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무한, 그 기연 속으로……(1)
화운은 정신없이 뛰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죽음의 손길이 빗발치는 곳에서 삼류무인이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 눈치가 빨라야 한다.
누구보다 빨리 살 자리를 찾아야 하고, 죽음의 손길이 닿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피해라!”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온 건 화운이 본능적으로 살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황의인의 바로 뒤로 찰싹 달라붙었을 때였다.
후두두두둑!
천장에서 장창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고수급의 인물들은 신속하게 자리를 벗어나거나 장창들을 쳐냈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이들은 꼬치가 되어 죽어 나갔다.
황의인 역시 나름 재간을 발휘하여 장창들을 쳐냈다.
그 덕분에 뒤를 바짝 따라가던 화운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황의인이 몸을 날려 그 자리를 순식간에 벗어날 정도로 고수였다면 화운 역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당히 강해 보이는 자를 눈여겨 두었던 것이 목숨을 구한 것이다.
‘젠장! 이래서야 보물을 볼 수나 있을까!’
화운이 투덜거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섯 개의 관문을 통과했다.
하나하나가 아차 하는 순간 즉사를 면키 어려운 죽음의 관문이었다.
삼류에 불과한 화운이 이곳까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살 자리를 찾아 가는 화운의 관찰력이 뛰어났다.
화운은 걸음마다 주변을 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입구 쪽이 이럴 진데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기관들이 있을까.
그래도 가야 한다.
‘제천마존의 비급! 삼류를 벗어날 다시없는 기회니까!’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죽음의 통로가 끝나자 광장이 나타났다.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에 비하면 그리 넓지는 않았다.
천장에는 야광주들이 박혀 있어 사위를 분간할 정도로 밝은 곳이었다.
광장 중앙 바닥엔 거대한 이무기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유황 냄새와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자칫 구멍으로 떨어졌다간 무슨 불상사를 당할지 상상조차 끔찍했다.
“저쪽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갔다.
광장 반대편에는 마치 그쪽으로 오라는 듯 시커먼 동혈이 딱 하나가 뚫려 있었다.
화운의 눈에는 지옥으로 통하는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보물에 눈이 뒤집힌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기관들을 지나쳐 왔는지를 잊어버린 것처럼 서로가 먼저 가려고 앞다퉈 몰려갔다.
‘이거 좋지 않은데……!’
화운은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살피다 벌써 저만큼 달려가고 있는 황의인을 쫓아갔다.
그런데 광장을 삼분의 이쯤 건너가고 있을 때였다.
“내가 검마(劍魔)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광장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검마!!!!’
화운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 전방을 살펴보려 할 때였다.
콰콰콰콰!
폭풍 같은 기파가 폭발했다.
전방으로 몰려가던 수십 명이 모조리 휩쓸려 날아갔다.
화운보다 앞서가던 황의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엄청난 기파를 감당 못 하고 화운이 있는 뒤쪽으로 날아왔다.
“어?”
화운의 눈이 동그랗게 치떠졌다.
“머저리! 꺼져라!”
황의인이 신형을 빙글 돌리더니 화운을 박차고 그 반동으로 멈췄다.
그 발길질에 뒤로 날아간 것은 화운이었다.
“이런 씨이…… 으악!”
욕설을 내뱉으려던 화운이 비명을 질렀다.
광장 바닥에 뚫려 있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끄아아아아!”
화운의 비명이 구멍 아래로 끝없이 멀어졌다.
화운은 뜨거웠다.
온몸이 타다 못해 뼛속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신을 집어삼킨 고통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급격히 꺾인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구르고 떨어지다 보니 단단한 암벽에 부딪쳐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반대로 꺾이고 부러져 나갔다.
흡사 벌겋게 달궈진 무쇠 통로 속을 빠른 속도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무간지옥이 있어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면, 한 번 구르고 떨어질 때마다 속죄의 고통을 받고 또 받는 곳이 정말 있다면 지금 화운이 구르고 떨어지고 있는 곳이 딱 그곳일 것 같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정신마저 가물가물해져 갈 때였다.
지옥 끝까지 내리 꽂힐 것만 같던 통로가 갑자기 위쪽으로 비스듬하게 경사가 졌다.
화운의 몸은 그 경사를 따라 구르다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화운은 자신이 시뻘건 용암의 바다를 건너고 있음을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보았다.
한 번 빠진다면 혼백까지 녹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그게 나을 지도…….’
고통은 클지 몰라도 순식간에 끝나지 않을까.
화운이 금방이라도 의식이 끊길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와 같은 바람을 떠올린 순간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는 용암의 바다를 건너 딱딱한 돌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이 박살이 나는 듯한 아득한 충격이 한 가닥 남은 그의 정신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물거릴지언정 의식이 들었다가 까무러치기를 무수히도 반복하던 어느 순간 통증이 사라지고 의식이 또렷해졌다.
삶의 마지막을 돌아보기 위해 잠깐 의식이 또렷해진다는 회광반조의 현상인 모양이다.
화운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이,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아!’
무공 한 자락 모르던 부친의 억울한 죽음과 무가의 여식이었던 모친의 바람, 그리고 자신의 꿈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끝나고 말아야 하나.
분한 마음이다.
뭔가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꺾여 버린다는 것이.
화운은 죽고 싶지 않았다.
삶의 본능에 따라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손에 무언가가 걸리자 덥석 움켜잡았다.
그것이 그가 발휘한 삶의 마지막 힘이었다.
털썩!
그의 팔이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생의 마지막 의식이 심지가 다한 촛불처럼 꺼져갔다.
