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인제 그만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나가
난 다 마신 커피 컵을 바로 옆에 있는 쓰레기통 안으로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김형찬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원래 여기 에스컬레이터가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시죠?”
“….”
“덕분에 저희는 공사 경비도 줄이고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에스컬레이터를 넣는 거보다 이렇게 그냥 계단으로 가는 게 더 좋았던 거 같기도 합니다. 공사 기간도 줄일 수 있었고, 경비도 많이 줄였고… 또 무엇보다 공간이 이만큼이나 더 확보가 되었어요. 원래라면 여기까지 에스컬레이터가 나와야 하는 거였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죠. 올라가시죠.”
3층으로 올라가 계단 정면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버버리 섹션을 보는 순간 김형찬의 두 눈엔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옐로 폭스가 브랜드만 받아놓고 제대로 푸시를 안 해주는 브랜드가 우리 입장에선 또 이렇게 막강한 무기가 되는 거죠. 이번 클레임 건을 요약해서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버버리 본사 쪽으로도 메일로 하나 보내 봤습니다.”
“…!”
“우리가 책임지고 턴 오버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랜드 오픈을 한 당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으니 그 정도 보고는 예의상 해 줘야 할 거 같더라고요. 무척 유감이라는 뜻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지금 다른 메일을 하나 더 준비 중에 있습니다. 심증은 확실한데 아직 경찰에서 정확한 내용을 저희 쪽으로 보내준 게 없어서…. 아마 해당 이슈에 CGM이 직접 관여가 됐다는 팩트가 경찰 측으로부터 나오는 순간, 저희는 버버리 말고도 여기 홍성 타워에 들어와 있는 전 브랜드 쪽으로 그 내용을 보낼 겁니다.”
“공 부장님, 아니, 아니… 공 이사님….”
“그리고!”
“….”
“CGM 본사로도 해당 메일을 첨부해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을 정확하게 요구할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신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냥 우리 앞을 지나치려는 신 사장을 굳이 붙잡았다.
“사장님.”
“네.”
“잠깐만 이쪽으로 와 보세요. 혹시 서로 알고 계십니까? 여긴 홍성 타워 건물 소유주 신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오다가다 몇 번 정도는 마주친 것도 같네요.”
신 사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김형찬을 마주했다.
“굳이 전화로 하면 될 것을 직접 이렇게 찾아오셨네요. 3, 4층 구경이나 좀 시켜 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사님 편하신 대로 하시죠. 뭐 우리가 직접 구경은 안 시켜 줘도 언제고 마음대로 불쑥불쑥 찾아와서 정탐하듯 다 보고 갈 위인이긴 한 거 같지만. 그럼 전 포스 기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그거 확인 좀 하러 가 보겠습니다.”
신 사장이 자리를 떠난 뒤 난 김형찬을 데리고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4층을 한 바퀴 다 돌아본 후 말했다.
“그리덜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킹스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그리고 옐로 폭스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 중 홍성 타워가 확보하지 못한 브랜드는 하나도 없죠? 저희가 홍성 타워 오픈을 준비하면서 그 부분을 참 신경 써서 챙겼거든요. 하지만 홍성 타워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 중 그리덜이 확보하지 못한 브랜드는 많이 보일 겁니다. 킹스, 옐로 폭스가 나눠 먹기를 해야 해서 확보하지 못한 브랜드들도 많을 거고.”
“…!”
“제가 무슨 말을 하겠다고 김 대표님을 여기까지 직접 데리고 와서 이걸 보여 주는 거 같습니까?”
“…?”
“CGM이 어디에 있든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려고 여기까지 모시고 올라온 겁니다. 우리 홍성은 마음만 먹으면 거기가 어디든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 막혔던 것처럼, CGM은 우리 홍성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곳엔 절대 못 들어옵니다. 이제 그 차이를 조금 아시겠습니까?”
“….”
