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쌍팔년도에 네가 직장 생활을 해 보기나 했습니까?
그리고 다음 날.
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 근무가 끝이 날 즈음 민규를 내 사무실로 따로 불렀다.
“그때 정리해 보라고 했던 유통 판별 브랜드 매출 오디엠(분기별 매출 오차)은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
숙제를 검사받듯 민규는 자신이 정리해 온 서류 파일을 내 앞으로 내밀어 놓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난 그런 민규의 눈치를 애써 무시하며 파일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여기 제로로 잡아놓은 건 뭡니까?”
“신규 브랜드 입점의 경우는 전 분기 기록이 없어서….”
“그럼 플러스 매출로 잡아야죠. 매출 오차 아닙니까, 매출 오차. 없던 매출이 발생을 했으면 당연히 플러스 매출로 잡아야지, 이렇게 제로로 잡아버리면 전 분기 대비 매출의 변동이 없었다는 거잖아요.”
“….”
“오디엠 확인하는 거 아직 안 배웠습니까?”
“….”
“오디엠 확인은 부서 매출 추이 변화를 확인하는 가장 기본 되는 업무라고 제가 이 건 준비하라고 할 때 미리 말을 해 준 걸로 아는데….”
“죄송합니다.”
“그 죄송할 짓을 왜 계속하는 거지? 내가 이런 업무를 팀장 때부터 미리미리 해 보라고 숙제로 줄 때엔 혼자 머리 싸매고 끙끙 앓아가며 마무리 지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모르는 건 동료 팀장이 됐든, 차장, 부장이 됐든 물어 가면서 미리미리 배우라고 이런 숙제를 주는 거라고요. 모르는 거 물어보는 게 부끄럽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계속 이런 결과물이 내 손에 들어오는 거죠? 한 번쯤은 내가 전 팀장한테 잘했다고… 그렇게 칭찬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 않나?”
“….”
“이거 다시 해 오고, 이번에 폴앤크루 단독 매장 오픈하면서 들어가는 타워 비용 어떻게 산정되고 있는지도 다음에 이거 수정해서 가져올 때 함께 가져오세요.”
“…네.”
“언제까지 할 수 있겠어요?”
“내일 점심까지 정리해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알았어요. 나가 봐요.”
민규는 들고 온 서류 파일을 다시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
그런데 이 친구가 곧바로 나가지 않고,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고 있는 거다.
“왜요? 뭐 할 말 있어요?”
“어제 말입니다.”
“어제? 어제 왜요?”
“어제저녁에….”
“아, 뭐. 답답해 죽겠네. 할 말 있음 얼른 해요. 나 점심때 장 대표님이랑 점심 약속 있어요. 나가 봐야 돼.”
“어제 이 팀장이랑 같이 저녁 드셨다고.”
“근데 왜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제 왜 이 팀장이랑 같이 저녁을 드셨… 그니까 제 말은 이제 이런 거죠. 어제 왜 그 시간까지 회사에 계셨는지… 사실 어제 제가 이 팀장이랑 같이 저녁을….”
“전 팀장.”
“네, 이사님.”
“요즘 제가 너무 젠틀하게만 대해줬다, 그죠?”
“네?”
“나가라고, 이씨….”
난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스마트폰을 재빨리 들어 집어 던지는 시늉을 했고,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한 민규는 재빨리 문을 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사무실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안으로 넣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퇴근 후에는 좀 놔주세요. 이 팀장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뭐라는 거야, 진짜….”
“안 그래도 업무량 많은 사람인데, 그 시간까지 잡고 계시는 건 인간적으로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너 일루 와. 안 되겠다. 들어와, 다시 들어와.”
“제가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그건 진짜 좀 아닌 거 같습니다. 지금이 뭐 쌍팔년도도 아니고, 그 시간까지 사람을 잡아 놓는 건 좀 심하신 거 아닙니까?”
“쌍팔년도에 네가 직장 생활을 해 보기나 했습니까? 밖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들어오라고, 들어와서 이야기해요, 민규 씨. 좋은 말 할 때 들어오세요. 착하죠? 제가 나가서 직접 잡으면 그땐 진짜 대형 사고 터집니다.”
“저 하나로 끝내 주십시오. 제가 다 감수하겠습니다.”
“아, 뭘!”
“뭐든요!”
“하아….”
“그러니까 제발 이 팀장한테까지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제가 다른 건 다 참아도 이 팀장 힘들어하는 모습은 절대 못 참습니다.”
“안 되겠다, 너 오늘 진짜 죽어야겠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재빨리 문을 닫고 사라지는 민규였다.
* * *
모든 업계가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패션 업계에서도 일종의 공식이라는 게 존재한다.
백억, 이백억, 많게는 천억 원대 이상의 대규모 투자를 밀어 넣어서 론칭을 시키는 유명 디자이너의 브랜드들도 절대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공식.
바로 ‘3년의 적자 공식’이라는 거다.
