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이걸 한번 보셔야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홍성 타워 2층 스타벅스에서 바라보는 인터라켄 호에벡 거리의 풍경은 너무나 완벽했다.
아주 오래전, 몇백 년 전엔 저 호에벡 거리가 단순 마차 도로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워치 스트리트가 될 것을 어떻게 알고, 그 당시 이런 위치에 이런 건물을 올릴 생각을 했던 걸까.
나중에 집사람 배 속에 있는 로또가 세상에 태어나고, 그 로또가 아빠, 엄마… 하며 말문을 트기 시작하면 다 같이 이쪽으로 가족 여행을 와서 함께 보고 싶은 풍경.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아이거, 뫼니, 융프라우의 배경 덕분인지, 그 품에 포옥 싸여 있는 호에벡 거리는 차라리 그림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난 라테 한 잔을 시켜 놓고 창가 쪽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파 쪽은 아예 자리가 없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 테이블 역시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는데, 다행히 조금 전 인도 계열 일가족이 빵 부스러기로 테이블 위로 잔뜩 어질러놓고 자리를 떴다.
난 티슈 한 장을 구해 그 빵 부스러기를 대충 떨어뜨려 놓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혼자 라테 한 잔을 시켜놓고 호에벡 거리를 서서히 물들이기 시작하는 홍성 타워 쇼핑백의 수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
인기척이라는 걸 느낄 수가 없지.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김형찬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고… 어디로 들어오셨습니까? 전 아까부터 계속 여기에 앉아서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혹시 뒷문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좀 옮기죠.”
김형찬의 얼굴엔 다급함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뭐 하러요. 앉으세요. 자리 어렵게 잡은 겁니다.”
난 내가 확보하고 있던 바로 옆자리 스툴 의자를 뒤로 빼며 김형찬에게 권했다.
하지만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천장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커피 한 잔 시켜 오세요.”
그리고 난 라테가 든 커피 컵을 입술에 붙인 채 주문대를 눈짓하며 김형찬에게 말했다.
그러자 김형찬은 주문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내가 미리 빼놓은 스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치하게 이러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이런 거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
“전 그동안 김 대표님이 해 오신 것만 보고 이런 거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깁시다.”
“여기만큼 조용한 곳이 또 있을까요? 여기 우리가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 뭐 다른 나라 사람들인데요. 그냥 여기서 이야기합시다. 괜히 서로 바쁜 거 다 아는데, 이리저리 자리 옮기느라 아까운 시간만 바닥에 버리지 말고.”
그리고 난 커피 컵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에 현지 로컬 여행사 사장들과의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아,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옐로 폭스 쪽과 가까운 여행사들은 다 제외를 시키고, 그나마 양심적으로 사업을 해 오던 여행사 쪽 사장님들만 초대를 한 자리니까. 시간이… 어디 보자…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죠? 우리가 웃는 얼굴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길게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요.”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신다고 하니, 저도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길게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가 알아서 잘 걸러 듣겠습니다.”
“우선 며칠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유감입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일 덕분에 알아서 조심하는 가이드들이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거리에 홍성 타워 쇼핑백이 저렇게 늘어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난 다시 한번 호에벡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폴리짜이 스테이션으로부터 연락을 한 통 받았습니다. 해당 시비에 우리 옐로 폭스가 관여가 된 거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 확인차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면서 말이죠.”
“스위스… 참 뭐가 느립니다.”
“…?”
“그 연락을 이제 받으셨어요? 앞으로는 경찰 쪽 연락을 더 자주 받게 될 겁니다. 그거 협조 잘해 주셔야 할 겁니다. 실은 홍성 타워가 그 건을 가지고 직접 클레임을 걸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랑 함께 경찰서로 갔던 빅토리녹스 측 관계자가 그러더군요. 홍성 타워는 그냥 영업 방해 관련해서 해당 가이드에 대한 클레임만 거는 게 좋을 거 같다고.”
“…?”
“상대가 CGM이다 이거죠. 아무래도 스위스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까 개인 대 개인의 클레임은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스위스에 자리를 잡고 비즈니스를 해 온 CGM을 상대로 이제 막 오픈을 한 홍성 타워가 클레임을 거는 건 한국식 표현으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뭐 그런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빅토리녹스 본사가 직접 움직여 주기로 했습니다.”
“…!”
“자존심이 상당히 많이 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조만간 빅토리녹스 공식 홈페이지에 해당 건을 요약해서 입장 발표도 할 모양인 거 같더라고요. 그냥 넘어가 주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저희 입장에선 고맙죠.”
“빅토리녹스가 왜 그렇게까지…”
“그러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
난 다시 라테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신 후 말했다.
“그런데 제가 진짜 궁금한 게… 스위스 안에서 빅토리녹스랑 CGM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
“아무리 CGM이라도 빅토리녹스한테는 좀 힘들겠죠? 짐멀리 측으로는 따로 연락받으신 게… 아참, 김 대표님은 옐로 폭스 쪽만 관여하고 계시죠? 아마도 짐멀리는 폭스타운에서 매장을 뺀다고 할 겁니다.”
“…!”
“제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겠냐고 몇 번이나 말렸는데, CGM이 작정을 하고 짐멀리 브랜드에 흠집을 낸 걸 직접 눈으로 다 확인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같이 일을 할 수 있겠냐고요.”
“….”
“뭐 짐멀리가 아무리 브랜드 파워가 좋은 브랜드라도 실질적인 매출은 크게 올라오는 브랜드가 아니라 폭스타운 입장에서도 큰 타격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마 발리도 같이 빠질 겁니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으으음…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데요? 여기가 중국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스위스인데, 이런 스위스 안에서 그것도 인터넷도 아니고 버젓이 오프라인 매장에서 이미테이션 명품을 판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일도 있는데, 왜 그게 말이 안 됩니까?”
