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14화 (314/325)

#314

긴장해요, 긴장하라고 하는 말이니까

“참 유별나게 사랑한다, 진짜….”

나란히 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민규와 이지혜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안 이사가 말했다.

안 이사는 마치 날을 잡은 사람처럼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옮겨 다니며 술잔을 기울였고, 결국 대부분의 테이블을 초토화시켜 놓고 우리 테이블로 돌아온 상태였다.

안 이사가 마시고 있는 게 지금 술인지, 물인지 보는 내 입장에서도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거침없이 입안으로 소주 한 잔을 깔끔하게 털어 넣은 안 이사.

“쟤네들은 남들 다 눈치채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만 자기들이 회사 사람들 몰래 사내 연애 하고 있다고 믿을 때부터 저랬어.”

“놔둬라. 보기 좋구만.”

양 이사가 마치 대리만족을 하듯 흐뭇하게 민규, 이지혜 부부를 쳐다보며 말을 할 때였다.

안 이사는 장난기가 발동할 때마다 짓는 특유의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한 몇 달 떨어져 있다가 만난 줄 알겠네. 이 부장 출장이었다면서? 파견근무가 아니라….”

“크흠….”

“비밀 사내 연애 할 때부터 남들은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자기들끼리만 심각해서 난리 브루스를 추더니, 결혼 이야기 나올 때도 그래. 무슨 드라마 찍어? 회장님, 사모님 싹 다 쉽게 쉽게 허락하셨잖아. 근데 무슨 놈의 파리의 연인을 찍는 것도 아니고… 민규 저거 저 정도면 병이야, 병. 자기가 무슨 주말 연속극 주인공인 줄 알아. 막 그런 거 있잖아. 재벌 2세의 백마 탄 왕자님 역할.”

“크크큭….”

가급적이면 안 웃으려고 했는데, 안 이사가 하는 말에 틀린 말도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생각을 하니 또 그런 것도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니, 이 부장 쟤도 그래. 아까 거기서 왜 안아, 안기를… 오늘 여기 주인공은 누가 봐도 돌아가신 회장님인데, 순간 주인공이 저 두 사람으로 바뀐 줄.”

“아, 그만 좀… 취했어?”

“설마… 나 이제 시작인데?”

핀잔을 주는 양 이사의 잔에 술을 채워 놓고 안 이사는 같이 한잔하자는 식으로 자신의 술잔을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무님, 다녀왔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어디세요?”

-주차장입니다.

“들어오세요. 대웅 씨도 들어오셔서 회장님께 인사드리셔야죠.”

잠시 뒤 대웅 씨는 부모님 수선 가게에서 쓰는 비닐 가방에 돌아가신 회장님의 오래된 구두를 담아 빈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 비닐 가방을 건네받고 대웅 씨가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는 동안 수선된 신발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 아버지셨다.

내일모레 80을 바라보시는 분이 이렇게 눈이 꼼꼼하고 손이 야무지실 수가 있을까.

철없던 시절, 아니, 철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을 아주 어린 시절의 난 귀가 잘 안 들리시는 아버지를 남들 몰래 부끄럽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또 누군가의 아버지가 직접 되어 보니 내 아버지는 이 세상 그 어떤 아버지보다 아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분이셨고, 또 대단한 분이셨다.

그걸 내가 몰랐다.

그 연세까지 하루 소주 반병은 무조건 드셔야 하고, 그럼에도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으시는 우리 아버지.

그 정도 연세가 드시면 남들은 매일같이 병원을 다니신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수선집을 매일같이 나가셔서 손님들의 추억이 담긴 낡은 명품들을 새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계신다.

“뭡니까, 그건?”

“회장님 좋은 곳 가실 때 신고 가실 신발입니다.”

“…?”

대웅 씨의 조문이 끝날 타이밍만 보고 있다가 대웅 씨가 사장님과 맞절을 하려고 몸을 돌릴 즈음 회장님의 신발이 든 비닐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막 대웅 씨가 신발을 신기 시작할 때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이거….”

