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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13화 (313/325)

#313

미안해요, 미안해…

아침이 오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올림픽 대로가 이렇게까지 텅 빈 적이 있었던가.

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놓고 어둠이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조명들을 감상했다.

“후우….”

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거 같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나조차 감이 안 잡히는 상태.

일단 가서 보면 뭐부터 해야 할지 눈에 보이겠지.

이문 고문님 때부터 줄곧 전무 차량의 운전대를 잡아 왔던 대웅 씨는 역시나 노련했다.

몇 마디 단순한 질문들로 나의 지금 현재 기분 상태를 파악하고는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켜 주었다.

지금 이 기분에 지루한 클래식 음악이 나왔다면 한없이 가라앉았을 거 같다.

그렇다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가기에도 뭔가 모르게 불안한… 그런 기분이었다.

아직은 어둠이었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디제이들의 목소리는 아침처럼 밝았다.

그 기분에 약간이나마 에너지를 충전받아 가며 회장님 댁까지 도착했다.

회장님 본가 앞엔 벌써 병원 장례식장의 승합차가 도착해 있었다.

그 뒤로 차를 세운 대웅 씨.

“세브란스네. 대웅 씨.”

“하 실장한테는 제가 전화로 알려주겠습니다. 전무님은 들어가 보시죠.”

“네. 들어가서 안에 상황 보고 연락 줄게요.”

이미 사장님 가족과 민규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회장님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지 하나같이 붉게 충혈이 된 눈으로 날 맞이했다.

난 그런 상주들 앞에 고개를 숙인 뒤 사장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병원에서 온 사람들이 안방에 들어가 뭔가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정신이 없어서, 연락받자마자 바로 공 전무한테 연락을 했던 거예요.”

“잘하셨습니다. 장례 절차 관련해선 비서팀에서 다 어레인지를 해 놓을 겁니다.”

“가서 좀 앉죠, 일단.”

거실 소파 테이블 위로 올려진 한 켤레의 낡은 구두.

난 이상하게 그 구두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건….”

“아버님이 신으셨던 구두라고 하네요. 저도 기억이 안 나는 구두입니다. 어머니가 저희 오기 전에 미리 이걸 이렇게 꺼내 놓고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

“아버지가 처음 홍성을 만드시고 회사가 좀 회사다워질 만할 때… 당시 홍성 창립 멤버들이 아버지 생일 선물이라고 다 같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선물을 했던 구두라고 합니다.”

“아….”

“이렇게 밑창이 다 드러나고, 구두코가 다 헤져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신으시다가 어머니가 그만 좀 버리라고 하실 때… 하아…. 그때 이걸 버리니, 마니 하며 부부싸움까지 크게 하셨다고 하네요. 푸흡….”

난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을 차분히 올려놓고 사장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보물처럼 그렇게나 아끼셨다고 합니다. 그 마음을… 저도 이젠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버리니, 이렇게 아버지는 가시네요.”

“….”

“보물 대하듯 가장 아끼셨던 물건이라 아버지 보내 드릴 때 이것도 함께 태워서 보내 드리자고 이렇게 꺼내 놓으셨네요.”

왜 그랬을까.

그때 난 그게 어쩌면 무례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그 구두를 한번 보고 있었다.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사장님.”

“그럼요. 멋쟁이는 멋쟁이셨어, 우리 아버지. 페라가모야. 하하하….”

그리고 또 그 순간 난 어쩌면 사장님만 허락을 해 주신다면, 회장님을 위해… 아니, 회장님을 보내 드려야 하는 사장님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해 줄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험하게 신으셨네요.”

“아버지 스타일 생각하면 얼마나 아끼고 또 아껴가며 신으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이걸 10년이나 신으셨다네요. 중요한 미팅이나 출장길 떠나실 땐 일종의 징크스처럼 이 구두를 안 신으면 결과가 별로 안 좋게 나오셨다고….”

“저한테도 그런 애착이 깊게 든 구두가 한 켤레 있습니다. 저 처음 홍성 입사할 때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인데… 저 역시 안 신은 지 꽤 오래되는데도 이상하게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사장님.”

“네.”

“우리 회장님… 새 신처럼 신고 가실 수 있게 해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

“이거 제가… 회장님 장례 진행되는 동안, 아니, 오늘 안에 새 구두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게 무슨….”

“사장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난 곧바로 밖에서 대기 중일 대웅 씨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대웅 씨.”

“네, 전무님.”

“오늘… 조금 피곤하더라도 부산 한번 다녀오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요?”

“네.”

“문제없습니다.”

“제가 조금 있다가 카톡으로 주소 하나 찍어서 보내 드릴 테니까, 그쪽으로 이 신발 가지고 가서 새 신발로 만들어 오세요.”

“…네?”

“제가 아버지한테 새 신발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놓겠습니다.”

“아….”

“회장님이 신으셨던 신발입니다. 곧 지금의 홍성을 있게 만든 의미 있는 구두죠.”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대웅 씨가 구두를 들고 나가기가 무섭게 상무님이 내 손을 잡으셨다.

“고맙습니다, 항상.”

“항상 고마운 건 전데, 그 고맙다는 말을 사장님께서 먼저 하시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시죠?”

“….”

“아, 저기 회장님 의사 선생님….”

안방에서 의사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장님을 따로 불러 간단한 보고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옆엔 민규가 입을 꼭 다문 채 서 있었다.

난 일부러 한 발 멀리 떨어져 의사와 나누는 집안 이야기에 귀를 막았고, 잠시 후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고문님들이 도착을 하시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다.

* * *

“엄마.”

-와?

“일어났어요?”

-일어났으니 전화를 받지.

“내가 사람 한 명 보내 놨거든.”

-뭐라 하노?

“아, 회사 사람.

-어디로?

