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명품의 조건
폭스타운 측이 던진 러브콜에 대한 홍성의 대답은 ‘살려는 드릴게…’였다.
그리고 그 대답을 홍성은 돌려서 하지 않았다.
호의와 친절도 상대를 봐 가면서 베풀란 말도 있지 않는가.
CGM의 몰락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거고, 더불어 폭스타운 자체 쪽으로도 엄격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는데, 그 경고에 상대가 아무런 저항도 못 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몇몇 브랜드 쪽에서 홍성의 입장을 물어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홍성의 선택에 따라 그들 역시 노선을 정하겠단 입장이겠지요. 홍성은 폴앤크루의 폭스타운 입점 가능성 유무를 가지고 브랜드들 쪽으로 폭스타운과 홍성의 향후 관계에 관한 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
-…!
“저희가 원하는 건 CGM이 업계에서 아웃을 당하는 거지, 폭스타운과 같은 상징성 있는 든든한 유통 판이 업계에서 철수를 하는 게 아닙니다. 폭스타운과 직접적인 감정은 없다는 부분,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선 마크 창과 직접 만나 그간의 오해를 다 풀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서 가능하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야 큰 상관이 없지만, 저희 결정에 따라 폭스타운에서 철수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브랜드들 입장에선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질 겁니다.”
폭스타운 측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내가 직접 그쪽으로 전화를 걸어, 그쪽 총괄 대표와 통화를 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폭스타운 오퍼레이션 매니지팀이라는 부서에서 홍성 본사를 통하지 않고 폴앤크루 쪽으로 직접 연락을 취해 폴앤크루의 폭스타운 입점을 제안해 왔다는 연락을 받게 됐다.
-얘네들 일하는 거 가만히 보면 참 성의가 없는 거 같아.
장 대표와의 통화.
장 대표는 우선 폭스타운 쪽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그 연락을 받게 된 과정을 가지고 폭스타운 쪽의 부실한 시스템을 지적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홈페이지 들어와서 조금만 검색을 해 보면 폴앤크루가 홍성에서 분리된 자체 브랜드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건데, 브랜드 컨택할 때 그런 것도 제대로 안 알아보나 봐. 자기네 보스가 컨택을 한 게 우리 폴앤크루였는지, 아님 홍성 본사 쪽이었는지도 모르고 우리 쪽으로 연락을 했더라고.
“하이고…”
-아무튼… 여러모로 신경 써 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이런 기회를 잡고 거기다 쁘띠토널을 넣자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쁘띠토널이야 폴앤크루가 먼저 들어가서 제대로 자리만 잡아 놓으면 언제든 홍성이 원할 때 넣을 수 있게 되는 거고… 근데 메칭엔 쪽도 본사에서 신경 써 준 내용이야?
“연락왔습니까?”
-메일이 한 통 왔더라고. 아직 직접 연락을 해 본 건 아닌데 메칭엔으로도 입점할 생각이 있느냐는 식으로….
“안 부장이 이번 스위스 출장길에 저랑 상무님보다 이틀 일정 더 붙여서 메칭엔을 한번 찍고 왔습니다. 안 그래도 대답이 긍정적이었다고 보고는 받았는데, 생각보다 대답이 빨리 나왔네요.”
-그럼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데, 폴앤크루 입점을 그쪽에서 먼저 제안을 할 이유가 없지. 뭘 가지고 딜을 넣었어?
“결국은 폭스타운이죠. 폭스타운의 마크 창이 홍성 타워 오프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걸 알고 있느냐는 식으로 먼저 딜을 걸었던 모양이더라고요. 어차피 메칭엔도 굵직한 브랜드들 중 아웃렛으로 안 빠지는 브랜드들은 다 CGM 라인을 통해서 섭외를 해 왔잖아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 CGM이 현재 처한 상황, 그리고 계속 CGM 라인만 고집하다 보면 어떻게 될 거라는 거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겠죠. CGM라인 통해서 섭외한 브랜드들 대부분을 만토바, 링겐 쪽 통해 홍성이 중간에서 연계해 주는 조건으로 딜을 쳤습니다.”
-안 부장 그놈도 진짜 보통은 아니야. 언제 시간 한번 만들어 줘.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 아냐. 내가 개인적으로 한잔 제대로 살 테니까.
“또 이러신다.”
-뭐가 또?
“이걸 어떻게 술 한잔으로 퉁치려고 하십니까? 거기다 저는 쏙 빼놓고. 오늘 점심 어떠십니까? 간만에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저 점심이나 좀 사 주십시오.”
-제수씨는? 제수씨랑 같이 안 먹어도 돼?
“지난주부터 집에 있습니다.”
-아, 휴가?
“네. 지금부터 슬슬 몸 만들어야죠. 점심 약속 따로 없으시죠?”
