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올라가십시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브랜드 역사가 쌓이기 시작한 폴앤크루는 오늘날 영글러 준명품 브랜드 카테고리에서 확실한 포지션을 잡아내는 데 성공을 했고, 그걸로도 부족해 Y-3와 같은 대형 디자이너 코퍼레이션 브랜드들보다도 상위 브랜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공 전무야.”
“네.”
더 이상 흰머리를 숨기기 위해 염색 같은 걸 하지 않는 장 대표.
언제부턴가 그 흰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고급스럽게 보이게끔 하기 위함인지, 안 하던 금테 안경까지 새로 맞춰서 끼고 다니고 있었다.
“이번에 문 부장이 폴앤크루 서브 라인 브랜드를 하나 론칭해 보자고 건의를 하던데, 네 생각은 어때?”
“서브 라인이라면 베르사체, 베르사체 진, 베르사체 컬렉션… 이렇게 기존 네이밍을 유지하면서 이름만 살짝살짝 바꿔서 다른 가격대별 브랜드를 론칭시키자는 뜻입니까?”
“아니. 폴앤크루는 이미 오리지널 컬렉션이랑 작가 컬렉션, 그리고 BSF 컬렉션으로 가격대가 나눠져 있잖아.”
“그래서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서브 라인 브랜드라는 게 결국은 기존 브랜드에 다른 콘셉트만 추가시켜서 론칭시키는 걸 말하는 거니까.”
“현재 우리 디자인팀이 너무 막강하다 이거야, 문 부장 말은.”
“흐음….”
“계속 외부에서 디자인을 따로 받아서 교정하는 작업만 시키기엔 실력들이 너무 아깝다 이거지.”
“폴앤크루 디자인팀이 자체 디자인하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자….”
“결국은 이 디자이너들도 뭔가를 창조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친구들인데, 그동안 그럴 능력을 가진 친구들을 다 모아 놓고 그럴 수 있는 필드를 전혀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었어. 지금처럼 계속 자기네 능력들을 가둬 두게만 만들면… 결국 이런 친구들은 회사가 좁다는 생각에 이직을 결심하거나, 아님 나가서 자기 회사 차린다는 말이 나오거든.”
“그것도 그렇겠네요. 그런데 폴앤크루처럼 초기 비용이 적게 드는 콘셉트 브랜드가 아니라 디자인 브랜드라면 이것저것 갖춰야 하는 아이템, 컬렉션들이 장난 아니게 많을 텐데요.”
“나도 이제 그게 고민이 되는 거지. 현 상태 유지만 하겠다고 하면 여기서 내가 뭘 더 할 이유는 없어. 그런데 공 전무 너도 알겠지만, 회사 경영이라는 게 어디 내가 현 상태 유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가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어쩔 수 없이 확장이라는 걸 해야 하고, 또 그 확장이 있어야만 현 상태 유지가 가능한 거니….”
“매 순간 이런 결정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되네.”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는 건 장애물이나 시련이 아니라 안주라고 하셨습니다.”
“…?”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일전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회사도 결국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하시면서 계속 움직이게 옆에서 부추겨 주는 게 사장, 대표가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프로젝트의 실패, 마이너스 경영 같은 건 지금 이 순간에 안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안전한 도전 같은 거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하다 싶으시면 하십시오. 본사가 지원하겠습니다.”
“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본사가 지원하겠습니다… 그 말부터 하냐? 내가 뭘 할 줄 알고.”
“뭘 하시든 지원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영원한 사수, 우리 장 대표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거기에 의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너 내 앞에서 말은 이렇게 해놓고 뒤에 가서 재무 리스크팀 다 불러다가 소수점 밑에 숫자까지 다 따져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대표님을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재무 리스크팀이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그걸 못 믿어서 그러는 거죠.”
“하여간 말은… 너는 진짜 물에 빠지면 그 주둥아리만 동동 뜰 거다.”
“이게 다 누구한테 배운 건데요.”
“한마디를 안 지지, 한마디를.”
“그래야 자리가 빨리 끝나니까요. 커피 다 마셨는데,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장님은 요즘 좀 어떠셔?”
“궁금하면 직접 연락 한 통 넣어 보세요, 계속 저한테 묻기만 하지 말고.”
“막상 또 전화를 하면 할 말이 없어. 직접 만나면 그럭저럭 괜찮은데, 전화 통화를 하자니 그건 좀 부담스럽더라고.”
“하여간 성격 독특하다니까.”
“조만간에 점심이나 같이하지, 뭐. 생각해 보니까 사장님 못 뵌 지도 꽤 되는 거 같은데….”
