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꼬리 자르기
“임원 층 첫 출근 하시는 날, 이렇게 저희가 준비해 드린 한 벌로 쫘악 빼입고… 그렇게 첫 출근 하시는 겁니다.”
엄밀하게 말해 아직은 며칠이 더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물론 공식적인 업무 자체는 삼 차장들에게 다 나눠준 상태이지만, 아직 짐도 싸야 되고 인사부와 감사부에 각각 들러 형식적이나마 인터뷰를 해야 한다.
난 아직 준비가 덜 된 거 같은데 이렇게 남들이 미리 준비를 시켜 주니 그 기분 역시 살짝 새로웠다.
“고맙습니다. 잘… 입을게요. 그리고…”
난 영업부 전체를 향해 약속했다.
“지금 당장은 이것저것 정신이 없어서 좀 그렇고…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까지 오픈을 하고 나면… 그때 제가 영업부 전체 회식 한번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우리 차장님들 부장 승진 축하까지 다 같이 하면 될 거 같은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죠?”
그랬다.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었다.
우린 또 고작 승기를 잡았다고 벌써 다 이긴 것처럼 설레발을 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들이니까.
워낙에 변수가 많은 판이다.
그리고 CGM과의 전면전은 우리 홍성의 홈그라운드인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아직은 저들의 홈그라운드인 스위스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니까.
승기 한번 잡았다고 여기서 여유를 부리거나 방심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CGM 측으로부터는 그 어떤 해명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우린 그 해명, 혹은 사과의 정도에 따라 보여줄 입장의 강도를 달리할 생각이었다.
다들 겉으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
CGM이 끝까지 콧대를 낮추지 않기를 우리 모두는 속으로 바라고 또 바라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 그 거만한 자세를 유지해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명분 쌓기에 들어간 우리 홍성.
그리고 그렇게 CGM이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 쪽으로는 더 많은 명분만 쌓일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난 정든 영업 기획부 사무실을 떠나 임원 층으로 이사를 했고, 그 임원 층 출근 첫날 우리 영업부 팀원들이 선물해 준 정장과 가방, 그리고 미스터 스폰짜가 협찬을 해준 고급 수제화를 신고 회사로 향했다.
“투 머치다.”
“뭐가?”
“당신 말이야.”
“뭐 어쩌겠어, 꼭 이렇게 입고 출근을 하라고 하는데… 왜? 안 어울려?”
“어울리긴 어울리는데… 뭐랄까…. 너무 멋을 낸 거 같아서 오히려 촌스러운 느낌?”
“뭐 어때, 오늘 하루 정도는 다들 이해를 해 줄 거야.”
난 은행 앞에서 차를 세웠고, 출근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려는 집사람의 팔목을 급하게 잡았다.
그리고 집사람의 배 위로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로또야, 아빠 출근한다.”
집사람이 피식하고 웃는 동안, 난 여전히 로또를 어루만지며 계속 말을 걸었다.
“먹고 싶은 거 있음 엄마한테 사 달라고 해, 알았지? 그러지 말고 오늘 점심 아빠랑 같이 먹을까?”
“됐네요. 임원 달고 첫 출근인데, 사람들이 잘도 가만히 놔두겠다. 속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일찍 들어오기나 해. 틀림없이 승진 핑계로 누군가는 술 한잔 같이하자고 할 텐데, 요령껏 거절하고. 나 혼자 택시 타고 퇴근하게 만들면 진짜 안 된다?”
“그런 걱정은 하덜덜 말아요. 승진이고 나발이고 다들 정신없어, 지금. 다들 전투 모드라고. 들어가.”
“당신도.”
난 차를 세워둔 채 집사람이 은행 뒷문 쪽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사원 카드…. 어제 반납했습니다.”
“아, 그렇죠.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개찰구 앞이었다.
보통 일반 사원들은 사원 카드 마그네틱으로 직접 개찰구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임원들에겐 그 카드가 없다.
대신 그 앞에 서서 관리를 해 주시는 직원들이 임원들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그 개찰구를 대신 열어주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무척 어색하고 또 민망했다.
