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우리 로또 만나러 가실게요
“아이고 무거버라, 아이고 무거버라….”
“로또 다 듣고 있어. 애 듣는 데 무겁단 말 하는 거 아냐.”
“아이고 가벼버라, 아이고 가벼버라….”
“가볍단 말도 하는 거 아냐. 애가 왜 가벼워? 병원에서 4킬로 넘게 태어날 거 같다고 한 말 못 들었어?”
“아이고 아무렇지도 않다, 아이고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아파트 비상계단.
난 뒤에서 강혜선의 등을 떠받치며 계단을 올랐다.
출산 예정일까지 보름 정도밖에 안 남은 시점.
병원에선 로또가 조금 크게 태어날 거 같으니 미리미리 엄마의 자궁을 확장시키는 운동을 해놓는 게 출산 시 편할 거라며 매일 계단을 오르는 운동을 권했다.
그 덕에 난 퇴근 후 매일같이 강혜선을 데리고 1층까지 내려갔다가 옥상 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걸 최소 두 차례 이상 반복해야 했다.
출산은 집사람이 하는데 다리 알은 내가 박힐 거 같았다.
그럼에도 난 그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나와 강혜선은 지루하기 그지없는 그 계단 오르기 운동을 하면서, 평소 나누지 못했던 인생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나누는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내년에 우리 강남 아파트 있잖아.”
“응.”
“거기 세입자가 따로 재계약 이야기를 먼저 안 꺼내면 계약 끝나는 대로 우리가 거기 들어가 사는 게 어떨까?”
“당신도 그 생각 했어?”
“아무래도 우리 둘만 살 땐 지금 이 집도 뭐 딱히 불편한 게 없지만, 로또까지 태어나고 나면 많이 비좁을 거 같아서. 장모님도 수시로 애 봐준다고 찾아오실 거고….”
“내 말이.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그럼 혹시 모르니까 그 집 세입자한테 미리 이야기를 좀 꺼내 놓을까? 막상 그때 가서 재계약을 하자고 하면 서로 민망해질 거 아냐.”
“그러지는 마. 그냥 기다려 보자. 그 집도 벌써 4년이면 애 초등학교 졸업할 때 다 됐는데, 굳이 그 집에 계속 더 살 이유는 없을 거야.”
“하긴….”
“그리고 또 만약에라도 재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면 하라고 해야지, 어떻게 살고 있는 사람한테 나가라고 해. 그건 너무 정이 없다. 마포 아파트 있잖아. 넓기는 거기가 더 넓은데 안 되면 그쪽으로 옮기면 되지.”
“거긴 회사에서 또 너무 멀잖아.”
“그건 또 그렇네….”
“우리 이참에 집 정리 좀 하는 건 어때?”
“정리할 게 뭐가 있어?”
난 그동안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내용을 집사람에게 털어놓았다.
이젠 여기가 몇 층인지 감각조차 없는 상태에서 강혜선의 등을 단단히 받쳐 주며 계단을 올랐다.
“진짜 가진 거 많은 사람들이 내가 지금 당신한테 하는 말을 들으면 같잖다고 웃을 수도 있어.”
“남들이 웃건 말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 우리만 만족하고 행복하면 장땡이지.”
“그래서 말인데… 난 우리가 결혼해서 지금까지 나름 열심히 살아왔고, 또 그 결과 인생 세팅을 나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생각해.”
“인정.”
“그런데 정작 우리가 세팅해 놓은 걸 우린 제대로 못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열심히 벌기만 벌었지, 이걸 제대로 써 보는 연습을 지금껏 한 번도 못 해 봤단 생각이 든단 말이야.”
“우리 지출이 적어?”
“거봐, 당신은 또 이렇게 나오잖아. 아무리 강남에 집을 사놓으면 뭐 해. 정작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강남에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도대체 뭘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악착같이 살고 있는지, 그게 조금 헷갈린단 말이야, 내 말은.”
“그래서?”