-없어. 와. 잘됐다. 간만에 낮술 한잔 할까? 요즘 퇴근하고 제수씨랑 같이 있는다고 술은 구경하기도 힘들 거 아냐.
“역시….”
대충 업무를 정리해 놓고 삼 부장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별도의 보고 내용이 있는지를 물어봤다.
특별한 내용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난 곧바로 짐을 쌌다.
그리고 사무실 락을 걸어놓고 상무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점심 안 가십니까?”
그제야 상무님은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으로 왼쪽 손목 소매 부분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좀 볼 게 있어서… 어디 가요?”
“네, 저 지금 폴앤크루 본사 가는 길입니다. 아마 거기서 바로 퇴근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외근?”
“인 척하면서 술 한잔 얻어 마시러 가는 길입니다. 폭스타운, 메칭엔 입점 관련해서 정보도 좀 공유해 주고, 이것저것 편하게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술 한잔은 들어가야 할 거 같네요.”
“하긴 퇴근 후엔 또 집에 가서 할 일도 많을 테니까….”
“같이 가자고 해도 안 된다고 하실 거죠?”
“꼭 그렇게 대답을 해 주길 바라는 거 같은데?”
“설마요. 괜찮으면 같이 가시죠.”
“아니, 아니… 그냥 해 본 소리. 나 지금 숙제가 너무 많이 밀렸어.”
“숙제요?”
“회장님이 주신 개인적인 숙제. 머리 깨질 거 같아. 점심 먹을 여유도 없을 거 같아요, 오늘은.”
“그럼 햄버거라도 하나 사서 올려 보내드립니까?”
“아니에요, 나 이거 정리하고 또 곧바로 사장님한테 보고하러 올라가야 돼.”
“쉬엄쉬엄하십시오.”
“왜 이렇게 계속 놀리는 거 같지?”
“놀리는 거 맞습니다.”
“헐….”
“그럼 수고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 * *
폴앤크루 본사.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곧바로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 장 대표였다.
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신의 사무실로 알렌 강과 손 부장을 불러들여 놓고 폴앤크루의 폭스타운, 메칭엔 입점 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 대표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 차장이었다.
“저… 부장님.”
“들어와.”
아마도 손 부장에게 뭔가 급하게 전달할 내용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대표실을 찾은 문 차장을 향해 장 대표가 대수롭지 않은 듯 손짓을 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문 차장은 문 앞에서 내게 눈인사를 건넨 뒤 들고 온 서류를 손 부장에게 전달했다.
“뭔데?”
“방금 폭스타운 쪽에서 우리 폴앤크루 쪽으로 제공하겠다는 매장의 도면이 도착했습니다.”
“근데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심각해?”
“이게 매장 사이즈가… 288제곱미터입니다.”
문 차장의 대답에 손 부장뿐 아니라 나와 장 대표, 알렌 강 모두는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거 기존에 발리가 들어가 있던 매장이라고 그쪽에서 먼저 설명을 했잖아요.”
알렌 강의 말에 문 차장은 두 눈만 깜빡이며 혀끝으로 입술을 살짝 적셨다.
“아….”
그리고 손 부장이 그제야 왜 문 차장이 저렇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급하게 대표실을 찾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문 차장은 폭스타운 한 번도 안 가봤겠구나. 하긴 홍성 본사에 있을 때도 줄곧 중국 관련 해외 영업부 일만 해 왔을 테니 무리도 아니지.”
그제야 우리 모두는 왜 문 차장이 저렇게 당황을 하고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288제곱미터면… 한국 아파트로 따지면 90평 정도 되는 크기 아닙니까?”
“매장 면적이니까 매장 앞에 에스컬레이터 자리, 화장실 복도 다 빼고 나면 70평 정도 된다고 보면 될 거야. 폭스타운에서 제일 큰 자리야, 거기. 그 앞으로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화장실 다 모여 있다고. 폭스타운 딱 들어가면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탐스 매장이 제법 크게 하나 있어.”
“그거 없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에실리 들어가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거 지나서 푸드코트가 있는데, 그 끝에 또 맥도날드가 있거든. 거기까지 나오면 이제 폭스타운 센터라고 보면 돼. 그 센터에 디올부터 시작해서 아웃렛에 잘 안 들어가는 기성 브랜드들이 쫙 모여 있거든. 거기서도 제일 중간에 알 박고 있는 자리가 예전 발리가 있던 자리야.”
“아… 저는 또 혹시라도 모르실까 해서… 매장 규모가 현재 폴앤크루가 확보하고 있는 컬랙션들을 다 포지셔닝시킨다고 해도 부족할 거 같은데….”
“거기 시즌 제품만 넣어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말이 아웃렛이지, 이월 제품만 밀어 넣을 이유는 없어요, 그 자리는. 이월 제품만 넣을 거 같았으면 폴앤크루를 가지고 딜을 치지도 않았죠, 제가. 폴앤크루가 어디 재고가 남는 브랜드입니까?”
