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12화 (312/325)

#312

출발하겠습니다

사장님과의 통화를 끝내고 한참을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고문분들께 대신 연락을 넣어 주기로 했음에도 우선은 내 머릿속부터 교통정리를 끝내는 게 순서일 거 같았다.

“어딘데? 회사?”

통화하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던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잠결에 집사람이 물었고, 난 그런 집사람에게 조금 전 회장님이 돌아가셨단 이야기를 전했다.

잠시 뒤 ‘으으윽…’ 하며 억지로 잠에서 깨기 위해 기지개를 켠 집사람은 침대 머리맡 협탁 위로 올려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일어나 앉으며 잠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또 한 며칠 바쁘겠네.”

“준비 좀 해 줘.”

잠옷 위로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방을 나선 집사람.

그녀는 친절하게도 방의 불까지 다 켜 주고 나갔다.

“….”

뻑뻑해진 목 근육.

난 그 목 근육을 이리저리 풀어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대웅(이문 전무님이 공식 은퇴를 하시기 전까지 전무 차량을 몰았던 전문 운전기사) 씨한테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전화받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새벽부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 며칠 바빠질 거 같습니다.”

-혹시….

한 며칠 바빠질 거 같다는 말에 상대는 뭔가 짐작한 게 있는 듯 말을 꺼내려다 침묵을 유지했다.

“조금 전에 회장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급하게 서두를 건 없습니다. 저도 지금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상태거든요.”

-최대한 빨리 챙겨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또 망설이는 나였다.

모두가 몇 해 전부터 꾸준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게 현실로 닥치고 또 그 전달을 내가 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회장님과 반평생을 함께했던 고문님들께 어떻게 연락을 넣어야 할지 앞이 캄캄해졌다.

그런 망설임도 잠시 고문님들께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하지영(전무실 전담 비서-현 홍성 인터내셔널 비서실 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넣어 회사 임원진들을 상대로 비상 연락망을 돌리고 파트너 업체들 쪽으로 상조 공문 메일을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엔….

“회사에서 스탠바이하고 있으세요. 혹시 몰라. 아마 지영 씨도 한 며칠 묶여 있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그럼 전 회사 출근해서 전무님 연락 기다리고 있는 걸로 하겠습니다.

“잡혀 있던 스케줄 다 빼 주고, 내가 직접 연락해서 사정을 말해 줘야 할 중요한 스케줄만 따로 챙겨서 나한테 보내줘요.”

-네, 알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해 보기도 전에 하루 동안 써야 할 에너지를 다 써버린 듯한 기분.

그렇게 난 집 안에서 입는 카디건 하나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아이들의 방문을 조심히 열었다.

서로 엉켜서 자고 있는 두 녀석.

둘째 녀석 승애는 재워 놓아도 자다가 몸부림을 어찌나 심하게 치는지 자기 오빠 얼굴 쪽에 꼭 저렇게 한쪽 다리를 올리고 잔다.

승후(태명 로또)가 태어나고 14개월 차 때 둘째 녀석 승애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첫째 때는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잘 생기지 않았는데 승애 때는 나와 집사람 모두 당황을 할 정도로 전혀 예상을 못 한 상태에서 임신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예상을 못 했다고 해서 승애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겼던 건 절대 아니었다.

승후를 생각해서도 하나보단 둘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첫째가 아들이다 보니 내심 딸 욕심도 있었고.

결국 집사람은 승후 출산 후 10개월 정도 육아 휴직을 하다가 회사로 복귀를 하자마자 곧바로 둘째 소식을 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은행을 관둘 수밖에 없었다.

엄마로서 희생이 아닌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아빠로서의 책임감은 한결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자고 있는 두 녀석의 이마에 각각 입술을 맞춰 놓고, 오빠 얼굴에 올라간 승애의 다리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 담요를 요령껏 제대로 덮어준 뒤 방문을 살짝 열어놓고 거실로 나왔다.

온 바닥에 깔려 있는 매트.

그리고 전날 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아이들의 장난감들이 그 매트 위로 널브러져 있었다.

비록 층이 낮아 한강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지난 우리의 결혼 생활이 착실했고, 또 노력했다는 걸 증명해 주는 한강 조망권의 52평형 아파트.

아직 갚아 나가야 할 대출이 많이 남았지만, 이젠 회사에서의 내 몸값이라는 게 있다 보니 절대 부담스럽게 생각할 이유는 없겠다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첫째 승후가 태어나고 우리 부부는 마포 아파트를 제외한 당시 살고 있던 집과 강남에 월세를 놓고 있던 아파트를 적절한 타이밍에 모두 처분을 했었다.

그리고 거리상으로는 기존에 살던 집보다 회사에서 더 멀었지만, 처가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진 곳으로 평수를 넓혀 이사를 했었다.

그런데 층간 소음이 문제였다.

승후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뭔가를 다 만지려고 하는 시점이 찾아오자 층간 소음에 민감한 아랫집으로부터 잦은 항의가 들어왔는데, 그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우리 부부 입장에선 조심을 한다고 하는데도 무슨 수로 한시를 가만히 안 있어 주는 애를 억지로 묶어 두겠나.

