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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05화 (305/325)

#305

저희들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내가 그의 존재를 눈치챘을 땐, 그 역시 나란 사람의 존재를 미리 파악하고 있는 눈치였고, 그런 서로의 눈치가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날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 목적이 나라는 걸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의 방향을 틀었고, 난 여전히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다른 곳을 주시하며 안 보는 척 그의 동선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 준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공간으로 마크와 그의 수행 비서쯤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아시아계 남자 하나가 완전히 들어오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이목은 나와 마크 창에게 집중되어 버렸다.

“이곳을 찾게 될 고객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아주 훌륭한 공간을 만들어내셨습니다.”

“…?”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터 공. 안창 홀딩스의 마크 창이라고 합니다.”

참 난감한 순간이었다.

상무님이 옆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아직 상무님의 존재를 새까맣게 모르는 듯, 이 공간의 호스트가 나라고 생각하고 대표로 내게 인사를 건네오는 상대.

그리고 그 상대는 비록 적진의 인물이지만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얼굴이 잘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난 그의 손을 일부러 잡지 않았다.

당황을 하거나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느라 손을 잡을 타이밍을 놓쳤던 게 아니라, 그냥 일부러 그가 내민 손과 그의 두 눈을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그 상황 자체가 무척 불쾌하고 또 민망했을 법도 한데 상대는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내민 손의 손바닥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더니, 내가 보이는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몇 차례 손을 말았다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지만 오래전부터 건너, 건너 미스터 공에 대한 이야기는 몇 차례 들었습니다.”

“저란 사람이 수집할 정보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사업 이야기를 같이 좀 나눠 볼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사업 이야기요?”

“아, 물론 현재 홍성과 CGM과의 관계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 개선을 위한 자리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약속은 미리 드리겠습니다.”

“…?”

“괜찮으시다면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게스트들이 많네요. 귀중한 시간 조금이라도 제게 할애를 해 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이가 없게도 그가 남기고 간 건 그의 명함이 아니라 홍성 타워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호텔 카드였다.

우리 상식에서는 이해하기가 조금 부담스러운 행동이긴 했지만, 일단 그의 의도는 대충 어떤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있었고, 거기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인물을 홍성 타워에 남겨놓고 간 것으로 봐서 그가 한 말처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다리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나 흘렀을까.

대충 인사를 나눠야 할 사람들은 다 만난 거 같았다.

그리고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게스트들을 모시고 다 같이 하기로 되어 있는 점심 시간까지도 얼추 1시간 이상은 시간이 남아 있었고.

“만나서 이득일 건 없겠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볼 것도 크게 없을 거 같은데… 상무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다녀오세요.”

“저 혼자선 안 가죠.”

“…?”

“같이 가셔야죠.”

“제가 거기 끼어서 뭐 하겠습니까? 절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 공 이사를 만나러 온 거 같더만.”

“또, 또….”

난 이젠 지친다는 듯 상무님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또 도지셨네, 우리 상무님 소심병.”

“뭐요?”

“사업 이야기를 하자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뭐라고 딱 저만 만나러 왔겠습니까. 홍성과의 만남이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상무님이 앞으로 나오셔야죠, 상무님이 여기 안 계신 것도 아니고… 아마 상대는 인터라켄의 홍성 타워 오프닝 행사 때처럼 제가 홍성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온 거로만 알고 있을 겁니다. 상무님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저에게 약속을 제안했던 거겠죠.”

“….”

“같이 한번 가 보시죠,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한번 들어 보는 것도 크게 나쁠 거 같지는 않습니다.”

“하긴, 이렇게 업계 관계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나름 얼굴 꽤나 팔린 사람이 저렇게 직접 찾아왔는데, 그 자리를 거절하는 것도 딱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겠죠?”

“네, 아마 같이 점심을 하기로 한 파트너들도 왜 마크 창이 직접 여기까지 왔는지 다들 궁금해할 겁니다.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점심 식사 자리에서 어떤 주제로 분위기를 띄울까 걱정이 많았는데, 식전주 안주로는 손색없겠네요.”

안 부장에게 뒷정리를 부탁해 놓고 상무님과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미리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는 섬세함에 처음 놀랐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땐 혼자서 호텔 라운지 한쪽 테이블을 잡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마크 창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정말 오로지 우리와의 만남을 위해 시간을 다 비워 놓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나와 상무님이 라운지 안으로 들어서자 상대는 앉아 있는 동안 주름이 생겼을 재킷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 반대편 쪽으로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다.

이미 그의 커피 잔은 비어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호텔 종업원에게 나와 상무님 쪽으로 먼저 손짓하며 주문을 받으라고 부탁을 했고, 우리 쪽 주문이 끝이 나자 다시 커피 한 잔을 더 주문을 하는 마크 창.

“디스 이즈 마이 보스.”

난 대화에 들어가기 전 마크 창에게 상무님의 존재를 정확하게 밝혀 두었다.

조금 전 홍성 타워에서 상무님을 앞에 두고도 나에게 약속을 제안한 건, 물론 고의는 절대 아니었겠지만 약속을 제안해 오는 쪽의 실례였음을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그제야 마크 창의 여유로웠던 얼굴에 당황이 스미기 시작했고,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자신의 비즈니스 카드를 상무님과 나에게 각각 건넸다.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우리 쪽 명함은 상무님의 명함 한 장이면 충분할 테니까.

