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진짜 일 잘하는 사람들은 퇴근도 잘해요
저녁 8시.
퇴근이 늦어진 날이었다.
박 이사 본인이 직접 올린 이사 총괄 퇴임안이 통과가 된 날이었다.
이사회가 열린 날이었던 만큼, 이사회가 끝이 나고 곧바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돌리기로 했던 술잔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결국 오후 업무까지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까지 결재를 해서 내려줘야 하는 서류가 많았기에 결국 난 길었던 점심 식사 이후 박 이사와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땀을 한번 시원하게 빼고 혼자 다시 회사로 복귀를 했다.
어차피 퇴근은 늦은 거 꼼꼼히 확인을 해주자… 하는 마음으로 서류들을 체크해 나갔고, 결국 쌓여 있던 보고서들을 다 확인을 하고 시계를 보니 저녁 8시를 향해 분침이 달려가고 있었다.
“나 이제 다 끝났어. 장모님은?”
-집에 갔지. 저녁은?
“당신은?”
집사람은 승후 저녁을 먹이면서 자기도 함께 먹었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승후 먹이고 남은 밥 같지도 않은 밥을 자기 입에 털어 넣었겠지.
주말마다 집사람을 쉬게 만들고 승후를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회사에서 대형 프로젝트 하나 진행하는 게 애 밥 한 끼 해 먹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애 먹일 밥을 준비하고, 또 그 밥을 먹이는 그 일은 정말이지 전쟁보다 더한 전쟁이었다.
“애는 자?”
-응.
“그럼 난 신경 쓰지 마. 가는 길에 맥도날드 들러서 햄버거 하나 사 먹고 들어갈게. 당신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입맛 없어.
“딸기 좀 사 갈까?”
-보고 싱싱한 거 있음 좀 사 가지고 와. 내일 아침에 승후 먹이게.
뭘 하더라도 승후가 무조건 우선인 집사람이었다.
그렇게 집사람과 통화를 끝내고 늦은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올 때 눈치챘다.
그 넓은 임원 층에 불이 들어와 있는 사무실은 내 사무실이 유일하다는 걸.
하긴, 시간이 8신데, 당연한 거지….
“….”
임원 층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였다.
당연히 지하 주차장이 있는 마이너스 1층만 누르면 되는 거였는데, 이상하게 마이너스 1층 버튼을 눌러놓고 영업 기획부 사무실 층을 다시 누르고 있는 나였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가 영업 기획부 사무실 층에 멈춰 서서 문이 열리는 순간 또 이상한 촉에 의해 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봤다.
내가 타고 내려왔던 엘리베이터는 아무도 싣지 않고 혼자 지하 1층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습관처럼 다시 한번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타닥타닥타닥….
아니나 다를까 캄캄하게 다 불이 꺼져 있는 사무실 저 끝 즈음에 한 섹션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신없이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혼자 불을 밝히고 있는 저 책상의 주인이 얼마나 뭔가에 몰두해 있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난 한 손으로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른 손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음 홍성은 이 팀장 혼자 다 먹여 살리는 줄 알겠다.”
“아, 이사님….”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시간에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그러는 이사님이야말로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난 오후 근무 통째 땡땡이쳤거든요. 이 팀장이 땡땡이를 쳤을 리는 없을 거고… 뭐 하고 있는 거예요?”
“….”
“혹시 내가 지금 방해하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간만에 나랑 커피 한잔 하든가.”
머릿속에선 집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야근이라는 게 없어진 홍성 영업부 사무실에서 이 시간까지 혼자 남아 내가 근처까지 온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잔업을 하고 있는 이지혜를 보자니 절대 그냥 혼자서만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아냐, 아냐… 앉아서 하던 일 해요. 내가 가져올게요. 간만에 내 커피 내가 한번 내려 보게. 이 팀장도… 아이고, 이 팀장은 커피 그만 마셔야겠다.”
이지혜의 책상 위로 올라가 있는 여러 빈 커피 캔들을 보며 난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은 먹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
“거의 다 끝났습니다. 끝내놓고 퇴근하는 길에 먹으려고요.”
“나도 아직 저녁 전인데… 혹시 저녁 약속 있어요?”
“…아뇨.”
“있으면 있다고 말해요. 괜히 나 눈치 없는 사람 만들지 말고. 나도 집사람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진짜 없습니다.”
“괜히 있으면서 없다고 하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얼마나 걸려요? 그거 다 끝내는 데.”
