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마지막 회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세월이 비켜 갔는지, 아님 나 혼자 여전히 10년 전 그 세상에 살고 있는 건지 뭐 하나 크게 눈에 띄게 변한 건 없는 거 같다.
아닌가?
따지고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이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의 중심에 살고 있다 보니 그 변화에 익숙해져서 그걸 실감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겠지?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내가 무뎌져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론 많은 게 변했을 거다.
10년 전 그날,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았던 그 로또 당첨 번호 역시 이제는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데, 그럼에도 세상에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의 그 기분은 여전히 바로 어제 있었던 흥분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요즘 들어 난 일부러 한 번씩 회사 로비를 걸어 다닌다.
그러면서 홍성의 새로운 세대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함께 호흡을 시도해 보는 게 최근 내가 회사에서 붙인 취미이자, 거를 수 없는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진 열정과 긴장감, 그리고 욕망을 거울삼아 지난 내 홍성 생활을 추억해 본다.
그렇게 추억을 되살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금 그때의 열정과 긴장감, 그리고 욕망들도 함께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뭘 잘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게 조심스럽기만 했던 그때.
그리고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 다시 또 조심스러워지고 있는 지금.
나이가 들면, 회사 내에서 포지션이 올라가면 뭔가 좀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고 삶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지금의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에 비해 크게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뭘 다 알 필요는 없다는 거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또 알면 알아지는 대로 그렇게 매일매일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몰랐던 것도 알게 되는 거 같고, 또 알고 있었던 것도 기억이 희미해지는… 그런 게 우리네 인생인 거 같다.
강 팀장이라는 신예 에이스를 지켜보면서 난 그가 그 시절 나와 똑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통해 딱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열정과 희열을 대리 만족하고 있었다.
사람이 다 다를 것이기에 디테일한 사정까지 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딱 저 포지션에서 품게 될 성공에 대한 열망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대동소이할 테니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즐겁고, 날 미소 짓게 만들어 줘서 이유 없이 잘 성장해 주길 응원하게 되는 상대를 만났다.
그리고 난 그 상대를 통해 10년 전 나의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 애를 썼고.
“꽃등심으로 어디 보자… 300그램, 600그램… 꽃등심으로 그냥 1킬로 주세요.”
오랜만에 퇴근길에 아파트 상가 앞에서 내려 소고기를 구입했다.
애가 승후 하나만 있었을 땐 집사람이랑 그럭저럭 번갈아서 애를 봐 가며 먹더라도 식당 같은 곳을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승애까지 태어나고 나니까 이젠 그 간편한 외식이 전쟁이 되어 버려 오히려 집에서 먹는 게 싸게 치이고 또 훨씬 더 수월하게 느껴졌다.
애들 다 데리고 나가려면 옷부터 입히고 또 챙겨야 할 게 한두 갠가. 이것저것… 아이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차라리 다시 출근을 해서 야근을 하지, 쉬는 날도 아니고 퇴근하고 돌아와서 애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러 다시 나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두통이 시작될 지경이다.
애 둘을 동시에 데리고 어디 나가서 외식을 한다는 건, 나나 집사람 둘 중 하나는 식사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고, 또 둘 중 하나가 울기라도 하면 괜찮던 나머지 하나도 덩달아 울어버리니 우리 부부 정신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옆 테이블 보기 민망해서 할 짓이 아니었다.
“아빠 왔뜨아아아아!”
현관물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몇 번 해야 된다.
이젠 담배까지 완벽하게 끊어 버려서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외엔 우리 똥강아지 소악마들을 맞이할 마땅한 대안도 없다.
현관문 앞에서 짧게 심호흡 몇 번을 하고 양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연습까지 했다.
아빠가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왔다는 걸 벌써부터 알아줄 나이의 녀석들이 아니니까.
아직은 무조건 힘찬 아빠여야만 한다.
현관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하는 의식은 흡사 군대 백일 휴가를 복귀해서 부대 안으로 들어가기 전 위병소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기분과 비슷할 거다.
“아빠아아아!”
그런데 참 신기하지?
막상 녀석들이 아빠가 집에 왔다고 앞다투어 뛰어와 안기면, 그 순간만큼은 하루의 피로가 모두 다 달아나는 기분이 든다.
물론 그 뒤로 치르게 될 녀석들과의 전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신이 알아서 내 한계를 찾아 떠나는 과정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첫째 놈이 달려와 안기면 둘째 놈은 오빠만큼 근력이 있지가 못하다 보니 아빠 정장 바짓단만 잡고 흔드는 게 전부다.
오빠만 안아 주지 말고 자기도 함께 안아 달라는 사인이다.
