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진행해 주세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불구경,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 구경이 어디에 있을까.
홍성 타워 1층 로비.
만약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절대 난 이런 소란을 더 키울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억울하더라도 최대한 조용히 묻어가려고 했을 것이고, 앞뒤 사정이야 나중에 찬찬히 따져 볼지언정 고객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소란을 덮고 뒤에서 일을 해결하려고 했을 거다.
업장에서의 소란은 어쩔 수 없이 매출과 직결되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여긴 한국이 아니다.
바꿔 말해서 여기서 이렇게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시 홍성 타워를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관광객들이거나, 화장실 이용을 위해 다른 그룹을 인솔해서 들어온 투어 가이드들이었다.
장사 하루 접지 뭐.
그게 뭐 큰 대수라고.
완벽한 오프닝을 위해 일부러 홍성 타워 쇼핑백 센딩까지 한 달가량 뒤로 미루지 않았나.
그냥 그랜드 오픈을 하루 뒤로 미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빅토리녹스, 발리 팩토리, 짐멀리 측 관계자들과 함께한 공식 오프닝 행사는 문제없이 잘 끝이 났다.
그것만 해도 오늘 우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정을 성실하게 마무리 지었다.
무엇이 중요할까….
비록 짧은 찰나였지만, 난 여기서 내가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고, 그 액션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내야만 했다.
“이사님.”
“네.”
겉으로는 최대한 여유가 있는 척 미소를 보이며, 하지만 속으로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박기태가 다가와 불안한 모습으로 빅토리녹스 측 관계자를 눈짓하며 낮게 속삭였다.
“거래처 대표단들도 다 보고 있는데, 조금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박기태의 말을 들으며 난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빅토리녹스 측 관계자가 아닌 민규를 쳐다봤다.
그리고 민규를 향해 내 곁으로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런 다음 박기태와 민규에게 이야기했다.
“거래처를 대표해서 오늘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 준 분들에게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거 같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
“우아한 모습? 고상한 태도? 젠틀하고 스마트한 대응?”
박기태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억지로 다무는 모습이었다.
“제가 항상 말하죠? 우리가 발렌티노를 컨트롤한다고 해서 우리 레벨이 발렌티노 레벨이 되는 건 아니라고.”
“….”
“우린 우아하고 고상하며, 젠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건 상대를 봐 가며 연기를 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가식을 떨 필요는 없다고요. 그런 게 어디 뭐 밥 먹여 줍니까? 거래처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또 뭐 좀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일을 어렵게 해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근데 왜 이런 걸 조용히 처리하려고 하냐고. 우린 거래처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우리가 저 거래처 사람들한테 자리 빌려주고 또 대신 마케팅까지 해주고 있는 건데, 뭐가 무서워요? 오히려 이럴 땐 여기서 무슨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만들고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게 더 현명한 거 아닐까요? 여긴 한국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저 사람들이 더 이 나라 법에 대해선 잘 알고 있을 거 아니냐고.”
“법이요?”
“왜? 그럼 지금 이걸 그냥 해당 가이드 불러서 서로 목에 핏대 올리는 거로 끝내려고? 말이 안 되지, 이 좋은 기회를 그런 감정 소모로 끝낼 순 없잖아요.”
“….”
“박 팀장은 신 사장님한테 가서 조금 있다가 해당 가이드 도착하면 바로 경찰 부르세요.”
“이, 이사님.”
“이거… 엄연히 영업 방해입니다.”
“…!”
박기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기회라고 생각했다.
홍성에 독립적으로 입점된 브랜드의 대표들도 다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다른 가이드들도 많이 보였다.
미친개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백날 말로 경고를 하고 주의를 주면 뭐 하겠나.
직접 한번 물려 봐야 자기들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고, 바로 눈앞에서 그 미친개한테 물리는 친구가 한 명 정도는 나와 봐야 알아서 조심들을 할 게 아닌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여든 인파를 헤집고 단발머리의 키가 작은 여자 가이드 한 명이 컴플레인을 걸었던 고객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무척이나 뻔뻔한 모습으로 자신의 고객에게 상황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물론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어서 정확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보이기엔 상황의 자초지종을 묻는 거 같았고, 또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고객을 상대로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만요.”
난 재빨리 손을 뻗었다.
이 가이드라는 여자가 자신의 고객을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거다.
물론 컴플레인을 걸었던 고객 역시 가이드 손에 순순히 끌려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제가 당신을 좀 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내가 영어로 묻는 순간 해당 가이드의 입에선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슈바인…. 뭐시뭐시…. 도이치… 그러는 거 같았는데, 뉘앙스만으로 예측을 해 봤을 땐, 여기서 왜 영어를 쓰느냐, 여긴 호크 도이치를 쓰는 곳이다. 나랑 대화를 하려거든 독일어를 사용해라… 정도인 거 같았다.
“전 독일어를 할 줄 모릅니다.”
난 여전히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투로 다시 자신의 고객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영어로 하세요.”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등장한다.