“부산으로.”

-뭐고,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는… 좀 알아듣기 쉽구로 말을 해라.

“우리 회사 회장님 오늘 새벽에 세상 베리셨어요.”

-아이고야… 그람 우째 되는 기고? 느그 회사 문제 생기는 거 아이가?

“아이다, 그런 거. 오래전부터 오늘내일하시다가 간밤에 주무시면서 호상으로 가셨어요. 그건 그렇고… 내가 사람 한 명 보내서 우리 회장님 살아 계실 때 가장 아끼시면서 신으셨던 신발을 고쳐 오라고 했거든.”

-신발?

“보면 알 거예요. 진짜 딱 봐도 험하게 신으셨어. 밑창 다 나가고 코 있는 부분 세무처럼 다 일어나고… 근데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뭐 니 아버지야 평생을 그 일만 해 오신 분인데….

“오늘 손봐야 하는 거 많으신가?”

-급한 거가?

“당연히 급한 거죠.”

-그라면 그거부터 해 주야지.

“평소 아들한테 해 주신 게 많은 분이에요.”

-….

“근데 아들은 뭐… 모르겠어. 이건 꼭 아들이 해주고 싶어.”

-알았다. 걱정하지 마라. 도착하는 대로 바로 손봐서 보내 줄 꾸마.

“사랑합니다, 엄마.”

-간지럽구로….

“사랑한다고.”

-우짜라고.

“아들이 사랑한다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우짜라고 이래 뿌면 아들 입장이 뭐가 돼노?”

-사랑한다, 아들. 됐나?

“좀 부드럽게…”

-됐다, 고마. 치아라. 엄마 밥 앉히러 갈란다. 끊어라.

* * *

비서실의 일 처리는 흠잡을 곳 없이 철저하고 신속했다.

회장님을 모신 차량이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원진들이 장례식장 앞으로 모여 있었다.

사장님을 비롯해 유가족들이 병원으로 먼저 회장님을 모셔 뭔가 서류 같은 걸 신청하는 동안 난 이사진들을 모아놓고 간단하게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장례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센젠 법인 연락 넣어서 법인장도 가능하면 스케줄 다 취소하고 넘어오라고 하시고요.”

“안 그래도 연락받자마자 제가 바로 안 이사한테는 연락을 넣어 놨습니다. 11시 비행기로 온다고 하니까 늦어도 3시 안에는 도착할 거 같습니다.”

현재 영업 이사직을 맡고 있는 양 이사의 보고에 짧게 고개만 끄덕인 뒤 쁘띠토널 프랑스 법인 쪽과 홍성 타워 스위스 법인 쪽의 상황도 함께 물었다.

“오늘 안에는 힘들겠지만, 발인 전까지는 문제없을 거 같습니다.”

* * *

오후 3시.

중국 센젠 쪽에서 법인장, 안 이사와 몇몇 간부들이 도착했다.

안 이사의 모습을 발견한 민규.

안 이사와 마주한 민규는 오늘 내가 본 모습 중 가장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 정이 깊었으니까…

조문 공간 입구 앞에서 안 이사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한참을 서서 민규를 향해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 앞에 민규 역시 입을 꼭 다문 채 힘겹게 양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민규의 모습에 안심이라도 하듯 안 이사는 몇 차례 고개만 끄덕였고, 결국 민규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느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있는 민규였다.

신발을 벗고 조문 공간 안으로 들어선 안 이사.

안 이사는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기 전 사장님 앞으로 섰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회장님 중국통 아니십니까.”

“…?”

“제가… 크흠, 제가 평소 집에 모셔만 두고 있던 귀한 백주를 한 병 가지고 왔는데, 사장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제가 이거 지금 뜯어서 회장님께 한 잔 올리고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내가 이래. 우리 아버지 백주 좋아하시는데, 여기서 계속 딴 술만 올리고 있었네. 고마워요, 안 이사. 이런 부분까지 다 신경 써 줘서.”

“아닙니다.”

안 이사는 자신과 함께 온 인물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안 이사와 함께 온 법인 식구 한 명이 들고 온 쇼핑백에서 그 병 입구가 노랗게 변해버린 마이타이주 병 하나를 꺼냈다.

안 이사는 회장님의 영정 사진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술병 입구에 달린 붉은 천을 천천히 돌려서 병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미리 채워져 있던 술잔을 퇴주잔에 쏟아버리고 그 안으로 독한 백주 한 잔을 담아 회장님 영정 사진 앞으로 올렸다.

안 이사를 사이에 두고 센젠 법인 식구들이 두 번 큰절을 하고 상주와 한 번 맞절.

그리고 안 이사는 민규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민규는 안 이사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안 이사가 민규의 한쪽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툭! 하고 건드리는 순간 그제야 민규는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로 안 이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홍성의 임원, 유통 판 본사들의 고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

그리고 장례식 입구에서부터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즈음의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왔나 보네.”

안 이사의 말에 나와 양 이사가 동시에 장례식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처음에 안 이사가 왔나 보네… 하길래 회장님 구두를 수선하러 부산에 내려갔던 대웅 씨가 도착을 했나 했다.

그런데 대웅 씨가 아니었다.

“…!”

공항에서 급하게 달려오느라 옷도 못 갖춰 입고 등장한 인물로 인해, 민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울음을 삼키고 있던 친구가 정신없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한 인물로 인해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울상을 짓기 시작하더니, 그 친구가 자기 앞으로 다가가 안아주자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미안해… 소식 듣고 바로 달려온다고 왔는데….”

“하아… 우리 아버지 불쌍해서 어떻게 해… 하아….”

회사 안팎에서 많은 인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지혜의 품에 안긴 민규는 그런 것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렇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지혜는 한참 동안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민규의 등을 쓸어내렸고, 민규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에야 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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