“내일 해도 되는 겁니다.”
“…?”
“바로 퇴근 준비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회사 근처 국밥집에서 이지혜에게 국밥 한 그릇을 사 주며 물어봤다.
“내일 해도 되는 일을… 왜 이 시간까지 붙잡고 있었어요? 그것도 혼자 회사에 남아서….”
“폴앤크루 국내 유통 관련해서 폴앤크루 본사 측에게 제안할 내용이 좀 있어서요.”
“…?”
“폴앤크루 작가 컬렉션을 통해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작가들이 하나둘씩 자기네 블로그나 개인 SNS, 그리고 개인 방송 같은 곳에서 폴앤크루를 홍보해 주고 있잖아요. 국내 작가들뿐만 아니라, 폴앤크루 작가전에 참여를 했던 해외의 많은 작가들도 자발적으로 그런 브랜드 홍보에 앞장서고 있고.”
“흐음….”
“그 덕에 그림에 대해 잘 모르던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림이라는 문턱이 한층 낮아진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제 그런 산발적인 홍보들을 하나의 강력한 마케팅으로 적용시키는 힘이 부족한 거 같았습니다. 이 부분을 잘 엮기만 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 효과적인 마케팅을 해 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
“가령 예를 들어 작년에 폴앤크루 쪽으로 자기 제자들의 작품을 추천해 준 시립대 교수 기억나시죠? 거기서 꽤 감각 있는 컬렉션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
“아무튼 그 교수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1인 방송 채널도 인지도가 꽤 높거든요. 그런데 그 교수님 채널을 잘 보면 영상 화면 배경에 폴앤크루 맨투맨을 그냥 벽에다가 펼쳐서 붙여 놓고 그걸 인테리어처럼 활용을 하고 있어요.”
“….”
“물론 이게 저처럼 유심히 본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거겠지만,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폴앤크루 자체가 꽤 괜찮은 인테리어 소품이 될 수도 있겠다… 감각이 있더라고요. 그림 액자 대신 자기 제자들 작품으로 만든 컬렉션을 방 한곳에 그림을 전시하듯 걸어 놨던데, 왜 저런 아이디어를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지나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이번에 로즈마리부터 시작해 저희가 협찬을 넣어주는 패션 가이드 채널 운영자들한테 그 비슷한 방법으로 딱 영상에 나올 만한 공간만큼의 촬영장 세트장 인테리어를 제공해 주는 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내 봤는데, 다행히 부장님께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한번 진행해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국 식어요.”
“네?”
“국 식는다고.”
“아, 네….”
“괜찮은 아이디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근무 시간에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에요?”
“…네?”
“아이디어야 뭐 언제 툭 하고 튀어나올지 모르는 영역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정리하는 업무는 근무 시간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런 아이디어가 올라왔으면 어디 스마트폰 메모장 같은 데 따로 적어 놨다가 내일 출근해서 매달려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참 보기는 좋은데, 그 열심히라는 세 글자가 가지고 있는 진짜 뜻이 뭔지를 잘 한번 생각해 가면서 일을 해 줬음 좋겠어요.”
“….”
“오늘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우리들이. 탕! 하는 순간 젖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 내면서 달려야 하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란 말이지. 빨리 간다고 금메달 따는 게임이 아닙니다, 직장 생활은.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이 팀장이랑 오래가고 싶어요. 이 팀장이 홍성에서 롱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단 말이지. 그런데 이런 식이면 롱런이 힘들어요.”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지금 당장은 괜찮을 수 있어. 지금 당장은 일하는 거 자체가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되고 설레고…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한결같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게 함정 아니겠어?”
“….”
“꼴랑 7천 원짜리 국밥 한 그릇 사 주면서 잔소리가 길어질 거 같아 미리 좀 미안한데… 이 팀장.”
“네, 이사님.”
“진짜 일 잘하는 사람들은 퇴근도 잘해요.”
“…!”
“아니, 퇴근까지 잘해요. 퇴근까지가 업무의 영역인 거야. 어쩌다 일이 많아져서 퇴근이 조금 늦어질 수도 있지.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칼같이 딱딱 모든 걸 다 맞출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어요. 8시가 넘었잖아. 그때까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지금 당장 안 해도 되는 업무를 붙잡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음 그건 정도가 지나친 게 맞죠?”
“…네.”