“계속해 보세요, 그게 뭐가 됐든. 김 대표님이 엉뚱한 작전을 하나씩 펼칠 때마다 우리 홍성은 정면으로 되받아쳐 줄 겁니다. 옐로 폭스가 들어가 있는 곳에 홍성 타워를 하나씩 올려버릴 거거든요. 이 건물 에스컬레이터 공사 허가를 공작으로 물거품 만든 대가로 저희는 반호프슈트라세에 있는 오아시스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
“더 해 보세요. 그게 뭐가 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세요. 그럴 때마다 당신의 숨통은 조금씩 좁혀질 거니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제가 뭘 원하든 김 대표님은 제가 원하는 걸 들어줄 능력이 안 되시는 분인데, 뭘 그렇게 김 대표님이 해결할 능력이 되는 사람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
“제가 김 대표님께 뭘 원하겠습니까? 저 그런 거 없습니다. 아마 있다고 한다면 계속 지금처럼 CGM에 붙어 계시면서 저 좋은 일 좀 많이 해 주길 바란다는 거 정도?”
“…?”
“사실 우리 홍성 입장에선 CGM을 공격할 명분이 크게 없었잖아요, 그동안. 근데 그 명분을 계속 김 대표님이 만들어 주고 계시니, 제 입장에선 김 대표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너무 큰 욕심을 부리면,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가 있는데, 또 막상 그런 사람이 우리 편이 아니라 적이 되니까 이게 이렇게 쉬울 수가 없더라고요. 계속 CGM에 붙어 계세요. 그래서 저한테 계속 제가 CGM을 공격해도 될 만한 명분들을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주세요.”
“CGM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계시네요. CGM… 이렇게 당신한테 농락당할 정도로 만만한 회사 아닙니다.”
“난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아니, 씨발 CGM이면 CGM이지 그 이름 석 자가 무슨 큰 감투라고 그렇게 기고만장하십니까? 당신이 CGM인 것도 아니면서…. 당신이 곧 CGM이라고 해도 그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닌 말로 빌 게이츠도 난 안 무서워. 죽은 잡스 형님을 내 앞에 데리고 와 봐.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그 사람들이 어디 뭐 나한테 1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 사람들을 대단하게 봐줄 거며, CGM을 내가 왜 어렵게 생각해야 되는 건데? 내가 지금 판을 여기까지 끌고 왔잖아? 그럼 그다음 스테이지는 당신네 회사 회장이란 뜻이야.”
“…!”
“직접 와서 고개를 숙여야 할 거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 같지? 두고 봐. 보면 알 거야, 내가 CGM을 앞으로 어떻게 씹어 먹나… 하긴 뭐…우리가 이번 클레임 건을 좀 더 크게 이슈화시켜서 홍성 타워에 들어가 있는 전 브랜드 쪽으로 유감의 메일 보내고, 그 메일을 CGM 본사 쪽에 첨부해서 보냈는데도 그때까지 당신이 거기 붙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 있어요? 아님, 뭐 더 듣고 싶은 말이라도….”
“….”
“없으면… 나가,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 * *
그날 저녁 신 사장님의 주관하에 홍성 타워 쪽으로 호의적이었던 여행사 사장들과 저녁 만찬 자리를 가졌다.
해당 이슈가 벌어진 뒤 경찰서를 몇 차례 오가며 급하게 준비를 한 자리라 부족한 건 많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바쁜 시간을 할애해 참석해 준 현지 로컬 사장들의 성의만큼은 충분한 자리였다.
대부분이 한국분들이셨다.
물론 중국 카이사나, 유투어라는 대형 여행사의 발주를 받아 아웃바운딩을 해주고 있는 중국계, 대만계 여행사 사장들도 몇몇 있었고.
‘빅토리아 융프라우’라는 그 지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5성급 호텔 연회장을 빌려서 코스 요리를 즐기며 진행된 자리였는데, 10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이 6개나 세팅이 될 정도로 급하게 이뤄진 만찬치고는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다.
식사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아주 캐주얼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다이닝 코스로 진행이 됐지만,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 많은 분들이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와인 잔을 함께 기울이기도 했고, 또 더러는 신 사장의 소개로 날 찾아와 건배를 제안하기도 했다.
식사가 끝이 나고 한쪽에서 식사 내내 라이브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해 주던 공연팀이 잠시 공연을 멈춘 틈을 타서 신 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모인 여행사 사장들에게 홍성 타워가 아닌,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호텔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호텔 객실을 이용해 줘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좋은 관계가 계속 유지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뜻과 앞으로 다가올 성수기 시즌엔 예년처럼 객실을 성수기 가격으로 공급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뜻을 정확하게 밝혔다.
그 말에 여행사 사장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립 박수를 쳤다.