다행히 오랫동안 근무를 해 오셔서 나와 안면이 많은 직원분이 그 앞을 지키고 계셨는데, 전날 사원 카드를 반납했다는 말을 하자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듣고 자신이 가진 마스터 카드로 대신 개찰구를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짤막하게 고개를 숙인 뒤 임원 층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섰다.
그리고 혼자서 그 넓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임원 층까지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내부 철제 합판에 비친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광대뼈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록 바지 기장은 내 취향과는 달리 복숭아뼈 위로까지 올라와 있었지만, 그리고 벨루티 서류 가방은 아직은 내가 들기엔 사치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중이지만, 그래도 마냥 설레기만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임원 층 복도에 자리 잡고 있는 비서 데스크.
두 명의 대리 비서가 이미 출근을 해서 업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기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들의 얼굴에도, 평소와는 달리 임원 층 첫 출근을 하는 신입을 향해 인간적인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지나쳐 드디어 나의 첫 개인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전날 미리 세팅을 해 놨던 도어 록 넘버.
나와 강혜선의 결혼기념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물 정자를 누르자 삐리릭 하고 잠금 해제가 되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난 이미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던 것처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도어 록을 개방으로 변환시켜 놓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중요한 회의에 들어갈 때, 그리고 퇴근을 할 때에만 다시 잠금 모드로 바꿔 놓으면 된다고 들었다.
업무 중엔 계속 들락날락거려야 하고, 또 사람들이 사무실을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잠금 해제를 시켜 놓는 건 필수.
비록 완전히 새것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엔 새것이나 다름없는 소파, 그리고 집무 책상을 손끝으로 만져 가며 사무실 안을 한번 훑어봤다.
똑, 똑….
그리고 바로 그때 청소를 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유리문을 두드리셨다.
“이사님. 청소기 한번 돌려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첫 출근이시죠?”
“네.”
“그럼 쓰레기통 비울 것도 없겠네요. 빨리 청소기만 한번 돌리고 나가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아주머니가 청소리를 돌리시는 동안 난 컴퓨터 전원을 켜 놓고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소는 매일 이렇게 오셔서 해주시는 겁니까?”
“그렇죠. 저희는 다 마스터키가 있으니까, 출근들 하시기 전에 미리 청소 다 해 놓고 내려가죠. 너무 일찍 나오셔서 깜짝 놀랐네요.”
“아, 네. 하하하…”
“어제 기본적인 청소는 다 해 놨으니까 크게 할 건 없을 거 같아요.”
모든 게 다 새롭기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여기 이 자리까지 열심히 올라와 준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 여기까지 온다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은태야….
왜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조금 민망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칭찬을 해주고 싶은…. 그래서 비록 입 밖으로까지 소리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속으로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한없이 칭찬만 해주고 싶은 날.
지금이 딱 그랬다.
모든 게 다 새롭기만 했지만, 긴장이 되거나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따위는 하나도 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감만 넘쳐났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난 충분히 단단해졌다.
겁먹을 이유도 없고, 쓸데없이 긴장을 할 필요도 없으며, 과연 여기 이 사무실이 정말 내가 있어도 되는 공간인가 하는 의심 따윈 하지 말자.
다 회사가 달아 줄 만하니까 달아 준 것일 거고, 또 여기서 내가 이 자리에 걸맞은 실적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한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그만.
“일찍 왔네요?”
상무님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사무실 안으로 넣으며 상무님이 웃으셨다.
“출근하셨습니까?”
“간만에 1등 자리를 빼앗겼네.”
“네?”
“출근 말이에요. 지금까지는 내가 계속 출근 도장 1등으로 찍어 왔었는데, 오늘은 우리 공 이사한테 그 1등 자리를 뺏겼네.”
“아, 하하하… 저 때문에 오늘 와이프도 한 10분 정도 빨리 출근을 했을 겁니다.”
“알지. 그 기분 어떤 건지 대충 알지. 하하하… 커피 머신은 언제 또 넣었어요?”
“박 이사님이 선물이라고 한 대 사 주셨습니다.”
“우와… 개시는 했어요?”
“아직이요?”
“그럼… 그 개시할 때 나도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나?”
“그럼요. 물론입니다.”
