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저는 자신이 없어요
뜨겁게 달아오른 가마솥 뚜껑.
그 위로 양지 부위 비계 몇 점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비계를 집게로 잡은 가게 사장님은 가마솥 뚜껑에 기름칠을 하며 이대로 2, 3분 정도 더 달구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냉면 네 그릇 갖다주시고, 술은 소주로 주세요.”
“냉면을 왜 벌써 시킵니까?”
아무것도 몰랐던 난 아직 고기 맛도 못 봤는데 벌써 냉면을 시키는 손 부장의 주문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모르면 그냥 보라는 식으로 손 부장의 주문을 통과시켰다.
“우와… 간만에 소고기 사준다고 해서 좋다고 따라왔더만, 결국 배는 냉면으로 채워라?”
“어허이, 참… 좀 있어 봐. 신세계가 펼쳐질 거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자신감일까.
소고기라고 하면 난 전문가나 마찬가지다.
살면서 소고기를 먹으러 와서 이렇게 비양심적으로 주문을 하는 건 내 소고기 역사상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가게 사장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방을 향해 물냉면 네 그릇을 주문 넣었고, 그 냉면은 어이가 없게도 주문한 소주와 함께 도착할 정도로 빠르게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그럼 한번 구워 볼까?”
장 대표가 식사 시작을 알리자, 알렌 강과 손 부장은 각자의 젓가락을 이용해 종이만큼 얇은 차돌박이 한 점씩을 집었다.
치익, 치익….
굽는다기보다는 그저 뜨겁게 달아오른 가마솥 뚜껑 위를 닦듯 앞뒤로 치익, 치익 뒤적이며 색깔만 변하게 만든 뒤 그걸 곧바로 냉면 위로 올려 면에 싸서 입안에 넣기 시작했다.
“크흐… 뭐 해? 먹어 봐. 예술이야, 예술…”
물론 이런 스타일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 끼게 된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의심도 잠시 치익, 치익 하고 차돌박이 앞뒤를 빠르게 익혀 쪼글쪼글해진 고기 한 점을 냉면에 싸서 입안에 넣으니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입안이 황홀했다.
그리고 난 그 순간 집에 있는 집사람 얼굴이 떠올랐다.
조만간 집사람을 한번 데리고 와야겠단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숨어있는 찐맛집을 발견한 것 같았다.
“기가 막히지?”
“이거, 고기에 양념이 들어가 있네요?”
“간장으로 밑간 정도는 한다고 하더라고.”
“냉면도 다 먹지 마. 면을 조금 남겨.”
“…?”
이런 미친 맛 앞에서 어떻게 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을까?
정말 정신을 쏙 빼놓고 차돌박이 한 판을 게 눈 감추듯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다음 스테이지로 손 부장은 전골로나 먹을 법한 토시살을 한 접시 추가로 시켜놓고는 가위로 남아 있는 냉면을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이 집에 오자고 하시는 거 보니까, 여기서 바로 퇴근하자… 뭐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손 부장의 말에 장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업 쪽 일 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이런 일탈이라도 없으면 어디 숨 막혀서 출근이나 제대로 하겠어? 오늘은 여기서 바로 퇴근한다. 그러니까 허리띠 풀 때 긴장도 같이 풀고 마음 놓고 마셔 보자고.”
“넵!”
새로 시킨 토시살은 그냥 구색 맞추기 식이었고, 진짜 술안주는 가위로 잘게 자른 냉면이었다.
워낙에 잘게 자른 탓에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됐는데, 그게 또 희한하게 기가 막힌 술안주가 되고 있었다.
소주를 이렇게 감칠맛 나게 마셔 본 적이 있었던가….
소주 한 잔을 입에 넣고 아쌀한 알코올 향이 입안에 감돌기 시작할 즈음, 차가운 냉면 한 숟가락을 입안에 넣어 보니 육수 추가는 당연한 순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깃집에 와서, 그것도 소고기를 먹으러 와서 고기가 아닌 다른 거로 배를 채운다는 건 내 고기 인생에선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인데, 이 집만은 예외였다.
비록 고기는 맛만 보는 정도였지만, 기분 좋게 배가 불러왔고, 또 그보다 더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문 차장이 그래도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요. 순발력이 떨어져서 처음 해보는 일에 버벅거리는 감이 아쉬워서 그렇지, 어느 정도 경험이 있어서 손에 익은 프로젝트들은 굳이 확인을 안 해도 완벽에 가깝게 일을 쳐내더라고요.”
