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겁이 없는 겁니까?
옆에서 신 사장이 경찰에게 그대로 진행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말로 내게 낮게 설명했다.
“이렇게 클레임을 걸어 놓으면 저 가이드는 어쩔 수 없이 맞클레임을 걸게 됩니다. 그럼 저 가이드 역시 500프랑의 비용이 들어갈 거고, 저희 쪽과 원만한 합의를 해내지 못하면 엄청난 금액의 벌금을 부여받고, 심한 경우 스위스 입국 금지령까지 떨어질 수 있어요. 스위스… 아주 폐쇄적인 나라입니다. 어쨌든 전 스위스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조건 저희 쪽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클레임이 될 겁니다. 500프랑… 저희 쪽에서 나중에 얼마든지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청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하시죠.”
우리 쪽에서 클레임에 관한 오케이 사인을 주는 순간 경찰은 컴플레인을 걸었던 해당 고객에게 우리 측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었고, 고객이 그렇다고 증언을 하자 가차 없이 해당 가이드를 경찰차에 태웠다.
그리고 우리에겐 직접 경찰서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쏘리, 쏘리… 미안하다고요. 한 번만 봐주세요. 나 지금 경찰서 못 가요. 1시간 뒤에 우리 그룹 이탈리아로 이동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살짝 열려 있는 경찰차 뒷좌석 창 틈새로 가이드가 구걸을 하듯 내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부분은 제가 그쪽 소속 여행사 쪽으로 지금 전화를 한 통 넣어 줄게요. 그리고 자초지종 설명하고,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을 새로 인솔해 줄 가이드를 빨리 보내 주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다 이야기해 줄 테니까, 그 부분은 아무 걱정 말고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일이 커졌다.
하지만 난 전혀 떨리지 않았다.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아무리 법이 나라마다 다 다르다고 하지만, 우린 잘못을 한 게 없다.
그리고 난 홍성이라는 나의 백그라운드를 믿고 있었다.
만약 이게 일이 여기서 더 커져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더라도, 홍성이라면, 내 회사 홍성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서 처리를 해주겠지.
내가 지금 내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일을 하고 있는 건데….
해당 가이드를 태운 경찰차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싸움 구경을 위해 모여든 인파들은 흩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난 신 사장과 브랜드 관계자들을 상대로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신 사장이 대답했다.
“우선 제가 미스터 공과 함께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아뇨.”
난 인파들 틈에 숨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투어 가이드들을 의식하며 말했다.
“미스터 신은 여기 미스터 박과 함께 남아서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면 똑같이 대응을 좀 해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매장 직원들한테 대응법을 알려주세요. 혹시라도 이분과 같은 고객이 또 찾아와서 환불을 요구하면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원하면 환불을 해주겠지만 조금 귀찮더라도 환불 요구의 이유를 물어보세요.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라면 지금 제가 한 것과 똑같이 대응을 해주세요. 고객님들은 여행사나 가이드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믿고 그들이 해 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겠다고 그 돈을 주고 그룹에 참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그 서비스 이용 금액을 다 받아먹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커미션 몇 푼 더 챙기려고 고객들을 기만하고, 자기들에게 커미션을 따로 안 주는 저희 같은 업장들을 고작 면세 8퍼센트 때문에 사기나 치는 업장으로 매도하는 걸… 뿌리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경찰서엔….”
“제가 같이 가죠.”
빅토리녹스 측 관계자가 앞으로 나왔다.
“이런 일엔 로컬인이 한 명 정도는 끼어야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관광특구가 되다 보니 외국인들끼리 생긴 분쟁에 대해선 폴리짜이들도 귀찮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게좋게 알아서들 합의를 보라는 식으로 사건을 축소시킬 가능성도 높고요. 하지만 저희 빅토리녹스 본사가 직접 관여를 하면 상황은 달라지죠.”
“….”
“이건 저희 본사 차원에서 절대 가만히 있어선 안 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면세 처리가 안 되는데 면세를 받을 수 있다고 사기를 쳤다…. 그런데 해당 업장이 다른 곳도 아니고 저희 브랜드가 들어가 있는 홍성 타워다. 거기다 빅토리녹스 매장이다…. 이건 큰 문제죠. 앞으로 저희 빅토리녹스는 가능하면 여행사들과 커미션 장사를 하는 매장 쪽으로는 제품을 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클레임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짐멀리 측에서 나섰다.