“오케이… 그럼 나 얼른 내 방 가서 가방만 풀고 다시 올게요.”
임원 층이라고 해서 아침 출근이 여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하나둘씩 출근 도장을 찍는 다른 임원들의 모습을 통유리 벽을 통해 구경을 하고 있자니 오히려 일반 사무실이 조금은 더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출근을 하는 임원들의 모습은 전투 모드 그 자체였다.
누군가는 전날 있었던 뉴스를 인터넷 기사로 보지 않고 아직까지 신문으로 보는지 신문을 종류별로 챙겨서 출근을 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출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유 슈든 두 댓! 스탑 잇, 스탑 잇! 아 돈 워너 리슨 왓 유 세이…. 저스트 두 잇, 비포 위 리퀘스트. 이프…”
어느 누군가는 출근길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누군가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치며 출근길에 오르기도 했다.
마치 우아한 백조가 그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물밑에선 발버둥을 치듯, 평소 여유 있고 젠틀하게만 보였던 홍성의 인물들이 실상은 꽤나 처절하고 또 매 순간이 긴박했다는 걸 난 임원 층 출근 첫날 알게 됐다.
“전무님 출근하셨습니다.”
어디서 나온 소리였을까.
난 상무님과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온 안내 방송에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에 상무님은 피식하고 웃으며 천장 귀퉁이 한 곳을 눈짓했다.
“확실히 이 방이 스피커는 좋아요.”
“원래 이런 방송이 나오는 겁니까?”
“사장님, 전무님 차가 주차장에 진입하면 이런 안내 방송이 나오죠. 준비를 해야 되니까. 차단하고 싶으면 차단해도 되는데…. 이 방에서 특별한 미팅이 있거나 한 게 아니라면 켜놓는 게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할 거예요.”
“…?”
“언제 오시나… 하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오히려 출근하신 거 알면 난 더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이상하게 출근하시기 전에나 좀 긴장이 되지, 막상 전무님, 사장님 두 분 다 출근을 했다는 거 알게 되면 그때부터 더 일에 집중이 잘되더라고. 내가 약간 그런 스타일이에요, 벼락치기 스타일… 뭔가 죄어 주는 게 있어야 집중을 해요. 하하하.”
“아….”
“곧 익숙해질 거예요. 며칠 안 걸려요.”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 출근하셨습니다.”
사장님 출근 안내 방송이 나오기가 무섭게 상무님은 기지개를 크게 켜며 커피를 잘 마셨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그만 일어나 볼게요. 아침부터 보고드리고 깨질 게 몇 개 있어서….”
“상무님.”
“네.”
“힘내십시오.”
“놀리는 거죠, 지금.”
“그럴 리가요. 하하하…”
익숙하지 않은 환경, 하지만 익숙해져야 하는 환경에서 오전 근무를 쳐내고 있을 때였다.
안 부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사님. CGM 쪽에서 자기네 입장을 정리한 메일을 한 통 보내 왔습니다.
“제 메신저로 지금 바로 보내주세요.”
난 메신저를 통해 해당 메일을 전해 받았고, 요동치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켜 가며 간신히 그 메일의 내용을 끝까지 다 읽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김 부장과 양 부장, 안 부장을 모두 내 사무실로 불러올렸다.
삼 부장이 올라오기 전까지 CGM 측에서 보이는 뻔뻔함에 치를 떨며, 그와는 이율배반적으로 그렇게 뻔뻔하게 나와 주는 모습에 속으로는 여기서 우리 홍성이 좀 더 집요해져도 되는 명분을 잡은 거 같아 승부욕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은 한마디로 꼬리를 자르겠다는 거였다.
그 꼬리는 당연히 김형찬이고.
인터라켄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CGM은 해프닝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해프닝….
CGM 본사에서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고, 오히려 자기들은 김형찬으로 인해 자기네 기업 이미지가 업계에서 안 좋게 퇴색되지 않을까 우려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래.
사업을 하려면 최소한 저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유감이라고 한다, 유감.