알렌 강의 말에 손 부장의 광대뼈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천하기 시작했다.
“이번 만토바, 메칭엔 건도 문제없이 쳐낼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본사 입장은 어떻습니까?”
알렌 강이 물었다.
“입장이라면….”
“가장 좋은 카드를 폴앤크루 쪽으로 쓰라고 주신 거 아닙니까. 이사님 스타일을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한 식구라고 공짜로 챙겨주셨을 리는 없을 거 같은데…”
“상무님 생각이셨습니다.”
“…!”
“메칭엔 쪽은 이미 예전부터 두드려 보자는 말이 나오던 상황이었지만, 폭스타운 쪽에 폴앤크루를 가지고 딜을 쳐보자는 건 상무님 생각이셨어요. 마침 이게 중간에 CGM이 걸려 있어서 두 곳을 동시에 공략하는 게 타이밍상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던 거죠. 저 역시 그게 가장 합리적인 딜이 될 거 같다고 판단했고, 사장님, 전무님도 폴앤크루 측에서 예산에 여유만 있다면 기회를 한번 줘 보자… 하는 입장이셨어요.”
하지만 세 사람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뭡니까, 그 눈빛들은?”
“에이, 그러지 마.”
장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속내를 밝히기 위해 능구렁이로 변하고 있었다.
“뭘요?”
“그냥 시원하게 말해. 본사 측에서 원하는 게 뭐야.”
“없는데요.”
“이사 달더니 얼굴에 철판이 더 두꺼워졌네. 쉽게 가자, 공 이사. 우리 사정 빤히 다 알면서. 이 정도 큰 건을 우리 쪽 실적으로 잡아 줄 때엔 국내 마진 조정 정도로 끝내진 않을 거 같고…”
“마진 조정이요? 해 주실 겁니까? 우린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
“아, 진짭니다. 안 그래도 바닥까지 박박 긁어 주신 거 빤히 아는데, 거기서 무슨 마진 조정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우리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양심이라는 단어가 공 이사 네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단어야?”
“우와, 진짜 꼴랑 고기 몇 점 사 주시면서 사람 너무 이상하게 몰아가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널 몰라? 나중에 가서 뒤통수치지 말고, 그냥 지금 말해.”
“우와…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 이거죠? 저는 진짜 간만에 다 같이 모여서 기분 좋게 술 한잔 하나 했는데, 이걸 또 영업으로 자리 성격을 확 바꿔버리시네….”
“진짜 아무것도 없어?”
“아, 있을 게 뭐가 있습니까? 유통 판들 상대로 컨트롤 기업이 칠 수 있는 딜이라고 해 봤자, 매장 임대료 조정, 매출 퍼센티지 조정 정도밖에 더 있습니까, 브랜드 입점 건을 제외하면. 폭스타운, 메칭엔 쪽으로 자리 확보가 가능하겠다 싶은데, 막상 남의 브랜드 팔아줘서 뭐 할까 싶었고, 그럼 이 기회를 우리 브랜드 띄우는 데 사용하자 해서 폴앤크루를 밀었던 거뿐이라고요. 제가 말했잖아요, 제 생각이 아니라 상무님 생각이라고. 상무님이 어디 저처럼 계산이 많은 사람입니까, 어디. 폴 아닙니까, 폴. 폴앤크루의 폴을 담당하고 계시니, 자기 이름 들어간 브랜드 제대로 한번 띄워 보겠다는 욕심… 그 이상 뭐가 더 있겠습니까?”
왜 날 못 믿지?
도대체 이 사람들한테 나란 사람의 이미지가 어떻게 각인이 되었길래 이런 의심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뭐 하는 거야? 하지 마, 하지 마. 아, 진짜 계속 그러면 나 화낸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온 상황.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할 때였다.
난 미리 대리운전 기사님을 부른다는 명분으로 밖으로 나가는 척하며 식당 주인에게 내 법인 카드를 전달했다.
그 모습을 본 장 대표가 서둘러 다가오면서 정색을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표가 올라오고 있었다.
“누가 내면 어떻습니까, 결국 회삿돈인데…”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지, 이건 매너가 아니야, 공 이사.”
“우리 사이에 무슨 또 매너를 찾습니까?”