아무리 탄탄한 유통 판을 확보하고 시작한 브랜드라도 이 3년 동안은 무조건 적자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선은 시장에서 인지도라는 걸 만들어야 되고, 그 인지도가 쌓이는 동안 인지도와 함께 쌓인 재고 물량을 처분 혹은 폐기를 하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적자가 발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적자의 폭은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브랜드일수록 더 크게 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보통 대규모 투자를 밀어 넣어서 론칭을 하는 브랜드의 경우는 시작부터 브랜드의 가치를 어느 정도 유지하길 원하는데, 그 브랜드 가치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 위해선 절대 남는 재고들을 덤핑하거나 헐값에 시장에 풀 수가 없기 때문에 재고 처리보다는 폐기 쪽으로 방향을 잡기 때문이다.
대규모 투자를 밀어 넣어서 브랜드를 론칭시킬 경우엔 당연히 브랜드 자체 필살기 모델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필살기 모델이 론칭과 동시에 대박을 터뜨려 줘도 적자는 무조건 난다.
왜?
그 후속타 모델이 반드시 뒤따라와서 대박을 유지시켜 줘야 하니까.
이런저런 복합적이고 다양한 이유로 어쨌든 3년의 적자 시기는 모든 브랜드가 다 안고 가야 하는 초기 리스크인데, 그 리스크가 꼭 마이너스로 작용을 하느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적자 시기를 잘 견뎌내고 콘셉트를 다부지게 잡아 놓은 브랜드일수록 후에 시장의 인정을 받기가 한결 수월해진다는 메리트 역시 존재한다.
그렇게 3년의 적자 시기를 잘 견뎌낸 브랜드들은 그때부터 메이저 매거진 쪽으로부터 러브 콜이라는 걸 받게 된다.
물론 비용은 브랜드 본사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신생 브랜드들은 그런 메이저 매거진 쪽의 러브 콜에 환호를 하고 또 많은 예산을 들여서 그들의 러브 콜에 응하게 된다.
그게 바로 시장에서 형성되는 브랜드의 가치이고 또 가격이 되는 거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들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걸어왔던 폴앤크루.
폴앤크루는 애초에 적자를 막아 가며 성장을 시킨 브랜드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브랜드가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고는 론칭 초기 홍성 내에서도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고.
일종의 게릴라성 프로젝트로 그칠 거라고 모두가 생각했었다.
그래서 초기 적자를 줄이기 위해 홍성이 확보하고 있던 유통 채널을 무기로 시장 가격을 일부러 높게 측정했고, 한정판이라는 콘셉트를 핑계로 생산 물량을 최소화시켜 왔었다.
폴앤크루는 누가 봐도 진행을 하면서 내용이 구체화되고, 또 사이즈가 커진 프로젝트였다.
그러다 작가 컬렉션이라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지고, 그게 적중을 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만약 작가 컬렉션이 불발이 났으면 지금의 폴앤크루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브랜드였다.
작가 컬렉션만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쌓아 올리고 있었던 폴앤크루는 분명 업계에선 이단아 브랜드였고, 그런 이단아 브랜드의 센세이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전문가들 또한 많을 수밖에 없었다.
“콘셉트 자체가 신선해서 지금 반짝하는 거지, 가격대나 모든 걸 종합해서 봤을 때 그렇게 오래갈 브랜드는 아닌 거 같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폴앤크루라는 브랜드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센세이션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 브랜드들이야 워낙에 많았으니까.
하지만 폴앤크루는 달랐다.
폴앤크루엔 폴과 그의 크루들뿐만 아니라 장 대표도 함께 있었으니까.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며 매 시즌마다 시장에 선보이는 한정판 작가 컬렉션들을 조기 완판시키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워나간 폴앤크루.
거기다 그런 기이 현상은 곧 지금껏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수많은 무명작가들에게 시도라는 걸 해 볼 빌미를 꾸준히 제공해 오고 있었다.
폴앤크루 본사 대표이사실.
“이지혜가 이런 아이디어를 만들어서 보내주더라고.”
“네, 저도 대충 어떤 아이디어인지 알고는 있습니다.”
“포인트를 제대로 짚었어. 폴앤크루는 작가 컬렉션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직접 홍보를 해주는 특이한 브랜드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 부분을 우리가 종합해서 하나의 굵직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될 것도 같아.”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상을 우리가 직접 촬영을 한다면 더 많은 손이 가겠지.”
“결정은 대표님이 하시는 거죠. 본사 영업부는 제안만 하는 겁니다. 결정은 폴앤크루의 몫입니다.”
장 대표는 폴앤크루의 콘셉트가 식상해질 만하면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왔다.
그리고 그런 장 대표의 승부사적 기질은 폴앤크루가 매 시즌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일 때마다 업계의 탄성을 자아내며 브랜드 마니아들을 형성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해 왔다.
특히 폴앤크루가 구매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에코백은 폴앤크루만의 패턴이 들어가 있어서 시작부터 좋은 반응을 받아 왔었다.