“내가 지금 이 팀장을 보면서 걱정이 되는 건… 오늘 내가 봤던 모습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이 팀장의 업무 스타일로 굳어질까 봐, 그런 업무 스타일이 이 팀장의 삶을 지배해 버릴까 봐… 그게 걱정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랬거든.”
“…!”
“남들이 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 남들이 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오래 하자. 남들이 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많이 하자… 그렇게만 하면 분명 노력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분명 이 팀장 시절 땐 그렇게 일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 마인드로 일을 하다 보니까 언젠가부터 지치더라고. 나만 그렇게 일을 하는 거 같고, 그렇게 하는데도 아무도 안 알아주는 거 같고… 결국 나 자신이 날 슬럼프로 밀어 넣는 결과를 가져오더라고. 일이 한창 재미가 있을 때라 내가 이런 말을 해 줘도 잘 실감도 안 날 거고, 와닿지도 않겠지만, 지금 이 팀장 정도면 일 중독이라고 봐도 될 거 같아요.”
“…!”
“원래 그래. 뭐든 그래. 너무 지나치게 마음을 쏟고, 에너지를 불태운 사람들이 그만큼 열정도 빨리 식어버리는 법이거든. 내가 현장에 있을 때 우리 이 팀장한테 이것저것 많은 걸 가르쳐 준다고 가르쳐 줬는데, 정작 퇴근을 잘하는 법은 못 가르쳐 줬네. 그건 사실 나도 잘 못 했던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좀 어떻게 하는지 알겠어. 진짜 퇴근을 하세요, 이 팀장. 완전한 퇴근.”
“…?”
“집안일 회사로 가지고 오는 거 아니죠? 반대로 회사 일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아니에요. 퇴근하고 컴퓨터 모니터 끌 때 회사 일에 관한 모든 걱정, 불안도 함께 끄는 거야. 물론 쉽지 않지. 처음엔 그걸 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다 보면 돼.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안 되는 게 어딨나. 회사에서 먼저 급한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진 그냥 다 잊어. 분명 내일은 또 내일의 스트레스가 생기겠죠? 그런데 그 스트레스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고 퇴근 후에도 계속 회사 일을 생각하면… 지혜 씨 삶이 없어져. 불안해하고 걱정을 한다고 올 스트레스가 안 오는 게 아니잖아요. 진짜 회사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건 그런 업무에 대한 불안이나 스트레스가 아니에요. 그런 불안과 스트레스를 견뎌낼 배짱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런 배짱은… 지금 이 팀장이 하는 것처럼 하면 절대 안 생겨요.”
“…!”
“그러니까 퇴근합시다, 진짜 퇴근.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오래, 더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기분 좋게, 편안하게, 그리고 더 꾸준히 하는 게 정답이에요.”
“사실….”
“…?”
“이사님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회사 내에 돌고 있는 제 소문 때문에… 어떻게든 그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요.”
“남들이 뭔데 지혜 씨의 삶을 지혜 씨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증명을 하기 위해 이런 미련한 짓을 한단 말이에요?”
“그냥 저만 도마 위로 올라가서 난도질을 당하는 거라면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하지만….”
“이 팀장이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들은 이 팀장이나 이 팀장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큰 관심이 없어요.”
“…!”
“꼭 그런 사람들이 한둘씩은 있어요, 어느 조직을 가나. 그런데 그런 별난 몇몇 사람들이 그 집단의 전부라고 생각해선 절대 안 돼요. 말없이 가만히 뒤에서 이 팀장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상무님이나 저도 그중 한 사람들이고.”
“…!”
“왜 그렇게 놀라요?”
“사, 상무님도 알고 계세요?”
“왜 모르겠어요, 다 알지. 상무님이 어디 회사 나와서 일이나 하시는 줄 알아요? 일은 내가 다 해. 나 혼자 다 하는 거 같아. 젠장…”
“푸훕….”
“아놔, 또 이야기하다 보니까 열받네. 아무튼 안 그렇게 생기셔서 그런 가십거리 완전 좋아하세요. 나한테 막 물어보시더라고. 이 팀장 어떤 사람이냐, 사람은 괜찮냐, 민규랑 잘 어울릴 거 같냐… 그런데 상무님처럼 그렇게 뒤에서 응원만 하는 사람들은 원래 말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응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
“왜 남을 위해, 남들의 인정을 위해 지혜 씨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거예요? 벌써 9시다. 이 시간이면 제때 퇴근했으면 전 이 팀장이랑 영화를 봤어도 한 편은 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