“뭔가요?”

“오늘 아침에….”

“아….”

사장님은 재빨리 비닐 가방에서 회장님의 신발을 꺼냈다.

그리고 사장님은 옆에서 그 신발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자신의 어머니께 회장님의 신발을 전달하셨다.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던 큰 사모님의 두 눈에 다시금 물기가 들어차는 순간이었다.

사모님이 눈물을 보이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안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낮부터 술잔을 비우시다 이젠 많이 지쳐서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쉬고 계시던 고문님(이전 사장님)께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은 고문님께서 큰 사모님으로부터 회장님의 신발을 건네받으시고는 이제는 맨들맨들해진 구두의 코와 아예 새것으로 교체된 구두 바닥 등을 천천히 매만지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우리 공 전무가 회장님 마지막 가시는 길 편하게 가시라고 아주 좋은 선물을 해 드렸네.”

“…아닙니다.”

“이걸 아직까지 이렇게 가지고 계셨네, 우리 회장님. 참 못 말린다, 진짜….”

고문님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가셨다.

이미 술기운에 한참 전부터 곯아떨어져 계신 고문님(이전 이문 전무님)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으시더니 그 옆에 쌓여 있던 방석 하나를 반으로 접어 베개 대용으로 삼고 누우셨다.

연세가 있으셔서 한쪽에 따로 잡아놓은 빈방으로 모시겠다고 했지만 이 두 분의 고집을 꺾는 건 무리였다.

한사코 자리를 지키겠다시며,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놀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디 그게 되나,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새벽 두 시가 지났을 때였다.

조문이 몇 시간째 뜸한 상황.

대충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들만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빈소에 빈 테이블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술잔이 돌아가는 속도만 조금 더디어졌을 뿐이다.

한쪽에선 훌라를 치기 시작했고, 또 다른 한쪽에선 홍성을 떠났지만, 그래도 한때 홍성에 오래 몸담아 왔던 원로들이 예전의 홍성을 추억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워낙에 인물 자체가 괄괄한 인물이다 보니 누구 하나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어서 결국 내가 직접 주무시고 계신 고문님(이전 사장님)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담요 하나를 얻어서 주무시고 계신 고문님 위로 덮어 드렸다.

참 예민한 분이셨다.

그 작은 느낌에 눈을 뜨신 고문님.

고문님은 내가 담요를 덮어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시며, 그리고 말없이 내 손 등을 톡톡하고 두드리셨다.

“깨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괜찮다.”

“옆 방으로 옮기시지요. 빈방 많은데…”

“그냥.”

“….”

“그냥 오늘은….”

눈을 살짝 옆으로 돌려서 코까지 골며 주무시고 계신 이문 고문님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친구하고 이렇게 나란히 바닥에 누워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이럴 때 옛날 생각 하면서 이렇게 같이 누워 보지, 죽기 전에 언제 또 이렇게 해 보겠어. 우리 신경 말고 가서 놀아라.”

“…네.”

회장님의 발인 땐 가장 많은 눈물을 보이신 건 큰 사모님도, 사장님도, 그렇다고 막내아들 민규도 아닌 바로 이문 고문님이셨다.

“회장님… 하아… 형님….”

모두가 조금은 놀라 있었다.

회사의 원로로 중책까지 맡으셨던 분이 현시대의 임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돌아가신 회장님을 부르는 모습.

조문 둘째 날부터 빈소를 함께 지키기 시작했던 김 이사가, 목놓아 돌아가신 회장님을 부르는 이문 고문님의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들 중 회장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바로 이문 고문님이시겠네요.”

“…?”

“그렇잖아요. 큰 사업 하는 사람이 자는 시간 제외하면 집에 얼마나 붙어 있을 수 있을 거며, 또 집에 있다 한들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나 되셨겠습니까.”

“그렇겠네요.”