그럼 난 승후의 볼과 이마, 콧등에 사정없이 키스 세례를 퍼부어 놓고 승애를 다시 안아 준다.
“자, 승애 이제 내리자.”
“시러.”
“아빠 손 씻어야 돼, 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손 씻는 거지? 자, 가서 오빠랑 잠시만 놀고 있어. 아빠 손 씻고 옷 갈아입고 바로 나올 테니까.”
집사람의 휴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휴식이라고 해도 완전한 휴식일 수는 없다.
애들을 책임져 줄 남편이 퇴근을 하고 왔으니까 그나마 애들한테 덜 집중하고 집안일에 올인을 할 수 있다는 정도지….
애를 보면서 집안일을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애들을 봐줘서 집안일에만 집중을 할 수 있게 되면 집안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설거지? 그것보다 아름다운 운동이 어디에 있겠나.
빨래 널고 걷는 거?
아이고… 세상에서 제일 편한 취미 생활이다.
청소기 돌리는 것만큼 신나는 유산소 운동이 어디에 있겠나.
“갑자기 무슨 소고기를 먹자고 준비를 하래?”
“내가 언제 준비를 하라고 했어? 소고기 사 갈 테니까 국 끓일 거면 딴것 끓이지 말고 된장찌개 끓여 놓으라고밖에 더 했어?”
“회사에서 뭐 좋은 일 있었어? 갑자기 집에서 웬 소고기?”
“그냥 오랜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옛날 생각? 무슨 옛날?”
“있어, 그런 게… 애들 아직 안 씻겼지? 내가 씻길게.”
“승애는 안 씻겨도 돼.”
“왜?”
“한 시간 전에 똥 쌌어. 그거 씻기면서 아예 그냥 다 씻겨 버렸어. 승후만 데리고 들어가서 씻겨 줘.”
“오케이….”
승애를 씻길 때엔 그래도 딸애가 되다 보니 조심스러운데, 승후를 씻길 때엔 애도 이제 많이 커서 그냥 같이 샤워를 해 버린다.
샤워 부스에 같이 들어가서 함께 양치질을 하고, 이젠 아빠가 머리를 감는 동안 녀석 머리에 샴푸만 살짝 짜 주면 알아서 거품을 만들어 낼 줄도 안다.
이런 개인기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편한 부분도 분명 있는데, 애들이 너무 빨리 큰다는 생각에 서운하기도 하다.
재빨리 머리를 감고 승후가 만들어 낸 머리 거품을 씻겨 주며, 그 거품으로 샤워 타월을 쓰기 전 손으로 녀석의 몸 구석구석을 씻겨 주었다.
그리고 샤워 타월을 사용해서 거품을 잔뜩 만들어 녀석이 좋아하는 촉감 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승후와 신나게 샤워 한바탕을 끝내고 나오니 거실엔 이미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집사람표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배 있었다.
그리고 난 곧바로 틀어만 놓으면 두 녀석이 정신을 팔아버리는 만화 영화를 틀어 놓고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는 집사람을 돕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승애 아기 의자 좀 이쪽으로 옮겨줘.”
“넵!”
“승애 식가위도 준비하고.”
“넵!”
“승후 젓가락 낮에 부러졌어.”
“왜?”
“몰라. 혼자 가지고 놀다가 부러뜨렸어. 어디 새것 있을 건데….”
“여기 있습니다!”
“오….”
“딴건?”
“버너 가스 있는지 확인을 못 했네.”
“그때 한 줄 미리 사 놨지요. 여기 있습니다.”
“밥 다 됐을 거야, 나 야채 씻는 동안 밥만 한번 저어 줘.”
“넵!”
“피이… 뭐 하는 거야? 오늘따라 흥이 아주 넘쳐나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집사람을 웃게 만드는 일.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부모 세대의 추억을 함께 공유해 주는 일.
별 게 있을까 싶었다.
결국은 우리 모두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해내기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닐까….
“밥 먹자. 공승후, 공승애. 티브이 그만 보고 와서 밥 먹자.”
“….”
“승후야.”
“….”
“공승애. 티브이 그만 보고 와서 밥 먹자니까.”
“아, 그러게 왜 만화 영화를 틀어 줬어?”
“….”
집사람이 정색을 하며 승후를 불렀다.
“야, 공승후.”
“응?”
“아빠 말하는 거 못 들었어?”
“….”
“공승애.”
“응?”
“티브이 그만 보고 이리 와.”
“….”
역시 엄마의 파워는 막강했다.
아빠가 말할 땐 대답조차 안 하던 녀석들이 엄마가 표정을 싹 바꾸자 금세 소악마에서 순한 양으로 바뀌어 버렸다.
