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무한, 그 기연 속으로……(2)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자세를 바짝 낮춰 황의인을 피한 화운은 돌덩이 두 개와 시체처럼 창백한 여인의 검을 차례로 피한 다음 지옥 아가리처럼 보이는 암로 앞까지 냅다 뛰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뚝 멈춘 화운은 부리나케 뒤를 돌아봤다.
시체처럼 창백한 여인이 쫓아오고 있었다.
“대체 왜……?”
화운이 의문을 드러낸 순간.
“비켜라!”
거친 손길이 화운의 멱살을 와락 잡아채더니 한쪽으로 던졌다.
“으헉?”
기겁한 화운이 훨훨 날아가는 것을 멈추고자 허우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날아가는 방향엔 분명 한 사람이 있었다.
푸줏간의 도살자.
쓰-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
“안-돼!”
화운은 비명만 남기고 머리통이 쪼개졌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운은 자세를 바짝 낮추었다.
황의인이 스쳐 날아가자 뒤돌아 냅다 뛰었다.
쿵! 쿠웅!
뒤쪽에서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연이어 들렸다.
화운은 그 소리에 놀라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앞쪽에 그가 들어왔던 통로가 보였다.
‘그래, 저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저리 가면 다 포기하고 도망가는 줄 알 테니까!’
화운은 눈앞의 통로를 향해 악착같이 뛰었다.
그런데 뒤쪽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불길하다.
그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화운은 가슴이 덜컥하여 뒤돌아봤다.
“……!”
새하얀 얼굴의 여인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기겁한 화운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뛰었다.
“나한테 왜 그래!!!!”
애원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는 금세 끊기고 말았다.
쉬-악!
***
자신은 먹잇감이다.
맹수들의 먹잇감.
맹수는 한 번 포착한 먹잇감은 눈 밖으로 사라지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저들의 눈 밖으로 벗어날 때까지 냅다 줄행랑을 치는 게 살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체처럼 창백한 여인이 자신보다 훨씬 더 빠르다.
도망치지 못한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천만다행으로, 자신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알아낼 겨를도 없다.
죽고 다시 살아나고, 다시 죽고 살아나는 시간의 간극이 너무나 짧은 탓이다.
일단은 조금이라도 길게 살아남아 생각을 정리해야만 한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화운은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렸다.
황의인이 머리 위를 지나쳐 날아가는 순간 불쑥 손을 뻗었다.
그리고 뒷덜미를 붙잡아 빙글 한 바퀴 돌린 다음 황의인을 창백한 여인에게로 던졌다.
“억?”
황의인의 당황성이 들렸고, 쉬악! 하는 파공음도 들렸다.
쿠웅!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이때 화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황의인이 창백한 여인의 검에 격중당한 순간 화운이 검을 뽑아 힘껏 휘둘렀다.
채앵!
여인이 화운의 검을 막았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다. 여인의 검끝이 예기치 못한 궤적을 뚫고 들어왔다.
푸욱!
왼쪽 갈빗대 사이를 불로 지진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화운이 눈을 부릅뜬 순간.
쉬악!
‘내 머리통 따는 것이 재밌냐!’
차가운 여인의 얼굴이 빙글 돌았다.
그래도 일곱 번 시도한 끝에 여기까지 왔다.
***
검을 너무 강하게 휘둘렀다.
화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가볍게, 바람처럼 가볍게!’
검은 바람을 타듯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부친이 마지막으로 남겨준 무공서적에 적힌 구결이다.
그럭저럭 익히면 어디 가서 검객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라던 책이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타듯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자세를 바짝 낮춘 화운은 황의인을 여인에게로 던진 다음 바짝 쫓아가 바람을 타듯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채앵!
검이 막혔지만 곧바로 이격이 이어졌다
챙!
다시 한번 쇳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게 다다.
두 번째 공격까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데에만 스물일곱 번이나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혹했다.
푹!
여인의 검이 아랫배를 찔렀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신이 굳어버린 화운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꼭 날 죽여야만 시원하겠냐!”
