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버텨라, 견뎌라…
“아침부터 임원들을 다 이렇게 불러모았으면 당연히 긴장을 해야지. 한번 들어 봅시다, 뭐 얼마나 대단한 프로젝트길래 회장님 장례 일정 끝나고 처음 받게 되는 보고인지.”
“…!”
딱 보면 안다.
대충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이 친구가 될 만한 친구인가, 아님 그저 스쳐 지나갈 맨파워 중 한 명에 불과할까… 하는 정도는.
강 팀장.
하 실장으로부터 아이티 영업부의 강 팀장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이름까지는 아니었지만 얼굴 정도는 바로 기억이 날 정도로 어느 정도 인상 깊게 보고 있던 친구였다.
그리고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자신에게 집중되는 임원들의 눈빛을 견뎌내는 모습만 봐도, 대충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할지 정도는 눈에 보인다.
이 정도 강단이 있는 친구라면 그 배짱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고의로 압박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무의 압박을 견뎌낼 배짱만 있다면 프로젝트의 핵심 내용과는 상관없이 진행을 허락해 줄 수가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해낼 테니.
그리고 그런 사소한 성공 하나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습관을 만들어 줄 거니까.
성공은 습관이었다.
난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난 운이 좋아서 내게 성공하는 습관을 길러 줄 상사들을 잘 만났기 때문에, 그래서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쳐낼 때마다 그 습관의 관성 때문에 계속해서 프로젝트들을 띄울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난 확신을 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의 본래 취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프로젝트의 핵심 브랜드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 프로젝트를 차고 나갈 담당자가 성공이라는 벽을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또 그 벽을 넘어서는 것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만 파악하면 된다는 걸.
“아이티 영업부 강재준입니다.”
강 팀장은 연단 앞으로 나와 임원진들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인 후, 다시 연단 뒤로 섰다.
모두가 발표자가 화면에 띄운 프레젠테이션 발표 제목에 시선을 집중시킬 때에도 난 최대한 거만하게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회의 의자 깊숙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강 팀장의 자세와 시선, 그리고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어떻게든 나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그의 눈빛은 벌써부터 발표에 대한 겁을 집어먹고 있는 듯했다.
그의 초점은 스크린을 훑었다가 다른 임원들의 표정을 확인한 후, 내 눈과 마주하는 순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이번 아이티 영업부에서 준비한 신개념 온라인 마켓 채널에 관한….”
“아이티 영업부에서 준비한 거 다 알고 있어요.”
난 차갑게 강 팀장의 말을 잘랐다.
그 순간 회의실 안엔 정적이 찾아들었고, 강 팀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자기 부장인 박기태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프로젝트를 소개하러 나온 거예요, 아님 아이티 영업부를 홍보하러 온 거예요? 아이티 영업부라는 말이 왜 그렇게 많이 나와요? 필요 없는 내용이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버텨라, 견뎌라… 그렇게 버티고 견디며 어떻게든 내가 보내는 압박을 뚫고 나와라… 하는 말을 속으로 하며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강 팀장을 압박했다.
“현재 온라인 마켓 쪽으로 많은 유통 판들이 유통 방향을 새롭게 가져가면서, 실질적인 오프라인 매장들은 일종의 이미지샵 개념으로 그 역할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고대 문헌에 이런 내용이 있대요.”
난 다시 강 팀장의 발표를 잘랐다.
“나도 정확하게 기억은 못 하는데 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문헌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시절에도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하네요.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
“…!”
“유통 판들이 유통 방향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내용은 지금에 와서 새롭게 짜지는 유통 형태가 아니라, 내가 처음 홍성에 입사할 때부터 줄곧 있어 왔던 이슈란 말이죠. 그걸 왜 지금에 와서 시작된 이슈인 것처럼 심각하게 이야기를 해요?”
“….”
“계속해요.”
버텨라, 견뎌라…. 그리고 내가 그 어떤 퍽퍽한 상황을 네게 던져주더라도 시원하게 뚫고 나와 봐라.
내가 주는 압박에 흥분을 해도 좋다.
아니 흥분을 해라.
흥분한다고 지는 게 아니다.