김형찬이라는 인물로 인해 홍성과 CGM이 의미 없는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될까 우려가 된다며, CGM 본사의 의도와는 달리 이런 불필요한 해프닝이 발생한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큰 유감의 뜻은 전달한다고 한다.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러면서 독단적인 행동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김형찬은 자체 징계로 CGM을 떠나게 됐고, 또 해당 사건으로 CGM이 많은 브랜드들의 신뢰를 잃은 부분까지 감안해 김형찬을 업계 블랙리스트로 만들고자 하는데, 그 부분에 있어 홍성 측의 협조와 동의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라고 보면 될 듯했다.
똑, 똑….
안 부장이 가장 먼저 올라왔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온 안 부장.
그는 사무 책상에 앉아 있는 날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야, 씨… 왜 내가 다 감격스럽지?”
“뭡니까, 그 가르마는?”
하지만 난 반대로 지금껏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2대 8 가르마를 선보이고 있는 안 부장을 빤히 쳐다봤다.
“앞으로는 좀… 무게감 있는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을 하기 위해… 신경 좀 썼습니다. 저도 이제 부장 아닙니까?”
“우와… 지금 그거 웃기려고 한 머리 스타일은 아니시죠?”
“뭐랍니까, 또…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럴 겁니다. 계속 보다 보면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런데 안 부장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양 부장까지 이상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안 부장에 이어 올라온 양 부장.
“뭡니까, 그 안경은 또….”
“저도 이제 부장 아닙니까. 샤프한 이미지를 한번 연출해 보려고…”
“눈 좋지 않습니까?”
“좋기는요. 그동안 저 렌즈 끼고 다녔습니다.”
“아, 그럼 계속 렌즈 끼세요. 완전 느끼해. 금테가 뭡니까, 금테가….”
“모르시는 소리. 우리 그분께서 직접 골라 주신 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분은 로즈마리다.
농담 비슷하게 양 부장은 로즈마리를 그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떻습니까, 저도 좀 이제 부장 같아 보입니까?”
“하아….”
그리고 올라온 김 부장.
“김 부장님 좀 보고 배우세요. 변함이 없잖아요, 변함이. 한결같잖아요.”
김 부장은 가르마를 탄 안 부장과 안 쓰던 안경을 쓰고 올라온 양 부장을 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고, 곧바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미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헐… 몽블랑 펜….”
눈썰미 좋은 안 부장은 김 부장이 꺼내 든 펜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호들갑에 김 부장은 다시 한번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제 부장 아니냐. 이 정도는 써야지. 집사람이 하나 사 주더라고.”
“….”
괜히 조금 전 김 부장을 보고 배우라고 한 말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소파 상석으로 내가 자리를 잡고 앉았고, 양 부장과 안 부장이 나란히, 그리고 그 둘을 마주 보고 김 부장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난 그 삼 부장 앞으로 조금 전 안 부장이 메신저로 보낸 CGM 측의 입장 메일을 내려놓았다.
“CGM이 CGM 했네요.”
양 부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김 부장은 그저 고개만 여러 차례 끄덕일 뿐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던 반응 아닙니까. 저는 솔직히 이런 메일도 안 보낼 줄 알았어요. 이만하면 CGM도 이번 사건이 그냥 조용히 묻힐 사건은 아니라고 눈치를 챘다는 뜻일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난 일단 삼 부장의 의견을 물었다.
김 부장과 양 부장은 비록 승기가 우리 쪽으로 완전히 쏠렸음에도 끝까지 신중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합니까? 이런 건 우리 철용이 형님이 하자는 대로 해야 안 되겠습니까?”
“철용이 형님이요?”
“묻고 따블로 가야죠, 이런 건. 상대가 짖는다고 우리까지 함께 짖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짖게 내버려 두시죠. 보니까 우리한테 보낸 입장 그대로 브랜드들한테도 해명 메일을 보냈을 거 같은데,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구차한 입장 해명에 어느 정신 나간 브랜드가 예전처럼 아, 그래?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넘어가 주겠습니까?”
“….”