억울함과 원망 그리고 분노가 폭발한 얼굴이었다.
여인은 잠깐 의아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쉬악!
황당한 중에도 세상이 빙글 도는 건 같았다.
푹!
여인의 검이 아랫배를 찔렀다.
“처음 보잖아! 대체 왜? 왜 그렇게 죽여 대는 거냐?”
화운이 악을 썼다.
여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곧 서슬 푸른 표정으로 변하더니 검을 뽑아 냉랭하게 휘둘렀다.
쉬악!
푹!
여인의 검이 아랫배를 찔렀다.
“대체 왜?”
쉬악!
푹!
여인의 검이 아랫배를 찔렀다.
“왜 그러는 건지 이유라도 알자. 제발!”
쉬악!
푹!
“니미랄 년!”
쉬악!
푹!
여인의 검이 아랫배를 찔렀다.
“내가 니 오래비다!”
쉬악!
푹!
“소저, 우리……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소?”
여인은 더욱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쉬악!
푹!
“난 널 사랑했을 뿐인데…….”
여인은 검을 세 번이나 휘둘렀다.
쉬악! 쉭! 쉬아악!
푹!
“아무래도 나 미쳐가는 것 같아.”
쉬악!
푹!
여인의 검이 아랫배를 찔렀다.
“그대의 검……. 죽어서도 잊지…… 않겠…… 이름이 무어…… 냐? 무인으로써…… 마지막 상대는 알고 싶다.”
“백나찰! 천추검!”
쉬악!
푹!
백나찰의 폭 좁은 협봉검이 아랫배를 찔러왔다.
몸을 비틀어 깊은 상처를 입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지만 옆구리가 길게 찢기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쓰-앗!
그 짧은 순간에도 백나찰은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검 끝을 돌렸다.
“천추검!!!”
화운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넌 누구냐?”
화운은 잠깐이나마 여인의 검을 멈추게 할 방도를 찾아냈다.
셀 수조차 없을 만큼 죽은 후였다.
***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할 수 있다.
이제 방법을 찾았으니 침착하게 하는 거다.
그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침착하게 하는 거다, 화운!!!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
황의인을 앞세우지 않고도 싸울 수 있게 된 화운이 신형을 날렸다.
화운이 사라진 공간을 지나쳐 간 황의인이 저만큼에서 나뒹굴었다.
쿠웅! 쿵!
돌덩이들이 떨어지고.
채앵!
화운의 검이 백나찰의 협봉검과 부딪쳤다.
백나찰의 협봉검은 검날의 폭이 좁아 빠르고 날카롭다. 그에 비해 화운의 검은 바람을 타듯 부드럽다.
백나찰의 협봉검에 비해 날카로움과 속도는 모자라지만 면면부절 이어지는 검초가 모자란 부분을 채워줬다.
그러고도 부족한 부분은 반복된 경험이 상쇄시켰다.
일격에서 이격으로, 이격에서 삼격, 사격으로 이어지는 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백나찰의 협봉검이 갑자기 맹렬하게 찌르고 들어왔으나 검을 당기고 세움과 동시에 상반신을 살짝 틀었다.
백나찰의 협봉검은 원하던 궤적에서 아주 살짝 벗어난 정도였지만, 화운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다.
화운의 무위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화운이 이만큼이나마 버틸 수 있게 된 데만 수백 번을 넘게 죽고 살아났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이 상황은 모면할 수 있을 정도로 눈으로, 몸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외우고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채챙!
화운이 숨 가쁘게 몰아쳐온 협봉검을 막았다.
백나찰은 당황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기에는 상대가 마치 자신의 검로를 모두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검격에 실린 내력이 너무나도 일천했다.
검에 내력을 실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는 뜻일까.
눈앞의 상대는 젊었다.
젊어도 너무 젊었다.
현 무림에 이 정도의 신진고수가 있었나?
“천추정한검!”
“……!”