특히 명품백 구입에 대한 부담이 큰 젊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매 시즌마다 그 에코백의 패턴을 새롭게 변형해서 제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젊은 여성 마니아층에선 그 에코백을 모으는 게 일종의 유행이 되어 버렸고, 급기야 패션 유튜버 중 하나가 지금까지 폴앤크루가 선보인 에코백들을 모두 모아 자신의 채널에서 리뷰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거기다 액자형 옷걸이의 제작은 장 대표가 둔 최고의 신의 한 수 역할을 해 줬다.
“액자형 옷걸이요? 그게 뭡니까?”
처음 장 대표에게 액자형 옷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용어라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장 대표가 웃으면서 처음 들어 보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손 부장이 중국 법인에서 생활할 때 어디서 이런 걸 구해서 가지고 있었나 봐.”
딱 봐도 조잡함이 느껴지는 옷걸이 하나를 내게 건넨 장 대표.
난 아무리 봐도 그 쓰임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리저리 만져 보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 이걸 어디에다 쓰는 건지조차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난 그게 옷걸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맨투맨 티를 여기 이렇게 걸어. 일반 옷걸이에 걸듯이. 그런 다음에 여기 이렇게 길게 내려와 있는 걸 딱!”
“오호….”
“여기 이 부분도 딱.”
“아… 그래서 액자형 옷걸이라고….”
“이거 입힐 때 팽팽하게 잘 당겨 줘야 돼. 그리고 이 밑은 여기 이렇게 버튼을 눌러서 쫘악 당겨 주듯 버클을 채워버리면 끝.”
일반 옷걸이가 시옷 자 모양으로 떨어진다면 장 대표가 내게 보여준 옷걸이는 뒤집어 세워놓은 디귿 자 모양이었다.
그리고 각 봉에는 옷이나 천 같은 걸 고정시킬 수 있는 클립이 붙어 있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이게 처음부터 옷걸이로 나온 게 아니라 소형 이젤 전용 컨버스 고정대라는 이름으로 개발된 아이디어 상품이었다.
나무 각목이 붙어 있는 컨버스는 워낙에 단가가 비싸다 보니, 그 컨버스만 롤로 구입을 해서 이런 저가의 컨버스 고정대에 고정을 시켜서 사용하면 되게끔 만들어진 아이디어 상품.
물론 시장에선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아이템이었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손 부장의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자, 어때? 이렇게 옷을 끼워서 고정을 시킨 다음, 여기 이 고리를 집에 못이나 나사 같은 걸 박은 부분에 딱 걸어 주기만 하면….”
“그냥 그림이네요.”
“원래 그림이었으니까.”
“우와… 이거 제작 단가는 어떻게 합니까?”
“안 비싸. 손 부장 시켜서 알아보니까 만 개 정도 주문을 넣으면 객단가 2달러 안이더라고. 더 오더를 넣으면 단가야 그만큼 더 떨어질 거고… 재질이 조금 조잡하긴 해도, 재질 보완하고 여기 이 부분에 폴앤크루 로고 넣어서 생산해 내면… 하나 2만 원 정도 해도 꽤 많이 나갈 거 같지 않아?”
“차라리 팔지 말고 폴앤크루 자체 포인트 적립 시스템 같은 거 만들어서 몇 포인트 이상 넘어가면 하나씩 선물로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네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이런 브랜드 액세서리가 하나 정도 있으면 어쩌다 재미 삼아 폴앤크루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컬렉션별로 수집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무척 좋을 거 같더라고요. 컬렉션을 수집하는 사람들 중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잖아.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컬렉션을 옷장 안에만 넣어 두는 게 아니라 직접 액자형 옷걸이에 꽂아서 방 안에 걸어 놓고 감상을 할 수도 있을 거고, 자기 집 안에 걸리는 옷걸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또 폴앤크루에 대한 충성도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될 거고 말이지.”
“대박입니다. 이건 지금 당장 저라도 한 몇 개 얻어 가고 싶을 정도네요.”
그렇게 폴앤크루는 업계 다른 브랜드들이 한 번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로 브랜드 인지도를 계속해서 쌓아 나갔다.
그러다 결국 메트로폴리탄, 노블레스, 뉴욕위크와 같은 세계적인 패션 매거진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기 시작했다.
“모델이 뭐가 필요해. 그림 작가가 곧 모델이지.”
장 대표의 고집은 정확했다.
폴앤크루는 모델 홍보를 위한 예산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작가 컬렉션을 홍보하기 위해 해당 작가를 직접 모델로 앉혀서 작가 자체를 홍보해 주는 방향으로 콘셉트를 굳혀 나갔다.
그 어떤 브랜드의 컬렉션들보다 더 스토리가 풍부할 수밖에 없는 모델들.
사람들은 각종 매거진에 실리기 시작한 무명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스토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폴앤크루의 마케팅 전략은 곧 더 많은 무명작가들에게 도전할 용기와 희망을 전달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