그렇게 나에게 넘어온 마이크.
“사실 전 조금 전 미스터 신이 여기 모이신 사장님들께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통역을 통해 들었습니다. 저는 독일어를 전혀 못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영어로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여기저기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하라는 호의적인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난 우선 좌중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인 후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홍성 타워… 저희는 홍성 타워가 들어가게 되면 저희보다 먼저 패션 관련 로드샵 운영을 해 왔던 킹스나 그리덜, 그리고 옐로 폭스 쪽에서 두 손을 들고 반길 줄 알았습니다.”
좌중은 조용했다.
“이게 제 나라 한국만의 사업 마인드인 줄은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이런 쇼핑 거리에 굵직한 브랜드가 들어오게 되면 거리 전체가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자리를 잡고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낙수 효과라는 걸 기대하면서 반기거든요.”
내 말에 그제야 여행사 사장들은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터라켄에 없던 스타벅스를 끌고 들어와서 오픈을 시켜 놨습니다. 저기 서역까지 나가야 그나마 이용할 수 있었던 공중화장실까지 홍성 타워 1층 로비에 그것도 무료로 오픈을 해 줬죠. 더 이상 맥도날드에 들어가서 줄을 설 이유가 없어진 거 아닙니까. 비 오는 날 저 멀리 서역까지 갈 이유가 없어진 거 아니냔 말이죠. 그런데도 상대는 홍성 타워가 이 거리를 위해 어떤 투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난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물론 이런 부분이 저희가 킹스나 그리덜, 옐로 폭스처럼 쇼핑 커미션을 안 챙겨 드리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쇼핑 커미션을 따로 챙겨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마진 없는 유통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사 사장님들, 그리고 가이드분들께 챙겨드릴 커미션… 그 액수만큼 좋은 마진으로 홍성 타워를 찾는 고객들에게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면… 결론적으로 지금 당장은 눈에 안 보이겠지만, 여기 모이신 여행사 사장님들께도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저희는 확신합니다. 왜? 어차피 커미션 부분은 워치샵들에서 제공을 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여행사 사장들은 누구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성 타워는 기존에 없던 고객들을 스타벅스나 공중화장실이라는 무기로 호에벡 거리 쪽으로 유인하는 아주 좋은 미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미끼가 있으면 커미션과 같은 직접적인 수입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가이드분들은 워치 관련 쇼핑 쪽으로 더 많은 집중을 하실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 그룹이 있습니다. 그 그룹 패키지를 이용하는 모든 고객들이 다 시계를 사려고 마음을 먹고 스위스에 오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럼 애초에 쇼핑을 할 마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그 자유 시간 동안 과연 뭘 할 수 있을까요? 여기 이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라는 상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이 인터라켄에서 과연 비라도 와 버리면…. 쇼핑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과연 그 자유 시간 동안 뭘 할 수 있습니까?”
“….”
“네,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그럼 그럴 때 홍성 타워에 들어와서 꼭 뭔가 구입을 하지 않더라도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거고, 윈도 쇼핑이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참 이해가 안 가는 게… 홍성 타워는 분명 한정된 파이를 나눠 먹겠다고 들어온 게 아니라 기존의 파이를 다 같이 키워 볼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로 들어온 건데, 기존에 패션 관련 유통을 꽉 잡고 있던 그리덜, 킹스, 옐로 폭스 이 세 회사는 그걸 도전으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우습지도 않습니다. 도전이라니요? 자기들이 이 업계 챔피언이 아닌데, 어떻게 그걸 도전이라고 생각하는지부터가 한심스럽고 또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아무튼 사장님들… 저희가 사장님들께 직접적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마 앞서 미스터 신이 약속한 평상시 금액의 객실 요금을 성수기 때에도 적용해 계속 유지해 주겠다는 약속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사실 이 약속도 큰 의미는 없는 약속인데, 아마 저희 홍성 인터내셔널과의 관계, 그 합작 프로젝트인 홍성 타워의 번창을 위해 미스터 신이 살짝 포기를 하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홍성 인터내셔널을 대표해서 그 부분에 대해 미스터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을 전하고 그와 더불어 비수기 시즌이 오더라도 여기 모이신 사장님들께서 성수기 시즌 때 받아온 혜택 때문에라도 미스터 신이 운영하는 호텔 쪽으로 객실 예약을 많이 넣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