“마포 아파트야 앞으로도 3, 4년간은 계속 신축 이미지가 있을 테니까 가만히 놔두고 지금 이 집하고 강남 아파트를 팔고 평수를 좀 많이 넓혀서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로또랑 같이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구해 보는 건 어떨까?”
“월세 들어오는 걸 포기하자고?”
“내가 더 많이 벌어다 주면 되잖아.”
“누가 당신이 벌어다 주는 돈이 적다고 했어? 내 말은 그렇게 씀씀이를 키우면….”
“아이고, 또 잔소리 시작한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꼭 그렇게 하자는 말이 아니라, 당신 생각은 어떤지를 물어보는 거라고. 이 집이랑 강남 아파트… 따지고 보면 우린 이미 돈 벌었지.”
“놔두면 더 벌어. 더 올라갈 거야.”
“그렇게 모아서 죽을 때 다 싸 들고 갈 거야? 이 집이랑 강남 아파트 팔고 평수를 조금 넓혀서 새집으로 이사 가자. 그리고 남는 돈으로….”
“….”
“부산에 부모님 살고 계신 아파트에 작은 평수로 집을 하나 구하자.”
“부산에?”
“우리 둘만 있을 때야 한 번씩 부산 내려갈 일 있음 호텔을 이용하면 됐다고 치지만, 이젠 로또까지 있잖아. 애 정서상…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 사는 집 근처에 우리 집도 있다… 이런 걸 인식하게 만들어 주면 좀 더 포근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부산 내려갈 때마다 애 데리고 호텔을 이용하면 애는 분명 부산에 할머니, 할아버지 보러 갈 때마다 어디 여행 간다는 느낌만 가질걸? 내 집이라는… 그런 느낌은 좀 덜할 거 같아.”
“그건 뭐 당신 말대로 하자면 월세도 못 놓을 거 아냐. 우리가 가서 쓸 때 말고는 계속 비워둬야 하는 집이잖아.”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남들 눈엔 이게 또 사치로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한데… 난 사실 그런 삶을 살아 보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거야. 당신은 안 그래?”
“…!”
“필요한 거잖아, 어떻게 보면. 그리고 또 월세 놓고 집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간 상관없이 세입자들 연락받고 문제 해결해 줘야 하는 것도 이젠 조금 귀찮아지려고 하고. 난… 난 있잖아, 여보. 내 삶이 럭셔리였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명품을 몸에 휘감고 비싼 외제 슈퍼카를 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가족에 관한 일,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엔 내 에너지를 크게 빼앗기고 싶지가 않아. 내 기준에선 그런 삶만 살 수 있어도 충분히 럭셔리야.”
“…”
“우리 나이 내일모레 마흔이다? 인생의 반은 살았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당신도 알겠지만, 내 지난 삶은 치열했잖아. 나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종종 하는 거처럼 열심히 산 나 자신에게 선물이라는 걸 해 주고 싶어. 뭘 선물할까, 과연 난 나 자신에게 뭘 받고 싶은 걸까… 그걸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역시나 난… 로또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의 울타리가 좀 더 가정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소원인 거 같아.”
“그게 전부지, 뭐 결국엔….”
“저번에 엄마, 아버지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도 집이 비좁아서 많이 불편했잖아, 서로. 그렇다고 나이 드신 분들한테 버젓이 아들 집이 있는데 호텔 방 잡아드릴 수도 없는 거고. 그냥 여러모로… 그렇게 좀 바꿔보는 게 어떨까 싶네, 나는.”
“아… 이게 정석으로 놓고 보면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투자인데, 당신 말 들어 보면 또 일리가 있고…”
“집에 투자하지 말자, 더 이상. 밖에서 비 맞으면서 자는 거 아니잖아. 더 이상 돈 더 불리는 쪽으로 투자하지 말고… 우리 남은 인생의 행복에 투자를 하자. 우린 이미… 충분해. 여러모로.”
“세상에 충분한 건 없어. 다만 그렇다 만족을 하는 거뿐이지.”
“그런 만족을 당신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본 적 있어, 그동안?”