상무님은 자신의 명함을 마크 창에게 전달한 후, 마크 창의 명함을 앞뒤로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그 명함을 명함집 안으로 챙겨 넣지 않고 테이블 한쪽으로 조심히 내려놓았다.

“패밀리 네임이 전이라면 혹시… 미스터 전의 아드님이십니까?”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께 홍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미스터 전에 대한 강한 인상을 항상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이젠 업계에서 전설이 된 이야기 아닙니까. 이탈리아 본진도 아니고 홍콩에서 그것도 자본도 부족한 상태로 사필로를 뚫고 그렇게 확보한 사필로 선글라스로 지금의 홍성을 만들어낸….”

홍성의 태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상대였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당시 미스터 전이 홍콩에서 사필로의 한국 라이선스를 따낼 당시 사필로 측과의 다리를 놓아준 게 제 아버지 세대의 안창 그룹이었다는 걸.”

“…!”

“물론 제 아버지께서 직접 하신 건 아니지만, 그만큼 저희 안창과 홍성은 인연이 깊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벌써 30년도 훨씬 더 전에 있었던 이전 세대의 일을 한번 꺼내 봤습니다. 참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씩 홍성에 관한 뉴스가 업계에 나올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성공을 멀찍이서 지켜보시는 것처럼 흐뭇해하셨고, 또 응원을 하셨죠. 그리고 저는 그럴 때마다 한국인들의 집요함과 끈기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세뇌당할 정도로 들어야 했습니다.”

대화의 맥을 끊어야 했다.

감성팔이나 들어 주자고 온 건 아니니까.

“홍성 역시 홍성의 오랜 파트너였던 폭스타운과 지금처럼 대립을 하게 된 걸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마크 창은 진심으로 참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홍성은 CGM 쪽에서 한국 시장 진출에 관한 과한 욕심을 내기 전까지 만토바와 폭스타운, 그리고 링겐 이 삼사 대형 일차 벤더들을 상대로 최대한 균형을 잡아가며 물건을 사입해 왔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떨 땐 브랜드에 따라 벤더를 갈아타는 게 더 이득일 때도 있었죠. 아니, 많았죠. 하지만 그럴 때에도 저희 홍성은 파트너들에 대한 의리와 오랜 세월 함께 쌓아온 신뢰 때문에 조금의 손해 정도는 감수하고 가는 걸 일종의 원칙처럼 생각하며 사업을 해 왔습니다.”

“그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이 관계가 너무 안타까워 이렇게 직접 만남을 청하게 된 거죠.”

역시 보통은 넘는 상대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교묘하게 자기 쪽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저희 안창 그룹이 CGM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가지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 세월이 넘었습니다. 처음 홍콩 하버시티에 폭스타운이라는 당시 아시아 유일의 대형 아웃렛 매장을 오픈할 당시에도 저희 쪽으로 브랜드를 공급해 줬던 게 바로 CGM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죠. 그리고 그 도움에 대한 고마움을 저희는 이곳 스위스 루가노에 CGM이 기획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에 대단위 투자를 밀어넣는 것으로 대신 갚으며 꾸준히 관계를 발전시켰습니다.”

“….”

“시절이 좋을 땐 작은 실수 정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죠. 저희 안창과 CGM은 지난 20년 세월 참 좋은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하버시티에 폭스타운이 오픈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이 아시아 럭셔리 쇼핑의 메카로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아시아 최대 규모 유통 판을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저희 안창과 손을 잡고 홍콩 시장에 들어오길 희망했죠.”

“그 덕에 지금의 CGM이 있을 수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폭스타운이라는 유통 판이 없었다면 그 시절 CGM이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이긴 하죠. 그리고 루가노 쪽의 대단위 투자를 저희 쪽에서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브랜드들을 계속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거고.”

“결국 폭스타운 역시 CGM에 예측에 투자를 해 미리 스위스 시장을 확보한 덕에, 유럽 쇼핑의 가장 피크였다고 할 수 있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많은 매출을 발생시킨 것 역시 사실이죠.”

“그렇죠. 딱 그때까지가 서로 좋을 시절이었죠.”

마크 창은 의도적으로 폭스타운이 CGM과 거리를 두려고 준비 중이란 걸 우리 쪽에게 어필하려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로 CGM의 경영 세대 교체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많은 잡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

“하지만 안창은 그래도 시간을 갖고 지켜봐 주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떻게 항상 좋을 수만 있겠습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딱 그 시기가 지나치게 호황이었던 거죠. 그때가 비정상이었고, 중국인들의 구매 파워가 서서히 사그러질 때쯤 올라오는 매출이 어쩌면 정상이다, 그래서 피크를 한번 찍고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이라고 보면서 CGM이 비록 진통은 있겠지만 성공적으로 세대 교체를 이뤄낼 수 있도록 파트너 입장에서 인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어놓고 나와 상무님을 번갈아 쳐다보는 마크 창.

“저희들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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