진짜 지는 건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해야 할 말 한마디 속 시원하게 못 쏴 주고 어영부영 프레젠테이션을 끝내는 거다.
그 어떤 흥분이라도 괜찮으니까 흥분해라.
그게 바로 영업맨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기질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할 말은 다 끝내고 나가겠다는 배짱, 그런 기질을 보고 싶은 거지, 프로젝트의 내용이 궁금한 게 아니다.
내가 어디 이 자리까지 고스톱 쳐서 올라왔겠나.
네가 하는 사업 생각 정도는 이미 충분히 내가 먼저 다 해 봤다.
그러니 더 새로울 것도, 획기적일 것도 없다.
다만 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임원들은 당신 같은 젊은 친구들의 열정과 흥분, 그리고 맹수들의 그것과 같은 눈빛을 발견하고 싶을 뿐이다.
“후우….”
비록 고개를 돌리고 마이크를 가린 채 흘리는 한숨이었지만, 강 팀장이 흘리고 있는 한숨 소리가 내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5년 전 전무님께서 CGM을 위기로 몰아넣으시고, 폭스타운의 발을 묶어 버리며 홍성의 위상을 한층 더 높게 끌어 올리고 계실 당시 처음 홍성에 입사를 했습니다.”
“….”
강 팀장의 눈빛 역시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난 회의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렸다.
그리고 깍지를 끼고 그 위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앞으로 홍성은 더 이상의 오프라인 매장 확장 없이 온라인 쪽 유통으로 방향을 집중하게 될 거란 이야기에 과연 그게 가능한 소리일까… 하는 의심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홍성은 지난 5년간 위기에 몰린 CGM을 농락하듯 간신히 숨만 붙어 있게 만들어 놓고, CGM이 진출하려는 길목마다 먼저 들어가서 철저하게 막아내며, 그 외 오프라인 매장 확장은 하지 않고 온라인 마켓 채널 시스템 확보에 집중해 나갔습니다.”
“….”
“그리고 마침내 CGM이 오프라인 벤더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온라인 유통 쪽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국내 대형 유통 판들과 손을 잡고 국내외 면세점 쪽으로 만토바, 링겐의 물건을 유통시키기 시작했죠. 그 결과 홍성은 국내를 넘어 만토바 다음으로 세계 2위 명품 유통 기업으로 올라섰습니다.”
우연일까.
강 팀장이 자신의 페이스를 잡아가는 순간 양 이사와 눈이 마주쳤다.
양 이사가 싱긋이 웃는 모습에 나 역시 함께 입꼬리를 말아 올려놓고 다시 표정을 굳혀 날 도발하듯 노려보는 강 팀장의 눈빛을 상대해줬다.
“그런데 문제는 덩치는 커졌지만 그만한 내실이 따라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실이 따라오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 적자 운영을 하고 있단 소리로 들리네요?”
“아뇨, 지금처럼 계속 가성비가 떨어지는 작전을 펼치다 보면, 결국 홍성은 만토바와 링겐 쪽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꼴이 될 거란 말입니다.”
“만토바와 링겐 쪽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꼴이라….”
“지난 몇 년 전부터 만토바는 그저 홍성이 확보한 유통 채널 쪽으로 들어갈 물량을 선독점해 놓은 상태에서 홍성이 던지는 오더를 쳐내는 역할만 해왔습니다. 예전처럼 재고를 떠안아 가며, 그 재고를 가지고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들에게 영업을 해 오지 않았단 말이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숫자 놀이만 하고 있고, 정작 창고 관리부터 시작해서 해외 컨트롤 기업들 상대로 펼치는 영업은 홍성의 역할이 당연시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만토바를 상대로 승부수를 띄우자… 뭐 그런 말입니까?”
“아닙니다. 승부라니요. 만토바는 홍성의 가장 오래되고 가까운 파트너죠. 물론 만토바도 홍성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 팀장이 던진 무리수에 임원진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흥미로웠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지, 홍성과 만토바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자면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니까.
“다만 앞으로는 우리 홍성도 만토바가 영악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사업 모델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업계 최대 공룡을 영악하다고 표현하니까 어딘가 모르게…. 시원하네요. 하하하.”