매트를 이중, 삼중으로 깔아 보고 또 어떻게든 밖으로 자주 승후를 데리고 나가 운동을 시켜 집에선 가급적 빨리 재우는 방법을 써 봤지만, 그럴수록 우리 집이 집이 아닌 감옥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승애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준비했다.

아랫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1층 위주로 아파트를 알아봤고, 또 애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다 보니 두 살 터울 아이들의 육아를 우리 부부 둘이서 다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판단에서였다.

내가 하는 일, 타이틀이 출퇴근 시간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다 보니 집사람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이해만 바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장모님이 집에 오셔서 자고 가시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무리를 하더라도 평수를 한 번 더 넓혀 가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임원 승진을 하면서 몸값도 많이 올랐고, 또 어차피 부장 때까지 쌓여 있던 회사 퇴직금을 한꺼번에 정산받아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제법 있었다.

거기다 집사람 역시 10년 넘게 다닌 은행으로부터 적지 않은 액수를 퇴직금으로 받아 왔고.

거기에 살던 집을 처분하고 대출을 일으켜 52평형 신축으로 이사를 했던 거다.

“우유부터.”

주방 안으로 들어가 커피머신 앞으로 서는 내게 집사람은 방울토마토를 씻으며 말했다.

난 다 알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이며 커피머신 속으로 캡슐 하나를 끼워놓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집사람이 우유를 데워 놓았을 전자레인지를 열었다.

이케아에서 산 레인지용 유리컵에 반쯤 담겨져 데워진 우유.

난 그걸 또 시키는 대로 꼭꼭 씹어가며 한 잔을 비워낸 뒤 다 내려진 커피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집사람이 깨끗하게 씻어 준 방울토마토와 블루베리 몇 알을 커피 한 잔과 함께 아침 대용으로 천천히 먹었다.

둘째가 생기고 나서부터 부쩍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애들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다는 욕심….

애가 생기기 전까지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애들은 자연스럽게 키워야 한다라고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 애가 생기고, 그 애를 키우는 과정에서 애들을 자연스럽게 키운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이고, 또 무책임한 환상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애들은 자연스럽게 키우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키우는 거였다.

뭐든 다 해 주는 게 아니라, 애들에게 꼭 필요한 건 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난 임원 승진 후 사라질 줄만 알았던 욕심과 목표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욕심과 목표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우선 내 건강을 제대로 잘 챙겨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빈약해 보이지만 나름 영양가를 따져 가며 집사람이 매일같이 챙겨 준 아침 식사를 조금 이른 새벽에 끝을 내고 곧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몸을 씻었다.

샤워를 끝내고 안방과 연결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선물받은 예거 손목시계를 손에 채웠다.

좀처럼 잘 차지 않는 시계다.

워낙에 고가의 시계라서 아껴가며 차고 있는 중이다.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나, 이사회가 열릴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차지 않는 시계인데, 오늘은 당연히 이 시계를 차고 회장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려야 할 거 같았다.

애 둘에 초고속 전무 승진까지….

정신없이 지나갔던 지난 5년의 세월이 시계를 손목에 채우는 순간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회장님 댁에 처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 식사 자리가 끝나고 이 시계를 선물받았으니까.

당시 난 영업이사 3년 차에 이사 총괄을 건너뛰고 바로 상무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은 사장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당시 상무였던 사장님이 내게 했던 약속대로 회사 안팎에서 적극적인 서포팅을 해주고 계셨다.

상무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회장님의 식사 초대가 있었고, 처음으로 회장님 댁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됐다.

회장님과 직접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를 해보는 것 역시 당연히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은 무척 많이 빠지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빛만은 매서우셨던 회장님.

식사를 굉장히 빨리하셨다는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대기업의 총수라고 하면 식사도 아주 온화하고 우아하게 할 거 같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셨던 건 아니었는데, 분명 비정상적일 만큼 빠르게 식사를 끝내셨다.

전형적인 현장 스타일.

홍성을 처음 세우실 때부터 줄곧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셨던 회장님이셨기에 그 습관이 그대로 남아 계신듯 했다.

그날 식사를 끝내고 회장님 서재로 자리를 옮겨 회장님과 나, 그리고 당시 상무였던 지금의 사장님. 이렇게 셋이서 가볍게 차를 한잔 더 했는데 그 자리에서 회장님이 내게 앞으로 사장님을 도와 홍성을 잘 이끌어 달라는 의미로 고가의 시계를 하나 선물해 주셨다.

지난 시간들을 혼자 거울을 보며 회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집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웅 씨 왔어요. 차량 진입했다고 호출 왔어.”

“다 끝났어. 지금 나가.”

준비를 다 끝내고 안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대웅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나갑니다.”

-네, 전무님.

아파트 지하 주차장.

검은색 정장에 타이까지 깔맞춤을 하고 있던 대웅 씨가 미리 차에서 내려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 고개를 숙이는 대웅 씨에게 함께 고개를 숙여 보이며 다가갔고, 대웅 씨는 운전석 대각선 뒷자리 문을 열어 날 맞이했다.

“최대한 천천히 갑시다.”

“…?”

대웅 씨가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고 있을 때 난 대웅 씨에게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최대한 천천히 회장님 댁으로 가자고 말했다.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사장님도 댁에서 연락받고 임종을 못 지키셨다고 합니다.”

“아….”

“우리가 상주보다 먼저 도착할 순 없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출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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