“어쩌다 보니 저희 짐멀리 역시 고객들을 우롱하는 브랜드가 되어 버렸네요.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죠.”
“그럼 전 발리 본사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거 같고, 발리 본사 측에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면서, 클레임을 제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난 박기태와 민규에게 홍성 타워에 남아 신 사장과 함께 매장 직원들을 다 불러놓고 앞으로 면세 부분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들을 상대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그런 거짓 정보를 흘리는 투어 가이드들을 상대로 어떤 강력한 조치를 우리가 할 수 있는지 등을 교육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빅토리녹스 측 관계자의 차로 해당 컴플레인을 걸었던 일본인 고객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 * *
경찰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장면은 울고 있는 투어 가이드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나와 해당 컴플레인을 걸었던 고객 앞으로 다가와 빌기 시작했다.
말이 경찰서지, 내부 모습은 한국의 동사무소를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었다.
상대에겐 맞클레임을 걸 기회라는 게 있고, 그 클레임의 판결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피해자, 가해자라는 걸 구별해 놓지 않는 스위스 법.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 이번 클레임으로 스위스 입국 금지 받으면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홍성 타워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
“비즈니스 하세요. 저도 지금 당신을 상대로, 아니 당신을 기회로 비즈니스 하고 있는 중이니까.”
난 딱 거기까지만 상대를 해주고 조서를 꾸미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이미 경찰 측도 눈치가 있다 보니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투어 가이드가 한 진술을 우리 쪽에 먼저 설명을 해 주고 시작을 했다.
참 놀라울 뿐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스위스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을 할 때 보통 그룹 이동은 열차보다는 관광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열차로 이동을 하는 경우엔 공항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그 절차가 조금 복잡하지만, 그래도 개인이 국경에서 면세 서류를 제출할 기회가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역시도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사람들은 애를 먹겠지만, 어떻게든 면세 서류를 제출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큰 문제가 없다면 다들 면세 서류를 제출하고 국경을 빠져나가는데, 버스로 이동을 하는 경우는 투어 가이드의 도움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스위스 면세 형식이 대부분 샵에서 바로 면세 금액만큼 차감을 시키고 면세 서류를 증거로 국가로부터 그 면세 할인 금액만큼 매장이 돈을 환급받는 시스템인데, 버스로 이동을 하는 대부분의 경우 개개인이 일일이 다 할 필요가 없고, 투어 가이드가 그룹의 면세 서류를 일괄적으로 모아서 한꺼번에 제출을 하고 국경을 통과하는 모양인데, 사실상 여기서 투어 가이드가 이 매장은 면세 혜택을 못 받는다고 해버리면 고객들은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 부분을 그동안 많은 투어 가이드들이 자신들의 번외 수입 커미션을 이유로 악이용을 해 오고 있었던 거다.
물론 그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을 거다.
왜냐면 아직 굵직한 브랜드들이 입점된 3, 4층은 오픈을 안 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굵직한 브랜드들이 다 개방이 된 상태에서 가이드들이 받게 될 홍성 타워의 면세 서류는 양적으로나 금액적으로나 예전과는 크게 달랐을 거고, 그게 마치 자기가 당연히 커미션으로 챙겨야 되는 돈이라고 착각을 한 가이드들 입장에선 얼마나 아까웠겠나.
그 금액만큼 홍성 타워가 아닌 옐로 폭스, 그리덜, 킹스에서 쇼핑을 했다면 그만큼 자기 몫으로 커미션이 떨어지는 것인데….
“저는 그냥 단지… 옐로 폭스 쪽에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난 듣지 말았어야 할 것을 듣고 말았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난 서로 등지고 조서를 꾸미고 있던 가이드에게 고개만 살짝 돌려서 물어봤다.