내가 던진 농담에 굳어 있던 임원진들의 표정도 잠시 누그러졌다.
“만토바의 재고… 더 이상 홍성이 다 떠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홍성이 이런 입장을 만토바 쪽에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업 모델이라면 만토바도 이해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다음 강 팀장은 컨트롤러를 이용해 스크린 화면을 바꾸었다.
“물류의 중심에 홍성이 있습니다. 기존 만토바를 중심에 두고 그걸 일차적으로 홍성이 다 받아서 해외 컨트롤 기업 쪽으로 풀었던 구도에서 만토바를 지워버리는 거죠.”
“…!”
“물론 만토바가 베이스입니다. 여기 이 구도는 어디까지나 해외 컨트롤 업체들의 입장에서 보기 쉽게 그린 구도라는 점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존처럼 홍성이 대량의 물량을 만토바, 링겐 측으로 미리 확보를 해 놓고, 확보된 물량을 해외 컨트롤 기업 쪽으로 푸는 방식이 아닌, 이런 온라인 마켓 시스템으로 신상품, 이월 재고 카테고리를 따로 나누고 먼저 그 제품들의 이미지를 따내는 겁니다.”
“흐음….”
“그런 다음 그 이미지들을 만토바, 링겐 측의 동의를 구해 해외 컨트롤 업체 측으로 일종의 오더 시트를 만들어 보내는 거죠. 그럼 그쪽에서 자기네 능력 범위 내에서 오더 물량을 찍어 저희 쪽으로 보내올 겁니다. 그럼 홍성은 중간에서 그 오더 시트를 만토바나 링겐 쪽으로 보내주기만 하면 됩니다.”
“일종의 사입 장사를 하는 개인 사업자들이 브랜드 측으로부터 물량을 확보하는 방식이네요.”
“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사실입니다. 일단 이렇게 온라인 마켓 시스템을 갖추면 일차적으로 홍성의 창고 유지에 많은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감한 비용을 만토바 쪽으로 보낼 맨파워 인건비로 일부 잡게 되면 만토바는 만토바대로 공짜 맨파워가 생기는 거고, 홍성은 홍성대로 자체 창고 소비 없이 현지에서 바로 해외 컨트롤 업체들 쪽으로 홍성의 브랜드 로고가 들어간 박스로 컨테이너 작업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관세 부분은요? 다른 국가는 모르겠지만, 중국 같은 경우 브랜드 본사나 만토바가 홍성을 통하는 이유가 바로 관세 절감 때문인데, 본진에서 바로 물건을 쏘게 되면 그 부분에 대한 로스를 피할 수 없을 거 같은데….”
“그렇다고 인천 창고를 아예 놀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 고용 부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다음 장을 보시면 이렇게 정리를 해봤습니다.”
난 그저 속으로 웃기만 했다.
어떤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전혀 몰랐던 내용, 미처 내가 놓치고 있었던 내용이었던 것처럼 가끔씩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강 팀장의 발표에 응원을 보내주었고, 그렇게 프레젠테이션이 끝이 난 후 모두가 다 있는 앞에서 박기태를 불렀다.
“그럼 발표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박 부장님.”
“네, 전무님.”
“박 부장님은 잠시 저 좀 보죠.”
내가 대회의실을 빠져나오자 그 옆으로 양 이사가 따라붙었고, 박기태가 급하게 뛰어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난 그런 박기태에게 지갑에서 꺼낸 카드를 건넸다.
“이건 왜…”
“강 팀장한테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하면서 회식이나 한번 하라고 해요.”
“아, 네. 발표 내용은 어떠셨습니까?”
“내용이 중요하나, 어디. 사람이 중요하지. 비싼 거 먹으라고 해요, 최대한 비싼 거. 나중에 뭐 먹었는지 확인해 보고 어설픈 거 먹었음 다음부터 아이티 영업부는 내 카드 못 받을 줄 알라고 하면서.”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하더라도 강 팀장한테 이 말 꼭 전달해 줘요. 내가 했다는 말은 하지 말고.”
“무슨….”
“오늘 최고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