“점심 사 달라고 하더니 이러자고 찾아왔던 거야?”
“같이 먹어 달란 말이었지, 제가 어디 돈이 없어서 대표님 찾아갔겠습니까?”
“아, 누가 돈이 없어서 얻어먹으러 왔대 하아, 참 진짜…”
그렇게 난 식당 앞에서 대리 기사님을 불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 뒷자리에 앉아 상무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나도 이제 막 사장님 미팅 끝내고 나오는 길. 식사를 잘하셨어요?
“네, 저희도 이제 막 끝났습니다.”
-대접은 잘했어요?
“네,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폭스타운, 메칭엔 두 곳에 동시에 매장 오픈을 하려면 본사 투자가 필요하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상무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장 대표 금융권 투자 쪽으로는 약간 거부감이 있는 거. 본사 쪽 투자를 받고 싶다고 하길래, 그 부분은 아마 큰 문제가 없을 거 같다는 정도로 전달했습니다.”
-잘했어요. 수고 많았어요.
“아닙니다.”
며칠 전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 홍성 타워 오프닝 행사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안 부장은 취리히에서 곧장 열차를 타고 메칭엔으로 향한 상태였기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난 상무님과 단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민규는 어떻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잘하고 있습니다. 뭔가 실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만 좀 적절하게 잘 눌러주면… 곧게 성장해 나갈 걸로 예상됩니다.”
“욕심이 많은 아이입니다.”
“아이라고 하기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잘 해내고 있는 홍성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내 눈엔 제깟 놈이 제아무리 더 나이를 먹어도 언제까지고 아이지, 뭐.”
“참 보기 좋습니다.”
“뭐가요?”
“저 역시 상무님과 민규만큼 많은 나이 차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가 한 명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하더라고. 난 공 이사가 맏인 줄 알았어. 그런데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나가 있다는 소릴 듣고 조금 놀랐어.”
“막내지만… 집안 사정상 꽤 오래 맏이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
“아무튼 상무님하고 민규 사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그 우애가 참 보기가 좋습니다.”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니까, 내 입장에선 동생이라고 하기보다는 살짝 아들 같은 느낌도 있어요, 민규를 보면.”
“그러신 거 같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민규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씩 들어요.”
“맏이에 대한 부담감… 뭐 그런 건가요?”
“음…그런 거보다는 가지고 있는 기질 자체가 나랑은 좀 많이 달라. 회장님을 닮은 건 나보다는 민규지. 나는 생긴 것도 그렇고 성향 자체가 어머니 쪽이고. 그래서 나는 내가 동생으로 태어나고 민규가 내 형으로 태어났음… 지금 내가 느껴야 하는 부담감, 압박감을 민규한테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오히려 그게 더 민규 입장에서도 자연스럽고 좋을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해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민규… 어때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이 좀 있어 보여요?”
그때 난 상무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질문을 던지시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쉽사리 잘한다, 가능성이 있다 하는 식의 성의 없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장남, 차남… 이런 거 다 떼놓고 그냥 단순히 나랑 비교를 해 봤을 때 말이에요. 공 이사는 나 홍성에 처음 입사하고 바닥 일 배울 때부터 다 옆에서 지켜봤잖아.”
“….”
“나보다는 민규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 거 같다고 공 이사가 이야기를 해줬음 좋겠어, 나는.”
“…!”
“회장님… 아니, 우리 아버지… 앞으로 사시면 또 뭐 얼마나 더 길게 사시겠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 나야 우리 아버지 하루라도 더 오래 사시면 좋지. 그런데 지금 내 위치가 오로지 효자 역할만 할 수 없다는 게 문제 아니에요.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준비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일전에 사장님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창립 이래 현재 홍성은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든 거 같다고. 이대로 쭈욱 유지만 해 나가면 되는 건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러십니까?”
“언제는 띄우는 건 쉽지만 그걸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말해 놓고선….”
“크흠….”
“공 이사가 봐도 나는 아니잖아.”
“아, 또 뭐가요?”
“알면서 그렇게 확인받듯 되물어 보는 버릇 좀 고쳐요. 용기 내서 말 꺼내는 사람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 모르죠?”
“….”
“나는 아버지랑 달라요, 공 이사. 아버지는 평생을 홍성을 위해 사셨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살 자신이.”
상무님의 용기는 진심이었다.