“…!”
“말 됩니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발리 본사 쪽에서 결정을 내리고 폭스타운 쪽으로 통보를 해 줄 겁니다.”
“여긴 스위스입니다.”
“그런데요?”
“스위스에서… 그것도 스위스 대표 브랜드 발리가 폭스타운을 떠난다?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폭스타운이 확보해 준 발리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나 알고 그런 소릴 하십니까? 그 타운 안에서도 가장 중간,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가 딱 같이 붙어 있는 자리가 바로 발리 자리입니다. 그 자릴 포기한다고요? 하하하….”
“아… 거기까진 아직 모르시겠구나.”
“…?”
“어차피 폭스타운은 아웃렛 아닙니까? 이월 상품들 때려 박고 판매를 하는 곳인데, 발리 팩토리라는 확실한 이월 제품 떨이 벤더를 가지고 있는 발리 본사 입장에선 크게 걱정을 할 이유가 없죠.”
“그게 무슨….”
“이걸 한번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가 좀 쉽게 될 거예요.”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봤더라면 나와 김형찬이 무척 친한 사이라고 오해를 했을 거다.
난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시켰고, 그걸 바 테이블 위로 올려놓은 뒤 김형찬과 함께 해당 영상을 봤다.
“여기 어딘지 아시죠?”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 아닙니까?”
“그렇죠. 여기 킹스 매장 보이네… 여긴 옐로 폭스… 그리고 이 영상엔 안 잡혔는데 저기 반대편이 그리덜 매장이죠? 자…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
“여기 지금 공사 중인 건물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여긴 오아시스 건물…!”
“이 공사 천막 내려가면 이 오아시스 건물 2층에도 여기와 똑같이 스타벅스가 들어갈 겁니다.”
“…!”
“아마 1층엔 당연히 폴앤크루가 가장 좋은 자리로 들어오겠죠? 그리고 짐멀리 역시 들어오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습니다. 이젠 우리 홍성이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파트너가 되어 버렸거든요. 홍성이 짐멀리 한국 라이선스를 따냈습니다. 이 정도 자리는 당연히 내어줘야겠죠, 그럼. 그럼 여기엔 뭐가 들어갈까요?”
“….”
“제가 만약 발리 본사 입장이라도 저기 구석진 곳, 우리 패션 관련 종사자들한테나 메카지, 일반인들 사이에선 그저 그런 아웃렛에 불과한 루가노 폭스타운보단 그래도 취리히고 또 그 취히리 안에서도 메인 중의 메인인 이 반호프슈트라세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발리 팩토리 쪽으도 공간을 나눠 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발리 본사 입장에선 발리 팩토리가 이월 제품들을 대량으로 확보하겠다고 하는데, 굳이 자기들이 직접 매장 직원들 써 가며 루가노에서 매장 관리를 하겠다고 할까요? 그런 수모까지 당하고? 안 하죠. 그리고 아마 빅토리녹스 측이 이번 클레임 건에 저렇게까지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역시 아마 이 건물 매장 입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난 싱긋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김 대표님. 하하하… 크크큭….”
“다 좋은데, 공 부장님이 뭐 하나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그 전에 잠깐만요.”
그런 김형찬 앞으로 새로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어쩌다 보니 이사 딱지를 달게 됐습니다. 저는 이게 다 김 대표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같이 자리할 일이 또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푸흡… 좋습니다. 아무튼 공 이사님이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아무리 발리라도 그렇게 함부로 폭스타운에서 브랜드를 뺄 수는 없습니다. 스위스 시장에서 발리를 토탈 컨트롤해 주고 있는 곳이 어딘데요? 바로 CGM입니다. 그런데 고작 이월 재고 떨이 때문에 CGM을 버리고 홍성으로 갈아탄다… 아직 스위스 시장에 대해선 감이 없으시군요.”
“그럼 바꿔 말해서 CGM이 발리를 버릴 수나 있습니까?”
“…!”
“아니, 발리 입장에는 정상 시즌 제품들은 기존대로 CGM이랑 같이 가고 이월 제품 떨이 부분만 다 발리 팩토리 일차 벤더 쪽으로 밀어버리겠다는 건데, 김 대표님 말씀대로 고작 폭스타운에서 빠진다고 CGM이 발리를 버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걸 잘 아셔야 됩니다, 김 대표님. 지금 CGM은 김 대표님이 둔 악수 한 번으로 앞으로 많은 브랜드들한테 찍히게 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그건 제가 조금 있다가 말씀을 드릴 건데, 그 전에 이 부분을 아셔야 됩니다. 발리가 폭스타운에서 빠져나온다고 해서 CGM이 그 부분을 가지고 뭔가 압박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그건 진짜 큰 오산이에요. CGM이 발리 손을 놓는 순간 그로 인해 CGM은 정말 많은 브랜드들을 동시에 다 놓칠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저 새끼 뭐지? 지가 뭔데 이월 제품 떨이에 집중을 다 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폭스 타운에 매장 하나 딸랑 내줘 놓고, 재고 떨이를 좀 더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는 상대를 찾아서 떠났다고 브랜드 전체한테 압박을 넣는 거지? 그런 소문이 퍼지는 순간 끝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도 CGM이니까… 그 정도 파워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럼 어디 보자… 아놔, 시간이 될는지 모르겠네… 일단 뭐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왔으니까 저랑 같이 홍성 타워 건물 한번 훑어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