선으로 가리켰다.
“서로 돕고 사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야. 약자가 강자의 그늘에 숨는다고 죽을 이유가 될 순 없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 화운은 검끝을 돌려 도살자를 가리켰다.
“그대의 친구를 죽인 백나찰은 이 여인이 아니야.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말고 둘이 잘 이야기해 봐.”
화운의 말에 도살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운은 당황하는 백나찰과 도살자를 두고 암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공무영비! 음훗훗후! 정말 대단한 경신술이야! 천추정한검과 함께 펼친다면 대단한 무위가 될 거야.’
화운이 히죽히죽 웃었다.
수십 번을 반복하여 쥐 상의 노인에게서 공공무영비라는 경신술을 야금야금 모조리 뽑아냈다.
그러니 이제 다른 먹잇감을 노릴 차례였다.
‘다음은 누가 좋을까? 남궁검가주? 아니면 낭왕? 그것도 아니면 검마? 우훗훗! 다들 기다리십시오! 줄을 서시오!’
화운은 힘찬 걸음으로 암로 속으로 들어갔다.
검마 덕분에 수직동굴의 바닥에 있는 제천지존릉까지 왔다.
이제 문제는 검마와 낭왕의 싸움이다.
그 싸움이 시작되면 격분을 참지 못한 낭왕이 얼음기둥을 부쉈고 그로 인해 천장까지 무너져 다 죽었으니까.
제천지존릉 안으로 피한 몇몇 만이 화를 면했다.
화운은 검마의 뒤를 따라 제천지존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쥐 상의 노인을 검마가 무시하고 지나치자 그를 따라가는 척하다가 쥐 상의 노인이 제천지존릉 안으로 황급히 달려가자 다시 걸음을 돌렸다.
검마는 화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거라 예상했던 화운은 제천지존릉의 바깥 쪽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쥐 상의 노인은 그사이에 안쪽 석실로 사라진 상태였다.
화운은 석실 입구에 숨어서 얼굴만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잠시 후 얼음기둥이 박살이 나고 천장이 무너졌을 때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제천지존릉에 남아 목만 길게 내민 채 고수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낭왕이 검마의 앞을 막아섰다.
“이때 쯤 남궁검가가 등장했을 텐데.”
화운이 위쪽 벽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남궁검가의 무인들이 빙벽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채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와우! 멀리서 보니까 더 대단해 보인다!”
화운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멋들어지게 아래로 내려선 남궁검가주가 낭왕과 검마에게 다가갔다.
“이쯤에서 검마가 보물은 나한테 있다고 그랬었는데…….”
화운이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검마가 화운이 있는 제천지존릉을 가리켰다.
그러자 낭왕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어? 뭐, 뭐얏!”
당황한 화운이 제천지존릉 안으로 후다닥 숨었다.
“뭐야, 또 날 판 거야? 젠장, 그냥 없다고 하면 되지.”
화운이 투덜거릴 때였다.
석실 안으로 바람이 확 불어 닥치더니 육중한 체격의 낭왕이 나타나 화운의 뒷덜미를 덥석 잡아 올렸다.
“역시 곳간의 보물은 쥐새끼가 훔치는 법이지.”
“예?”
“눈알을 뽑아버리기 전에 모조리 내놔라.”
낭왕이 얼굴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화운은 낭왕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다 두 팔을 벌렸다.
“제가 가진 거라곤 불알 두 쪽 뿐인데요.”
“눈알을 뽑아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낭왕이 살기를 터트리며 다른 손으로 화운의 몸을 샅샅이 뒤졌다.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검마가 거짓을 말했다는 것이냐!”
낭왕이 살기등등하여 화운의 뒷덜미를 잡은 채 검마가 있는 바깥으로 달려갔다.
‘하! 이게 아닌데…….’
낭왕이 자신을 가리켜가며 뭐라고 소리쳐 댔고 검마의 기세가 점점 차가워졌지만 화운에겐 관심 밖이었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몸을 사렸어…….’
잠시 후.
얼음기둥이 부서지고 천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제천지존릉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던 화운은 커다란 얼음덩이에 깔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