“아버지 말씀처럼 애쓰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어. 그래서 해 봤잖아, 내가. 그런데 결과는? 공 부장이 가장 잘 알겠지만, 나로 인해 공 부장, 장 대표… 홍성의 쌍두마차를 동시에 잃을 뻔했어요. 나 때문에 말이야. 이건 뭐 내가 홍성 입장에선 간첩이지 어떻게 후계자감이라고 할 수 있겠냐고.”
“그건….”
“나 그때 정말 최선을 다한 거였어요.”
“…!”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내가 지금껏 살면서 그림도 그렇게 열심히 그려 봤던 적이 없어. 그만큼 그 순간 알렌 강 영입하고 폴앤크루 분리 경영시키는 부분에 하루 서너 시간 자 가며 최선을 다했었다고.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요? 결국은 내가 오답이고 공 이사가 정답이었잖아.”
“상무님.”
“위로를 받자는 게 아니라, 공 이사의 도움을 좀 받자고 이 말을 꺼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내 말 끊지 말고 좀 들어만 줘요.”
“…네.”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요.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게 있구나. 애를 쓴다고 다 되는 건 아니구나… 그렇다면 내가 홍성을 위해,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으신 홍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과연 뭐가 있을까… 홍성을 위해 내 인생 전부를 다 바칠 마음은 없지만, 어쨌거나 홍성 덕에 내가 지금 이렇게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요? 그럼 그에 상응하는 보답 정도는 할 수 있어야 그게 사람이라고 난 생각해.”
“….”
“딱 아버지 살아 계실 때까지만… 아버지가 바라시는 후계 구도대로 따르고 그 뒤엔… 난 좀 뒤로 물러날 수 있음 좋겠어요.”
“상무님!”
“아직 안 끝났어요, 내 말. 좀 들어만 달라니까.”
“하아….”
“나보단 민규가 나아. 이건 확실한 거예요. 기질이나 모든 면에서… 후계자 자리는 나보다는 민규가 좀 더 잘 어울려. 그런데 또 너무 어리지, 홍성을 혼자 짊어지고 가기엔.”
“….”
“나 이 계산 급하게 한 거 아니에요. 공 이사랑 장 대표 잡겠다고 본사에 든 내 지분 빼서 폴앤크루 지분 사들이고, 일본에 폴앤크루 로드샵 깔 건물 매입할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난 준비를 하고 있었어.”
“흐음….”
“한 몇 년 민규 녀석 바르게 올라오는 거 지켜보다가… 나는 뒤로 물러날게요. 아버지가 사장님을 전적으로 믿고 회사를 맡기셨듯… 난 공 이사를 믿어 보려고. 그렇게 해도 되죠?”
“아니오. 안 됩니다, 상무님.”
“공 이사….”
“저 이제 막 이사 달았습니다. 저한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힘이 있다 한들, 저한테 그럴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너무 혼자 편하게 사시려고 하는 건 아닙니까? 아직 젊으십니다. 그리고 사장님도 아직은 건재하시고.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공 이사가 필요한 만큼의 힘… 그 힘은 내가 실어 줄게요.”
“…!”
“나 회사에서 그 정도 파워는 됩니다. 그리고 공 이사한테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어요. 지금의 홍성은 누가 뭐래도 회장님 세대의 원로들이 다져 놓은 기반에 공 이사가 이끈 영업부가 건물을 올리고 시스템을 다 갖춰서 완성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걸 누가 부정하겠어. 그리고 난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
“공 이사는 일하는 게 즐겁다면서요. 회사 나와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또 그 안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행복이라며. 그런데 난 아니야. 난… 마치 내 몸에 안 맞는 옷을 억지로 껴입고 있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출근을 하고 있어요. 지금 바로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잖아.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무책임하게 모든 걸 다 내팽개치겠다는 뜻도 아니고.”
“회장님은 모르시는 내용인 거죠?”
“아시면 저 죽어요. 아무리 기력이 없으셔도 그 말씀 듣는 순간 바로 번쩍하고 일어나셔서 저 때려죽이겠다고 달려오실걸요? 어머니는 대충 눈치는 채고 계실 거예요. 무엇보다 자식들의 행복이 우선인 분이시니 큰 문제 없어. 사장님이 전무 시절 때부터 날 붙잡고 가르치셨듯… 앞으로는 공 이사가 민규를 잡고 좀 가르쳐주세요. 부탁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