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차례대로 무너뜨리면 되겠네요
우리 홍성이 위기에 몰린 CGM을 간신히 숨통만 붙어 있게 만들어놓고 농락을 했다라….
강 팀장이 프레젠테이션 자리에서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내 사무실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하 실장에게는 ‘회의실에 커피는 준비를 안 해놨던데?’라는 말로 출근을 하자마자 사무실이 아닌 회의실로 날 밀어 넣은 그녀에게 농담을 던졌다.
“지금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하 실장이 나가고 난 뒤 재킷을 벗어 걸어 놓고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난 5년 생활을 되돌아봤다.
아직 롯데 측과의 미팅까지는 시간이 남았다고 하니 그만큼의 여유는 있는 셈이었다.
강 팀장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니, 강 팀장 세대의 홍성맨들은 그렇게 또 앞 세대 홍성맨들이 치른 전쟁에 조미료를 섞어 자기들 입맛에 맞는 먹음직스러운 전설로 만들어 그 전설을 보고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홍성이 CGM을 농락했던 게 아니라 CGM의 숨통이 예상외로 질겼던 거였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떨 땐 그냥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그냥 신경을 끄고 일만 하자… 하는 자기변명이 샘솟을 만큼 지지부진한 결과의 연속이기도 했고.
폭스타운을 놓친 CGM이었지만, 그래도 CGM은 CGM이었다.
폭스타운과 결별을 하고 루가노에서 완벽하게 철수를 한 CGM.
하지만 그들이 오랜 세월 확보하고 있던 유통망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쉽사리 무너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배수의 진을 치고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홍성에게 전면전을 선포한 CGM의 기세는 비록 불안해 보였지만, 반대로 잃을 게 더 많아진 홍성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대폭 다이어트해서, 자기네 능력으로 확실하게 밀어줄 수 있는 우호적인 브랜드들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그들의 전략은 제법 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아무리 세대교체에 실패를 했고, 또 자체적으로 경영 승계권 문제로 내부가 흔들린다고는 하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CGM의 저력은 괜히 CGM이란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즉각적이고 공격적인 대응으로 돌변했었다.
결국 사업이라는 건 승패가 확실하게 갈리는 스포츠 게임이 아니다 보니 양쪽 모두가 이득을 볼 수도 있지만, 또 반대로 의미 없는 신경전이 길게 이어지면 양쪽 모두가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는 법.
그 부분에 대해 당시 사장님이셨던 고문님은 CGM 건에 관해선 전권을 내게 위임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수시로 날 따로 불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부분을 꾸준히 상기시켜 주셨다.
“왜 사람들이 그런 말 하잖아.”
“어떤….”
“난 뭐 더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당시 사장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런데 내가 지금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님 그런 말 자체가 말장난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더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사실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돼. 왜? 다 잃었으니까. 얼마나 간수를 잘 못 했으면 다 잃었겠어? 이미 다 잃은 사람들이야. 자기들이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게 없다고 협박을 해도 그건 말 그대로 허세지 딱히 실질적인 내용은 아니잖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데 말이야, 공 이사.”
“네, 사장님.”
“지금 CGM처럼 모든 걸 다 잃기 직전의 사람들은 정말 조심해야 돼. 이게 자칫 물귀신 작전을 쓸 수가 있거든. 땅에 떨어져서 내가 못 먹게 된 감 남이 주워 먹기 전에 밟아서 짓이겨 버리자… 이런 심보가 발생을 할 수가 있단 말이야. 거기다 그 감을 땅에 떨어지게 만든 상대가 그 감을 주워갈 거 같은 공 이사 자네라면 어떻게 할 거 같아?”
“….”
“적당히. 이만하면 충분해. 어차피 CGM은 여기서 다시 예전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모든 루트가 다 차단된 상태야. 다 막혀버렸다고. 쥐도 도망갈 구멍은 줘 가며 쫓으라고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 또 이만큼 콱 물어 줬음 앞으로 우리 홍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업계 사람들한테 제대로 잘 보여줬다고 난 생각해. 그러니까…이젠 조금 나이브하게 상대해 주자.”