“…”
“난 우리 로또를 돈돈거리는 사람보다는 부모 영향으로 매사에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 주고 싶어.”
“누가 영업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말은…”
“누가 돈놀이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걱정은… 다 잘되게 되어 있어. 그렇게 하자.”
그리고 보름 뒤 로또가 세상에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이틀 먼저 시작된 산통.
새벽이었다.
자고 있는데 집사람이 조심히 날 흔들어 깨웠다.
“로또 지금 나올 거 같아….”
이게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상당히 긴급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맞는 건데, 집사람 성격이 그래서 그런 건지 산통이 시작됐다고 하는데 오히려 샤워를 하러 들어가겠다고 해서 난 순간 집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하는 오해까지 했다.
“샤워를 왜 해, 지금 이 상황에서.”
“며칠을 못 씻을 건데 그럼 이대로 나가?”
“뭐라는 거야? 안 아파?”
“견딜 만해. 나 들어가서 금방 샤워만 하고 나올 테니까 저기 내가 미리 짐 챙겨놓은 거 있거든? 당신은 그 가방이랑… 아… 쓰읍…”
“거봐, 아프잖아. 그냥 바로 병원 가.”
“호들갑 떨지 마. 참을 만하다고. 당신은 저기 내가 싸놓은 가방이랑 당신 출근 때 필요한 것들 좀 미리 챙기고 있어.”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느낌만 평소보다 조금 심하게 오고 있는 건지, 아님 진짜 아파 죽겠는데도 저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집사람은 인상을 쓰면서도 굳이 샤워를 해야겠다고 했고, 난 그런 집사람을 말릴 수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짐을 챙겼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집사람은 조수석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고 입을 꽉 다문 채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앞선 방문에서 이미 병원 측의 안내를 다 받았기에 늦은 시간 산통이 시작되면 어떻게 야간 진료소를 찾아야 하는지 숙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닫혀 있는 정문을 돌아 야간 진료 조명이 들어와 있는 곳으로 들어갔고, 벨을 눌렀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나와서 안내를 도와주었다.
“산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셨어요?”
“한 시간 반 정도….”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게요. 아버님 짐 같은 거 따로 챙겨오신 거 있으세요?”
“네, 차에….”
“그럼 가서 가지고 오세요.”
나 혼자 마음이 급한 거 같았다.
간호사 역시 집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능숙하게 집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짐을 챙겨서 다시 들어가자 파란색 가운을 착용하라며 내게 건넸는데, 난 그 가운을 챙겨 입고 집사람이 들어가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와이프의 상태를 확인했고, 양수는 터진 상태인데 아직 로또가 밖으로 나올 준비가 덜 된 거 같다며 유도분만 주사를 맞히는 게 좋을 거 같다며 나와 집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난 애가 병원에 오면 바로 나오는 줄 알았어.”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아, 알았어.”
그냥 일반 병실 같은 곳이었는데 간호사가 들어와서 와이프 손에 링거 같은 걸 꼽더니 티브이를 보겠냐며 리모컨을 건네고 다시 나갔다.
처음이라 그런지 내 입장에선 그 모든 상황이 낯설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보다는 다들 너무 침착해서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집사람이 곧 출산을 하게 될 거 같다고 말씀을 드려 놓고,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30분 만에 병원에 도착하셨다.
그리고 집사람은 너무나 태연하게 산발적으로 찾아오고 있을 진통을 견뎌내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로또 만나러 가실게요.”
난 다른 남편들처럼 수술실에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이 부분은 선택 사항이었는데, 집사람도 원하지 않았고, 나 역시 비록 숭고한 순간이긴 하지만, 집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 함께 들어가는 사항은 선택을 하지 않았었다.
“부산엔 연락 드렸나?”
“아뇨, 아직이요.”
“뭐 하노, 얼른 연락드리라.”
장인어른이 엄하게 표정을 바꾸시며 말씀하셨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자식을 낳는 데 그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노.”
“…네.”
“얼마나 기다려 오셨을 친손주겠노, 어이? 하여간 생각하는 시근머리 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