이때 그가 손으로 쥐었던 물건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치며 무언가가 발동되어 눈부신 섬광이 폭발했다.
천지간의 간극을 뒤틀어 시와 간을 바꾸니 이를 경천보패라 한다!
천상의 울림 같은 준엄한 소리가 혼백까지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뭔가 초월적인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화운의 머릿속을 연달아 울렸다.
억겁의 기다림이 이제야 끝나는구나.
나의 시간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너의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이야, 잊지 말거라.
무극(武極)에 이르러서야 너의 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
화운은 정신없이 달리는 중에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황의인이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광장을 뒤흔드는 오만한 목소리.
‘검마라고?’
화운이 고개를 쳐들고 전방을 살펴보려 할 때였다.
콰콰콰콰!
강한 기파가 폭발하는 소리가 온 광장을 뒤흔드는 가운데 전방으로 몰려가던 이들이 돌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속수무책으로 날아갔다.
화운보다 앞서가던 황의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엄청난 기파를 감당 못 하고 화운을 향해 뒤로 날아왔다.
“어라?”
화운이 비명을 내지르다 말고 멈칫했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현듯 떠오른 화운은 반사적으로 바짝 엎드렸다.
“머저리! 꺼져…… 엇!”
황의인의 발길질을 피한 것이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화운은 저만큼 나가떨어져 커다란 구멍 앞에서 가까스로 멈추고 있는 황의인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지?”
진짜다.
똑같은 상황이다.
황의인이 자신을 향해 날아온 것까지 똑같다.
자신이 미리 피하는 바람에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 달랐다.
대체 뭘 본 거지? 아니 뭘 겪은 거지?
진짜 무슨 일이……!
물밀듯이 밀려드는 의문.
하지만 화운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통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
화운은 또다시 달리는 중에 눈을 번쩍 떴다.
“어?”
그는 방금 겪었던 일이 생생히 기억이 나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였을까?
분명 자신은 죽었는데 왜……?
화운이 도무지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볼 때였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검마! 진짜였어!”
화운은 부리나케 전방을 바라본 후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렸다.
황의인이 화운의 머리 위를 지나쳐 날아갔다.
화운은 황의인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도 않고 우측으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자리를 이동하고 나자 바닥을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화운이 부리나케 돌아보니 그가 좀 전까지 있었던 자리에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전신의 터럭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란 화운이 고개를 번쩍 쳐들 때였다.
쉬-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운이 바라보는 세상이 빙글 돌았다.
자신의 목이 뎅강 잘린 것이다.
***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의 목소리.
화운은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려 날아오는 황의인을 피한 다음 우측이 아니라 전방으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다.
이전에 몸을 날렸던 우측을 돌아보았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검날의 폭이 좁은 협봉검을 들고 있었다.
‘저 여인이?’
화운은 조금 전 저 여인한테 죽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화운은 납작 엎드려 날아오는 황의인을 피한 다음 좌측으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다.
떨어진 돌덩이 너머에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 보였다.
화운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전방으로 뛰었던 자리다.
쿠웅!
좀 더 큰 돌덩이가 떨어졌다.
화운은 오한이 든 듯 진저리를 치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었다.
죽음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는 법.
바로 그때였다!
쓰-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운의 머리통만 깨끗하게 잘려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광장을 뒤흔드는 검마의 목소리.
화운은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려 날아오는 황의인을 피한 다음 좌측이 아니라 우측으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지자마자 다시 전방 쪽으로 신형을 냅다 날렸다.
쉬-악!
뒤늦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처럼 창백한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쿠웅!
화운의 바로 지척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다.
사색이 된 화운은 벌떡 일어나 냅다 뛰었다.
좌측에서 자신의 머리를 잘라 버린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생각조차 못하고 정신없이 뛰었다.
전방에 시커먼 입구가 보였다.
흡사 지옥으로 향하는 아가리 같았다.
화운은 눈앞의 입구가 지옥일지 아닐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다.
“……!”
어둠이 화운을 집어삼켰다.
눈앞이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화운이 우뚝 멈춰 선 순간.
쑤-칵!
전방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화운을 지나쳤다.
“……!”
전신의 무언가가 끊어지고 갈라졌다는 느낌에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 순간 화운의 몸뚱이가 둘로 깔끔하게 쪼개졌다.
“크헉?”
화운은 달리는 중에 번쩍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겪었던 끔찍한 경험이 그의 정신을 짓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검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화운은 바짝 자세를 낮추며 좌측을 바라봤다.
푸줏간의 도살자.
커다란 육도를 양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딱 그랬다.
날아온 황의인이 자신을 지나쳐 가자 화운은 우측으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지자마자 다시 전방 쪽으로 신형을 냅다 날렸다.
쉬-악!
뒤늦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처럼 창백한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쿠웅!
화운의 바로 지척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다.
화운은 벌떡 일어나 전방으로 몇 발짝 뛰어가다가 우뚝 멈추었다.
눈앞에 보이는 암로로 뛰어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그였다.
화운은 진저리를 치며 생각해 보았다.
좌측에는 도살자가, 우측에는 시체 같은 여인이 그리고 전방엔 끔찍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뒤쪽에는 더 무시무시한 검마가…….
어느 쪽도 살 길이 보이질 않는다.
혹시 이 자리에만 있으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까?
화운은 시체처럼 창백한 여인을 돌아봤다.
“……!”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쉬악!
여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화운이 보는 세상이 빙글 돌았다. 목이 잘린 것이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