“자는 시간 제외하면 회장님과 눈 뜨고 같이 보낸 시간은 이문 고문님이 큰 사모님보다 더 길었을 겁니다.”

“….”

김 이사가 혼잣말을 하듯,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흘린 그 한마디에 우리 모두는 회장님의 지난 세월을 거울삼아 우리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됐다.

무엇이 중요한가.

글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른이란 나이를 거쳐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무수한 갈림길.

그 갈림길 앞에 서게 될 때마다 난 세상에는 없는 워라밸이라는 환상을 찾아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봤었다.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다.

물론 분명 존재하는 건데 그저 내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그걸 찾아내지 못했다는 거다.

워라밸… 그런 삶이 고급지고 세련된 삶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마흔을 넘어 삼십 대보다 더 빨리 가는 시간의 열차에 오른 난, 내 세상엔 없는 워라밸이라는 환상을 좇느라 낭비한 시간이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그게 좋고 안 좋고를 떠나, 그게 맞고 틀리고를 떠나 내 세상엔 없었던 워라밸.

내가 가진 환경에서 그걸 하려고 했음 난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거였고, 그걸 하려고 했음 평범보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삶을 꿈꿔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난 모든 부분에서 만족한다.

만족.

워라밸이라는 환상이 내게 해주지 못했던 보상을 이 만족이라는 감정이 대신 채워주고 있는 거 같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겠다?

아니, 내 가족들과 더 오래,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여유 있는 삶을 함께 누려 보기 위해 난 오늘도 출근을 한다.

이미 지금의 난 로또 1등이나 다름없는 역전의 삶을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난 내 가족들의 여유와 또 행복, 그리고 내 만족을 위해 오늘도 출근을 준비했다.

“1분 뒤, 전무님 들어가십니다.”

-대기 중입니다.

대웅 씨의 호출에 카 오디오에서 이미 대기 중이라는 하 실장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부드러운 코너링으로 홍성 본사 로비 입구로 미끄러지듯 차를 세운 대웅 씨.

대웅 씨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하 실장이 차 뒷문을 열었고, 난 그녀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넨 뒤 서류 가방과 차 안에서 미처 다 보지 못한 신문 한 부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대웅 씨의 인사를 받고 하 실장과 함께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님 장례 일정 동안 뒤로 연기됐던 아이티 영업부 강 팀장의 프레젠테이션부터 참석하시면 됩니다.”

“지금 바로 가야 되는 겁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프레젠테이션을 이렇게 빨리해요?”

“많은 업무가 밀려 있습니다. 전무님 일정에 맞춘 스케줄입니다. 강 팀장 프레젠테이션 끝나는 대로 바로 롯데 본사 하 전무 단독 미팅 잡혀 있고, 점심은 신세계 쪽 중앙점으로 옮기셔서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내일 점심은… 무조건 비워 놓으세요.”

“안 그래도 안 이사님 들어오셔서 내일 점심 정도는 함께하실 거 같아서 미리 비워 놨습니다.”

“역시….”

“그럼 일단 대회의실로 바로 들어가시죠.”

“이렇게 해서?”

난 들고 있던 서류 가방과 신문을 눈짓하며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투로 하 실장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재빨리 내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과 신문을 빼앗듯 건네받으며 대회의실 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렇게 하면 되죠.”

“커피도 아직….”

“준비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너무하네, 진짜…”

대회의실.

하 실장의 말대로 모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사장석.

난 그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테이블 마이크에 손을 갖다 대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이 이렇게 아침 일찍 시작될지 모르고 출근을 좀 늦게 했습니다.”

내 말에 자리에 모인 임원진들과 발표자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발표자는 그 미소 뒤에 억지로 숨기고 있는 긴장과 불안을 내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강 팀장….”

“네, 전무님.”

“여기서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 거 같네요?”

“네, 첫 단독 프로젝트입니다.”

“긴장되겠다.”

“….”

“긴장해요. 긴장하라고 하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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