“그런데 이사님.”
문 차장이 손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날 불렀다.
“편하게 이야기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와서 앉아. 자리 많구만 뭘 또 그렇게 벌서는 사람처럼 혼자 쭈뼛하게 서서 그래?”
장 대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 차장은 손 부장의 옆자리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분 대표님부터 시작해서 부장님까지 이건 무조건 기회다, 잡아야 한다고 하셔서 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진행을 하고 있기는 한데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사님이 계시니까 오신 김에 여쭤보는 건데… 꼭 폭스타운에 폴앤크루를 입점시켜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메칭엔 쪽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데, 그 두 대형 아웃렛에 입점을 시키게 되면 사실 그동안 폴앤크루가 만들어가고 있던 브랜드 콘셉트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 차장의 걱정에 손 부장은 자신이 그 부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애꿎은 콧등만 긁어댔다.
그 어색해진 분위기를 희석시키기 위해 난 홍성 본사 측의 실수를 인정하며 문 차장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줬다.
“폴앤크루 영업에 홍성 본사 측에서 무리한 딜을 친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걸 쳐내야 하는 문 차장 입장에선 많은 부분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 문뜩 드네요.”
“아닙니다. 저는 다만… 이사님도 아시겠지만, 원래 제가 좀 성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 해도 될 실수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그 성급함이라는 약점을 보완해 보려다 보니 이젠 의심병이 시작된 거 같습니다.”
“이미 지금 충분히 성급하거든? 기다리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설명을 안 해줄까….”
손 부장이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문 차장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문 차장은 손 부장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러놓고 가만히 좀 있어 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문 차장에게 내가 말했다.
“목표를 알고 달려야 사람이 안 지치죠. 뭘 위해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라고 하니까,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면 거의 다 와놓고 결승전 앞에서 포기를 하게 될 수도 있어요. 폭스타운과 메칭엔에 들어가게 될 매장들은… 무조건 마이너스를 치게 될 겁니다.”
내 말에 문 차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장 대표부터 시작해 알렌 강, 손 부장의 표정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이미 그 정도는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식의 무표정을 유지하자 문 차장은 수차례 눈을 감았다 뜨며 날 쳐다봤다.
“우선 매장들이 다들 하나같이 대형 사이즈이고, 위치 자체도 알박기 된 위치들이다 보니 매장 임대료부터 크게 부담스러울 겁니다. 그리고 그 큰 매장에 맨파워를 심기 위해선 인건비 역시 적지 않게 나갈 겁니다. 그렇다고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냐. 글쎄요, 거기선 평타를 쳐도 마이너스입니다. 폴앤크루의 가격 포지셔닝 자체가 그래요. 포스기가 쉬지 않고 계산을 해주지 않고서는 마이너스를 절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폭스타운과 메칭엔 입점을 기회라고 생각하느냐고요?”
“…네.”
“명품의 조건…. 문 차장님은 폴앤크루와 같은 기획 브랜드가 명품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해요?”
“음…”
“그게 어려우면 단순하게 명품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엔 뭐가 있을까요?”
“역사?”
“어느 정도?”
“….”
“그럼 폴앤크루처럼 이제 막 시작한 브랜드들은 그 역사가 쌓이기 전까지는 명품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까요?”
“브랜드 퀄리티도 어느 정도 작용을 할 거고, 인지도, 거기다 가격 포지셔닝, 유통력…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겠죠.”
“가장 중요한 게 빠졌어요.”
“…?”
“바로 업계의 인정과 동의라는 부분이죠.”
“…!”
“지금 폴앤크루는 그 업계의 인정과 동의라는 걸 동시에 받아낼 수 있는 기회 앞에 서 있는 겁니다. 폭스타운, 메칭엔… 거기다 한쪽 귀퉁이도 아니고 각 유통 판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센터 자리에 매장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이미지 샵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거기서 매출을 올려서 돈을 만들겠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폴앤크루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해당 국가의 대표 컨트롤 업체들을 직접 만나 펼쳐야 할 영업. 그리고 그 영업에 들어갈 시간과 비용을 폭스타운과 메칭엔 아웃렛 매장 오픈 쪽으로 집중시킨다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 같네요.”
“아, 네….”
“이미 업계는 홍성 본사와 CGM이 갈등 구도에 놓여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폭스타운이 CGM을 놓는 순간 메칭엔 역시 CGM을 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홍성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순간, 업계는 홍성의 다음 행보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홍성이 그다음 행보로 곧장 폴앤크루라는 카드를 들고나와서 CGM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두 대형 유통 판에 폴앤크루 매장을 오픈해 버리면…. 폴앤크루는 곧 홍성 인터내셔널의 비장의 무기가 되는 거고, 자연스럽게 업계의 인정과 동의를 동시에 얻어낼 수 있게 되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