승애를 번쩍 들어 아기 의자에 앉힌 다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내가 고기를 굽는 동안 집사람은 승애를 먹일 밥을 따로 준비했고.
따로 준비라고 해 봤자 쌀밥에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짜지 않을 만큼만 살짝 얹어서 섞고, 그 위로 삶은 계란 흰자를 조각내어 올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다음 그걸 슥슥 비벼서 아기 숟가락을 승애 손에 쥐여주는 게 끝.
승애는 지금 아빠가 준비하고 있는 이 메뉴가 얼마나 스페셜한 메뉴인지 신경도 쓰지 않고 딱 자기 몫의 식사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입속으로 들어가는 거 절반, 자기 식탁 위로 떨어뜨리는 거 절반.
하지만 혼자 숟가락질을 해서 입속으로 음식물을 넣을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 입장에선 박수를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승애에게 먹일 고기부터 바짝 구워서 아기용 식가위로 토막을 내주고, 승후 몫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만 줬다.
애들이 먹는 건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옛날 사람들의 말.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사실이었다.
아영이가 승후만 할 때엔 나도 함께 어렸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잘 몰랐는데, 막상 내 애가 태어나서 이렇게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고기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나지만, 한 조각도 못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배가 불러왔다.
난 열심히 고기를 구우면서 집사람이 말아 준 소맥 한 잔을 시원하게 절반가량 비워냈다.
“크흐… 좋다.”
“크흐…”
승후 녀석이 아빠가 하는 걸 그대로 보고 따라 하며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승후의 모습에 집사람은 이걸 혼을 내야 하나 아님 그냥 웃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참 애 앞에서 좋은 거 가르친다. 야, 공승후. 그런 건 네가 벌써부터 하는 게 아냐.”
“놔둬.”
“저거 버릇된다니까?”
“참 진짜… 괜찮아. 금방 또 까먹어. 자, 승후. 건배. 승애도 할 거야?”
“할 거야.”
승애에겐 젖병 대용으로 쓰고 있는 고무 빨대가 달린 물병을 쥐여줘 놓고 온 가족이 건배를 하기 위해 각자의 잔을 들었다.
했다.
10년 전 그날, 7평 남짓한 원룸 골방에서 키 낮은 상 위로 가스버너를 올려놓고 그 위로 프라이팬을 올려 혼자서 구워 먹었던 꽃등심.
그나마도 내 집이지만 청소가 안 된 지저분한 바닥에 앉기가 싫어 낚시 의자를 꺼내서 펼쳐 놓고 거기에 앉아 구워 먹었던 꽃등심 맛이 생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소맥도 한잔 들어갔겠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회사 밖에서는 따로 만나는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해 왔던 서울 생활 6년.
비록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로또 당첨이라는 기적이 내게 찾아왔음에도 함께 그 기분을 내줄 만한 사람이 당시 내겐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내겐 더 로또 당첨보다 기적 같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 난 이렇게 생각했었다.
13억.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큰돈인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한 방에 역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금액은 아닌 거 같다고.
그러니 그냥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살던 대로 살아가자고.
그런데 이제 와 생각을 다시 해 보면 난 이미 로또에 당첨이 된 그 순간부터 인생이 역전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혼자서는 절대 뚫어낼 수 없었던 갑갑한 현실.
그 갑갑한 현실을 뚫어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돈이 아니라 용기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마음가짐이었다는 걸 지금의 난 알지만 그때의 난 몰랐던 거 같다.
회사 밖에서 만났으면 그냥 동네 아저씨나 다름없을 회사 임원들.
그만두고 나가버리면 평생 안 보고 살아가게 될 회사 상사, 동료들.
정작 나의 승진엔 약간의 영향력도 발휘할 능력도 없으면서 마치 나의 인사 고과를 모두 쥐고 흔들 수 있을 거처럼 구는 바로 위 선배들.
잘못된 걸 지적해 줄 때마다 그게 왜 잘못된 거냐며 오히려 따지고 드는 후배들.
그리고 생각이 바로 표정으로 나와버리는 신입들….
직장 생활을 견뎌냄에 있어 날 위기로 몰아넣었던 그 다양한 상황과 인간 군상들로부터 날 시원하게 해방시켜 준 로또가 분명했다.
그 덕에 난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최대한 이끌어갈 수 있었던 거고.
그래서 감히 기도한다.
내가 아닌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보험이 양 이사에게도, 안 이사에게도… 박 이사, 장 대표, 사장님, 이지혜, 장향은, 박기태… 우리 매형과 이제는 가족 모임 때마다 내 눈치를 보는 게 일이 되어 버린 손위 동서까지, 그냥 내가 아는 모두에게 지금 이 순간 존재하길 바라며….
“자, 건배!”
“건배!”
“크흐… 좋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