“이미 알렌 강 소개로 해외 다른 나라 굵직한 컨트롤 업체들과 접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들 브랜드 섭외가 힘들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CGM이랑 같이 가고 있는 거지, 우리 홍성이 그걸 다 대체해 줄 수 있는데 더 이상 예전처럼 주면 주는 대로 받아서 팔겠다는 바보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컨트롤 업체 쪽은 안 부장님이 대충 정리를 다 하셨다…. 그럼 브랜드 쪽만 살살 긁어 주면 되겠군요?”
난 김 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현재 CGM이 확보해 주고 있는 물량만큼 만토바와 링겐이 동시에 확보를 해 주겠단 약속만 따낼 수 있음 브랜드들 입장에서도 굳이 CGM과 함께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들입니다.”
“어차피 만토바, 링겐은 우리랑 같이 가고 있는 중이니 그 부분은 크게 걱정을 안 해도 될 거고….”
“하지만….”
양 부장이 혹시 모를 변수를 짚어 냈다.
“독일의 메칭엔 쪽에도 약을 치셔야 합니다.”
“…!”
그랬다.
서유럽 최대 규모의 아웃렛, 독일 메칭엔.
위치적으로 스위스와 가깝다 보니 CGM과의 관계 역시 원만할 수밖에 없고, 메칭엔이 확보하지 못한 파리 쪽 굵직한 브랜드들을 CGM이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 주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다.
그 다리만 끊어내면 한마디로 CGM은 고립이 된다.
“그 다리를 우리가 직접 끊느냐, 아님 메칭엔에서 알아서 끊어 주느냐… 그 차이겠군요.”
“홍성이 직접 끊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홍성은 공격적인 기업이라는 기업 이미지를 안고 가야 합니다.”
“CGM을 상대하는 데 그런 이미지가 나쁠 건 없는데… 그렇다고 또 굳이 우리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힐 이유도 없겠죠.”
난 다시 한번 김 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최대한 파리 쪽 브랜드들을 찔러보겠습니다.”
난 김 부장의 작전에 고개를 끄덕인 후 안 부장을 쳐다봤다.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면 안 부장님은 바로 메칭엔 한번 다녀오세요. 치아가 흔들립니다. 그럴 때 알아서 뽑히겠지… 하면서 미련하게 기다리는 거보다는 적당한 타이밍에 흔들리고 있는 부분에 직접 손을 갖다 대고 힘을 주는 게 현명할 겁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일단 버버리, 발리까지는 자진 아웃이 확실하고, 이제 여기서 겐조, 산드라, PP 정도만 알아서 CGM 손을 놓으면 될 거 같은데… 이태리 브랜드들은 만토바에서 힘써 주기로 했고.”
“결국 우리가 이렇게 목숨 걸고 CGM이랑 싸워도 마지막에 웃는 쪽은 만토바가 되겠네요.”
“든든한 벽 아닙니까, 우리 입장에서 만토바는. 그런 거 아까워할 이유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CGM 나가리시키고 만토바, 링겐으로 이강 구도를 만들어 놓으면, 결국 만토바 입장에서도 스위스에 들어간 우리 홍성 타워는 수갑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3주일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랜드 오픈 막바지에 이른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 홍성 타워 오프닝 행사에 나와 상무님, 그리고 안 부장이 직접 참관을 하기로 스케줄이 짜졌다.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
인터라켄 홍성 타워 오프닝 때보다 더 굵직한 업계 관계자들이 축하를 하겠다며 홍성 타워를 찾았다.
CGM과의 일 때문에 그동안 우리 홍성은 많은 브랜드들과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반호프슈트라세의 홍성 타워 오프닝 일정은 자연적으로 홍보가 되었다.
오프닝 일정을 노출하면서 그들에게 오프닝 행사 초대를 안 할 수도 없었던 노릇.
그런데 그 오프닝 행사에 우리가 초대하지 않았던… 업계에서는 나름 메이커가 있는 인물이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
“저 사람… 마크 아닙니까?”
마크 창.
폭스타운 지주 기업 안창 홀딩스의 대표이사이다.
폭스타운은 CGM이 유통을 확보한다는 조건으로 얼마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뿐이지, 홍콩계 기업 안창 홀딩스의 소유이다.
그 안창 홀딩스의 대표이사 마크 창이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반호프슈트라세 홍성 타워 오프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