“…네.”
물론 대답만 그렇게 했지 속으로는 언제든 기회만 오면 이번엔 허벅살이 아니라 CGM의 숨통을 제대로 콱 물어서 그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흔들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사장님의 염려와 지적은 너무나 정확했기에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다, 홍성의 견제가 느슨해지는 순간 CGM의 역공이 시작됐던 거다.
오프라인 쪽 유통에서 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CGM은 자체적으로 기업을 분리시키더니 그 분리 효과로 그동안 골칫거리였던 세대교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어설픈 안목과 설익은 실행력은 곧바로 우리 홍성에게 덜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버렸고.
“고마운 한 수군요, 우리 입장에선.”
“…네?”
당시 아이작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신 사장으로부터 해당 변화를 전해 듣는 순간 드디어 그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는 확신이 섰다.
당시 CGM은 폭스타운과 헤어지면서 많은 브랜드들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랜드라는 게 그렇다.
언제든 파트너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애들이 바로 브랜드 본사 측 애들이다.
지금 당장 쓸만한 브랜드 몇 개 놓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CGM의 영원한 아웃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업계에서의 CGM 이미지는 원래부터 별로였기에 그저 CGM이 CGM 했다는 식의 평가만 새로 돌기 시작할 뿐, 그런 이미지 타격에 흔들릴 만큼 상대는 얼굴이 얇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직격탄은 바로 자기네들끼리 진행한 기업 분리였다.
몸통 하나를 두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양팔로 써야 재고 처리 부분이라든지, 혹은 브랜드 섭외 부분에서 균형이라는 걸 맞출 수가 있는 건데, 이쪽 CGM 애들은 그 안에서도 자기네 밥그릇 싸움을 한다고 몸통을 아예 둘로 나눠버린 거다.
멍청한 거지.
“하나씩 차례대로 무너뜨리면 되겠네요.”
“…!”
“한 번에 나가리를 시키기엔 어중간한 사이즈였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그 사이즈를 절반으로 쪼개 놨군요. 오프라인 사업이라고 해 봤자 현재 CGM이 믿는 구석은 스위스 안에 들어가 있는 그리덜 플렉스 샵밖에 더 있습니까?”
그랬다.
옐로 폭스, 킹스, 그리덜 이 세 플렉스 샵 중 옐로 폭스는 그전까지는 CGM이 직접 컨트롤을 했으나 따지고 보면 폭스타운 산하의 플렉스 샵 브랜드였고, 킹스는 이미 CGM과 폭스타운이 헤어지면서 홍성 타워를 통해 홍성의 물건을 받는 쪽으로 계약을 끝낸 상태였다.
CGM 직하 플렉스 샵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그리덜 하나뿐인데, 그걸 못 잡을까 싶었다.
차라리 CGM은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 그리덜을 끝까지 끌고 가면서 그리덜이라는 브랜드로 온라인 사업에 뛰어드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거다.
그랬음 최소한 스위스 안에서만큼은 자기들끼지 부족함 없이 기업을 운영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그리덜이라는 안전 막이 자신들이 가진 최후의 보루였다는 것도 모르고, 그리덜 플렉스 샵 브랜드를 그대로 놔두고 CGM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자기들이 아무리 가격 경쟁에 자신이 있고, 또 집중을 할 계획이었더라도 이건 시작부터 한계가 뚜렷한 도전이었다.
왜?
잘되는 꼴을 내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였으니까.
CGM 무너뜨리기라는 목표가 그리덜 잡기라는 목표로 일시적이나마 축소,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리덜을 잡는 건 사실 일도 아니었다.
상대의 수로 인해 그동안 생각해 내지 못했던 방법이 생겨나는 순간.
어차피 인터라켄과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에 들어가 기존의 플렉스 샵들을 전멸시키다시피 하고 있던 홍성 타워.