“옐로 폭스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그쪽에서 저희 같은 현지 가이드들을 섭외해서 일거리를 주는 인바운드 여행사 대표들을 다 초대해서 디너를 제공하면서 바우처 관련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요?”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겠죠, 인바운드 여행사 사장들에게. 홍성 타워는 스위스 기업도 아닌데, 저렇게 염치없이 들어와서 기존에 잘 정리가 되어 있던 시장을 엉망으로 만들려고 한다. 아마 커미션 같은 것도 따로 안 챙겨줄 거다. 커미션을 챙겨줄 수 있을 정도로 재정적으로 안전한 기업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 쪽에서도 사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어쩌면 홍성에 들어간 브랜드들 중 이미테이션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고 말이죠.”
“…!”
“저희야 저희를 초이스해 주는 인바운드 여행사에서 해달라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는 입장들이잖아요. 거기서 저희한테 바우처를 나눠 주면서 그곳에서 그룹 쇼핑을 시키고, 거기서 발생하는 커미션을 퍼센티지로 나누자고 하는데, 저희 입장에선 그동안 없던 수익이 생기는 거니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고….”
“당연하다는 표현은 하지 마세요. 당신처럼 안 하는 가이드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홍성 타워에 자발적으로 협조를 하고, 화장실 이용을 시키면서 쇼핑을 함께 푸시해 주는 가이드들도 여럿 봤습니다.”
“…!”
“왜 당신이 양심이 없는 걸 다른 사람들까지 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까?”
“….”
“그리고 알고 있었잖아요, 당신도. 당신이 당신 그룹들을 상대로 했던 그 거짓말은 결코 해선 안 될… 누군가에겐 치명적인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는 걸.”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날 상대하는 경찰에게 말했다.
“클레임 진행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이런 건 가능한가요?”
“말씀해 주세요.”
“방금 저 가이드가 한 말 어차피 조서로 꾸며질 거 아닙니까.”
“녹음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럼 방금 저 가이드가 한 진술… 페이퍼로 제가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가급적 여기 경찰서 스탬프도 함께 찍혀 있으면 공신력이 좀 더 올라갈 거 같은데….”
“음….”
“비용이 들면 말씀하세요. 얼마가 들더라도 지불을 할 테니까. 방금 저 가이드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더 이상의 클레임은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옐로 폭스 측에게 직접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확인을 할 겁니다.”
“먼저 해 주시면 제 입장에선 오히려 편하고요. 페이퍼…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부분은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사건 등록하는 과정에서 클레임을 거는 양쪽 모두에게 사건 기록을 전달하는 건 기본이니까요.”
“잘됐네요.”
내가 이 일 때문에 스위스 출장 일정을 이틀이나 연장을 시켰다.
원래라면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 홍성을 대표해서 참석을 하고, 이틀 정도 매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을 확인한 다음 혼자 한국으로 넘어올 계획이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비행기 티켓 일정을 이틀 뒤로 연기시켰고, 신 사장의 도움으로 그가 관리를 하는 운터젠 쪽 호텔로 옮기게 됐다.
출장 일정을 연기하기로 결심한 다음 날이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로밍을 시켜서 온 전화기에 스위스 국번이 떴다.
김형찬이었다.
“홍성 인터내셔널 공은태입니다.”
-혹시 지금 스위스에 계십니까?
“인터라켄입니다.”
-잠시 좀 만날 수 있겠습니까?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다 아시면서 괜히 어렵게 돌아가지 말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지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공격적인 어투를 구사하는 걸까?
“저는 단 한 번도 돌아가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스트레이트입니다, 저는.”
-….
“확실히 좋긴 좋네요, 여기서 내려다보는 호에벡 거리 풍경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선 보이십니까? 우리 홍성 타워 쇼핑백이… 하나, 둘… 여기서 보기엔 옐로 폭스, 그리덜, 킹스의 쇼핑백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아 보이는데….”
-제가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최소한의 매너라는 것도 없습니까?”
-…?
“아니 어떻게 다른 회사 건물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제집 드나들듯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모두에게 오픈된 공간이고, 또 여기 스타벅스는 우리가 세를 주고 있는 곳이긴 해도… 그래도 이 건물엔 상대 업체의 전략이라는 게 들어가 있는데, 그걸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락날락하며 다 지켜볼 수가 있습니까? 배려가 없는 겁니까, 아님 생각이 없는 겁니까? 그런 것도 아니라면… 겁이 없는 겁니까?”
-후우….
“뭐 좋습니다. 오세요. 와서 커피 한 잔 팔아 주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