“말만 하지 말고 약속을 잡으세요. 또 제가 중간에 끼어서 다 세팅해 놓고 연락 주기만 기다리지 마시고.”
“이상하게 내가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하면 뭔가 용건을 만들어야만 할 거 같아. 그게 귀찮은 거지, 나는.”
“숨 쉬는 건 안 귀찮으세요?”
“뭘 또 그렇게까지 비약을 해.”
“사장님이 저나 대표님을 먼저 계속 챙기시는 건 저희가 사장님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사장님이 저희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겠죠.”
“아,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고요. 한 번쯤 이유가 없어도 전화 넣어서 같이 점심이나 하자고 해 보세요. 틀림없이 좋아하실 겁니다. 저라고 뭐 진짜 대표님이랑 매일같이 점심 먹는 게 좋아서 제가 먼저 연락을 하는 거겠어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이유 없이 벌어진 틈은 또 별다른 수고 없이 좁혀질 수도 있는 법이니까. 계속 그렇게 일방적으로 거리를 두고 계시는 모습… 솔직히 딱히 보기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였구만?”
“사장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대표님이거든요?”
“얼마나 준비를 해 왔을 거야, 이렇게 쏘아붙이겠다고.”
“크크큭… 저 갑니다, 그럼.”
점심을 끝내고 다시 복귀한 본사 건물.
로비 앞에서 내려 잠시 홍성 본사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 주위로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고층 빌딩들을 쳐다봤다.
평소엔 이런 생각을 전혀 안 해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변엔 참 많은 세상이 있는 거 같다는 생각.
홍성은 홍성만의 세상이 있고, 또 저기 보이는 교보문고 건물 안엔 교보문고만의 세상이 있을 것이며, 제일생명 건물 안엔 또 제일생명만의 세상이 있겠지.
우린 이 넓은 세상에 태어났으면서도 각자의 세상이 이 우주의 전부인 듯, 어떻게든 그 안에서 나란 존재를 부각시키고 또 인정을 받으려고 매일같이 발버둥을 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도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며 그런 나의 노력과 수고를 비웃기도 하고.
갑자기 내가 서 있는 이 세상이, 대한민국이, 서울이 참 좁게만 느껴졌다.
“전무님….”
로비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보안 직원 한 명이 조심히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네.”
“안 들어가십니까?”
“…들어가야죠. 들어갑니다.”
로비 천장에 붙어 있는 무수한 조명 전구들.
이 밝은 대낮에도 저 많은 조명 전구들 중 제대로 작동을 못 하고 있는 놈들이 몇몇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곧 그 수명이 끝날 것처럼 보이는 깜빡깜빡하는 조명도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건 기본인 모양이다.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이런 사소한 것까지 다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사소한 것들, 다른 사람들 눈엔 절대 안 들어오는 것들이 유독 내 눈에만 너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담당자를 따로 불러서 입을 댈 수가 없는 게 바로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의 무게인 모양이었다.
“….”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사장님과 몇몇 임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서둘러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시 반.
점심을 지금 드시러 가는 거라면 너무 늦은 거고, 퇴근을 하시는 거면 너무 이른 거다.
난 로비 쪽으로 나오는 사장님과 이하 몇몇 임원들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지금 점심 드시러 나가시는 겁니까?”
“아뇨, 이 길로 퇴근하는 길입니다.”
본사 로비 중앙
로비 안을 돌아다니던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자리에서 다시 몸을 돌려 로비 입구 쪽으로 함께 걸었다.
“전무님은 오늘도 혼자 들어오시는 걸 보니 폴앤크루 가셔서 장 대표님이랑 함께 식사하고 오시는 모양입니다?”
“네.”
“저도 좀 불러 주세요. 계속 그렇게 저만 쏙 빼놓고 두 분이서 맛있는 거 드시러 다니지 말고.”
“알겠습니다. 다음에 장 대표랑 같이 식사할 일 있음 사장님께 먼저 물어보고 약속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할 것까지는 없고.”
“근데 왜 이렇게 일찍 나가시는 겁니까?”
“할 게 없어요. 보고받을 거 다 받았고, 확인은 전무님한테 받으라고 지시해 놓으니까 난 뭐 딱히 더 사무실 지키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더라고.”
“사장님….”
“오랜만에 고문님들 모시고 차나 한잔하려고요.”
“아….”