화운의 갑작스런 외침에 백나찰은 두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백나찰이 익힌 검법은 강호에 나온 적이 없었다.
선대로부터 이어온 비전의 검술이다.
화운이 수백 번을 죽어가면서 알아낸 정보였다.
“백가의 비기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스승님께서 아신다면 무척 기뻐하실 터인데…….”
백나찰은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화운은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은 서로 시간이 없으니 추후에 그대의 가문과 스승님의 비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사? 넌 대체 누구이기에……?”
“화운! 그게 내 이름입니다. 꼭 기억해 주십시오.”
화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그리고 뛰었다.
다행히 백나찰이 쫓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백나찰의 살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나찰의 살수를 벗어난 화운은 자신이 들어왔던 통로로 뛰어갔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입구 가까이에서 숨어 있다가 광장에서 인기척이 사라지자 다시 돌아왔다.
백나찰과 도살자는 물론이고 광장에 있던 군웅들도 보이지가 않았다.
검마가 앞서 간 암로 속으로 따라간 것이다.
죽음의 기관이 기다리고 있어도, 검마가 앞서가고 있어도 까마득한 과거 천하를 군림하였던 제천마존의 무학이라면 목숨을 걸 만하고도 남았으리라.
천 년 전 천하에 군림하였다는 절대의 무신, 그런 제천마존의 비전이 이곳에 있다는데 어느 누가 욕심을 내지 않을까.
광장에 혼자 남게 된 화운은 아무데나 털썩 앉았다.
쉴 새 없이 죽어댄 숨 가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 가운데 정말 오랜만의 여유를 맞았다.
화운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화운은 경천보패에 관한 울림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죽기 직전에 뭔가를 발동시켰고 그로 인해 죽음이 무수히 반복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건…… 이건……!”
중얼거리던 화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큭! 크핫하하하하하!”
광장이 떠나가라 웃어댄 화운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다! 죽어도 살아나고 다시 살아나는 걸 이용한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삼류로 태어나 삼류로 죽어야만 하는 신세를 벗어날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화운이 제천마존의 비동에 온 이유는 강해지기 위해서다.
강해져야 부친의 복수도 모친의 염원도 그리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다.
‘아버지…….’
부친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졌다.
자식을 위해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무공들을 모아온 분이셨다.
하지만 그 무공서라는 것들이 대부분 시중에 흔히 떠도는 삼류무공들이었다.
개중에는 소림이나 무당 그리고 화산 같은 명문대파의 무공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제자들조차 익히지 않는 도태된 무공들뿐이었다.
그래서 늘 미안해하셨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그곳에서나마 맘껏 웃으실 수 있도록 제가 보란 듯이 해낼 테니까요.’
부친에 대한 상념을 털어낸 화운은 자신의 현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반복되는 죽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기관들의 파훼법을 알아낼 수 있어. 죽고, 죽고 또 죽는다면 뭐든 다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죽는 걸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모든 기관을 통과할 수 있게 되면 누구보다 먼저 비동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천마존의 무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천하를 쩌렁 울리는 고수가 되는 것이다.
검마처럼 사람들을 손 한 번 휘둘러 날려 버리고 내가 누구라고 당당히 외칠 수가 있게……!
‘아냐! 내가 아냐! 젠장! 검마가 있었어!’
지금 가장 앞서고 있는 이가 검마다.
누구도 검마를 앞지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건 내버려둬도 앞서가려는 자가 있으면 결코 용서치 않는 검마였다.
‘검마 정도 되는 고수라면 자잘한 것들은 팽개칠지도 몰라! 아니 운이 좋으면 내가 먼저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검마와 함께 갈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검마 바로 다음으로 도착할 수만 있다면 검마가 신경 쓰지 않는 보물들은 자신의 차지가 될 것이다.
혹시 운이 닿는다면 검마 모르게 슬쩍 할 수도 있는 일이고.
화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는 거야.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끝까지 가보자. 나중의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되지 뭐. 난…… 이제 불사신이니까, 큭큭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