그 홍성 타워의 축소판을 그리덜이 들어가 있는 지역에 오픈시켜 버리면 되는 거였다.
인터라켄이나 반호프슈트라세 지점처럼 건물을 따로 매입할 필요도 없었고, 그 정도 규모일 이유도 없었다.
그저 홍성 타워가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 종류와 콘셉트만 유지해 주면 되는 거였다.
따로 스타벅스를 넣을 필요성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조건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리덜이 들어가 있는 하프하우젠이나 루체른, 그리고 제네바에 오픈하게 될 홍성 타워는 무조건 동시에 오픈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것도 상대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기습적으로.
그 세 군데 포인트에 그리덜을 아웃시킬 만한 완벽한 자리를 알아보고, 동시에 인테리어 공사를 끝내기까지 딱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1년 뒤 하프하우젠, 루체른, 제네바 세 곳에 동시에 홍성 타워를 오픈시키는 순간 그리덜 쪽에서 홍성 본사 쪽으로 쉽게 말해 살려달라는 식으로 연락이 왔다.
-그동안 홍성 인터내셔널과 CGM이 가지고 있던 오해를 풀고 앞으로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제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서 지난 일들을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쪽 대표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입장에 난 이렇게 대답했다.
“타이밍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홍성은 그 타이밍이라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입니다. 사과에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을 것이고, 오해를 풀기 위한 타이밍도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귀사는 홍성이 여러 번 기회를 제공을 했음에도 번번이 그 타이밍을 놓치더군요. 타이밍을 놓치시는 그 모습에 귀사에 대한 모든 신뢰가 깨어졌습니다.”
-…!
“그리고 사과라는 건 피해를 준 쪽이 피해를 받은 쪽에게 하는 거죠. 홍성은 이번에 홍성과 CGM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 사고 과정의 최대 수혜자입니다. 저희가 귀사의 사과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해는 저희가 알아서 풀도록 하겠습니다. 직접 먼 걸음 하시면서까지 한국에 오실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바로 그때부터였다.
홍성이 온라인 마켓 쪽으로 새로운 영업부서를 조직하고 집중을 하기 시작한 게.
혹자가 내게 물었다.
홍성이 온라인 마켓 쪽으로 집중을 시작하는 이유가 CGM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냐고.
“씨를 말린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너무 저렴했습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직관적인 표현… 나쁘지 않아요. 하하하… 영업하는 사람이 빙빙 돌아가는 화술을 쓰는 거보단 그런 직관적인 표현을 쓰는 게 한결 더 솔직해 보이고 좋네. 그리고 맞아요.”
“…?”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였는데, 씨를 말린다는 정확한 표현이 있다는 걸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 CGM… 씨를 말려버릴 겁니다.”
“그런데 이사님.”
“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CGM이랑 원수졌냐고 물어보려 했죠?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그게 궁금한 눈친데?”
“….”
“스트레스 푸는 중이에요.”
“네?”
“스트레스 푸는 중이라고. 나도 어디 한 군데 스트레스 풀 곳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도 되겠더라고.”
“….”
“CGM… 그 새끼들이라면 내가 죄책감 같은 거 안 가지고 마음 놓고 처발라 버려도 될 거 같더라고. 착한 기업, 착한 기업 하지만, 우리가 어디 사회적 기업도 아니고 어떻게 모두에게 다 착할 수가 있겠어요? 거기다 회사에 돈까지 벌어다 주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인데, 이걸 내가 놓칠 이유가 없잖아요.”
“정말 그 이유 때문입니까?”
“세상엔… 때론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걸 내가 할 때엔 그 뒤에 다른 목적도 있는 것처럼 꾸밀 줄도 알아야겠죠. 그래야 보는 사람들이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지켜볼 테니. 결과는 뭐 별거 없어. 다들 알아. 다들 과정이 궁금할 뿐이지. 그리고 결과는 승자가 포장하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린 적보단 지지층이 많고, 상대는 지지층보다는 적이 많은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위성을 갖춘 공격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