“그동안 너무 오래 못 찾아뵌 거 같아서요. 아 참, 이 고문님이 골프 이야기를 계속 하시던데, 그거도 공 전무한테 미루려고. 난 진짜 골프 그건 때려죽여도 못 치겠어. 가만히 세워 놓은 공을 왜 그렇게 땡볕을 견뎌 가며 쳐야 하는 건지 난 이해를 못 하겠어.”
“그렇게 하십시오. 조만간 제가 따로 연락드려서 일정 잡겠다고 전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오케이. 그럼 난 오늘 가서 그렇게 전달합니다.”
“네.”
사장님과는 사장님 전용 차량이 로비 앞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때마침 사장님의 차량이 로비 앞으로 들어오는 타이밍에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부장들과 몇몇 임원들이 하나둘씩 복귀를 하고 있었다.
“그럼 내일 봅시다.”
“들어가십시오.”
모두가 사장님이 탄 차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장님과 함께 이곳 로비까지 나온 임원들이 내 뒤로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런 임원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식사들은 하셨습니까?”
“먹어야죠.”
“그럼 저 따라 들어올 게 아니라 그냥 바로 다녀오시죠?”
“그보다 전무님께 승인받을 사안이 있어서….”
“식사들 하고 오셔서 받으면 안 되는 겁니까? 점심 먹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천천히 먹어도 됩니다. 부장들 다 복귀했는데, 승인 건 전달부터 해놓고 식사를 가도 가는 게 더 마음이 편하죠.”
“그럼 뭐… 같이 올라가시죠.”
어쩌다 보니 이제 막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복귀한 부장들의 합세로 전무 군단 행렬이 되어 버렸다.
“박 부장님.”
“네, 전무님.”
“저기 저… 강 팀장 아니에요?”
“어디….”
“저기 기둥 뒤에 숨어서 우리 훔쳐보고 있는 거.”
“그렇네요. 강 팀장이랑 윤 대리, 한 대리네요. 저 친구들이 왜 저기 저렇게 숨어서….”
“지금 저거 숨어서 보고 있는 거 맞죠? 근데 왜 이렇게 더 눈에 띄지? 잠시 이쪽으로 오라고 해 봐요.”
박기태가 기둥 뒤에 숨어서 전무 군단의 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강 팀장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박 부장의 손짓에 강 팀장 일행은 그 손짓이 자기들을 향한 손짓인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결국 박기태가 답답하다는 듯 강 팀장을 직접 부르자, 그제야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강 팀장.
그는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뭘 그렇게 숨어서 보고 있어요?”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점심은 먹었어요?”
“지금 가는 길입니다.”
“아이고… 오늘은 점심이 늦는 분들이 꽤 많네. 뭐 하느라 아직 점심도 못 먹고….”
“그때 프레젠테이션 때 제가 말씀드렸던 서버 관련 업체랑 미팅을 좀 하느라….”
“그래서 결과는요?”
“일단 저희 쪽으로 유리한 마진을 제시해 놓고 따로 접촉 중인 다른 업체도 있다는 식으로 흔들어 놓는 거까진 성공을 했습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봐요.”
“네, 전무님!”
“알았어. 그럼 얼른 식사 가요.”
강 팀장 일행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다른 임원들이 다 있는 앞에서 박기태에게 말했다.
“강 팀장 저 친구….”
“네, 전무님.”
“유심히 지켜봐요.”
“왜….”
“사고 칠 거 같아요.”
“아닙니다, 전무님. 강 팀장 그런 친구 아닙니다. 전무님 앞이라 쩔쩔매는 거지, 꽤 신중하고 강단이 있는 친구입니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유심히 지켜보라고요. 보통내기는 아닐 거 같아요. 안 그렇습니까, 양 이사님?”
“저는 아까 순간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많이 닮았네요, 누구랑. 강 팀장 얼굴에 들어찬 욕심, 그 욕심을 어리버리한 모습 속에 숨기려는 재치… 거기다 아까 그 장면 전체까지도… 어디선가 봤던 기분이 들더군요.”
양 이사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강 팀장 저 친구 팀장 타이틀 단 지 얼마나 됐어요?”
“1년 차입니다.”
“인사부장님.”
“네, 전무님.”
“제가 강 팀장 인사 고과 기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올라가는 대로 바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저런 친구들을 잘 잡아야 돼요. 잘 키워서 딴 곳에 빼앗기면 아깝잖아.”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뒤에서 쳐다보며 양 이사가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임원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올라가십시오, 전무님.”
“올라가십시오.”
“그럼 수고하십시오.”
다시 닫힌 엘리베이터 문.
난 그제야 양 이사와 단둘이서만 공유했던 미소를 시원하게 터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