컴플레인을 걸어 왔던 고객이 가이드에게 일침을 가했다.
“나도 독일어는 몰라요. 당신 영어 할 줄 알잖아.”
“….”
그사이 난 박기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나의 신호를 확인한 박기태가 신 사장을 시켜 경찰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뭐가 문제인가요? 왜요?”
가이드는 날 향해 너무나 뻔뻔스럽게 무엇이 문제이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라는 일을 하기 위해선 이 정도 뻔뻔함은 필수인가? 하는 생각.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일본인이라고 하면 상당히 나긋나긋하고 또 그 속이 어떤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이기로는 무척 경우를 따지고 또 남에게 피해를 안 주기 위해 스스로 절제를 하는… 그런 이미지가 있지 않나.
난 일본이란 나라, 그리고 그 국민성을 그렇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크리스 관련해서 일본 쪽 컨트롤 업체와 일을 할 때나, 가장 최근에 이토 측과 사업을 함께 진행할 때에도 거의 대부분의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내가 가진 생각을 뒷받침해 주듯 어쨌든 앞에선 매너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가이드라는 여자는 그런 게 없는 거 같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신 사장님이 이런 투어 가이드들을 상대하느라 참 애를 많이 먹었겠구나….
일본인 투어 가이드가 이 정도로 막가자는 식으로 나오는데, 한국, 중국 가이드들을 얼마나 대책이 없었을까?
물론 한 사람만 보고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집단의 보편적인 모습일 거라고 성급한 판단을 해선 안 되는 거지만, 그동안 신 사장과 통화로 현지 사정을 보고받고 또 투어 가이드들과의 신경전을 다 전해 들은 나로서는 조금 성급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로비에 모여 구경 중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층 더 높아질 즈음이었다.
“할 말 있음 빨리하세요. 저희 시간 없습니다. 얼른 쇼핑 끝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한다고요.”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저도 저지만, 여기 고객님께서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시는 거 같은데, 왜 거짓말을 하셨는지는 본인 입으로 설명을 해 주셔야죠.”
“무슨 거짓말이요?”
뻔뻔한 가이드의 대답에 고객이 딱딱 부러지는 영어 발음으로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확한 단어들만 구사해서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그랬잖아요, 내가 면세 서류를 당신한테 전달하면서 이것도 같이 처리해 달라고 하니까, 여기 면세 서류를 보고 여긴 면세를 못 받는 매장이라고. 면세 처리도 안 해 주면서 면세가 가능하다고 거짓말을 하는 매장, 어차피 우리 여행객들은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 이 면세에 관한 부분에 대해선 손을 쓸 방법이 없고, 만약 이 부분에 컴플레인을 걸게 되더라도 결국엔 시간적, 거리적 제한 때문에 면세 금액을 손해 볼 수밖에 없다고. 이 매장이 그런 부분을 악이용하는 악질 매장이라고 당신이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
“그래서 나한테 얼른 가서 환불을 요구하고, 환불받은 돈으로 당신이 바우처를 나눠준 매장에서 다시 구입을 하라고 했잖아요. 설명하세요. 이분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제가 그 부분은 나중에 이동하면서….”
“노! 여기서 정확하게 설명해 주세요. 만약 당신이 날 상대로 거짓말을 한 거라면 난 여기서 당신이 하는 인솔 코스에서 빠질 겁니다. 그리고 제가 이 일정을 예약한 여행사로 바로 연락을 넣어 컴플레인을 걸 거예요. 지금 당신은 내가 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 10주년에 맞춰 1년 넘게 계획하고 준비한 유럽 여행을 한순간에 망치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걸 아셔야 할 거예요.”
고객의 말에 로비 1층에 모여 싸움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높아져 갔다.
그리고 난 하나하나 확인했다.
고객의 말이 끝이 나는 순간 해당 가이드와 거의 동시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다른 사람들을.
그들은 분명 운이 좋아 이 싸움의 당사자가 되는 걸 피하게 된 또 다른 가이드들이겠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투어 가이드에게 내가 물었다.
“참 신기하네요. 여기 이 홍성 타워는 오늘 그랜드 오픈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 그랜드 오픈을 한 이 업장의 정보를 그렇게까지 잘 알고 며칠 전부터 꾸준히 인솔을 해 왔을 그룹들에게 그렇게 설명을 할 수 있었습니까?”
“거짓말.”
내 말에 가이드는 마치 내가 한 말에 꼬투리 잡을 게 생겼다는 듯, 그래서 야바위처럼 그 꼬투리로 이 문제의 핵심을 다른 곳으로 물타기 할 수 있을 거라 희망을 품었는지 곧바로 되받아쳤다.
“여기 오픈은 세 달 전에 했어요.”
“….”
가이드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컴플레인을 걸었던 고객은 이번엔 날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래서 난 빅토리녹스, 발리 팩토리, 그리고 짐멀리 쪽 관계자들을 향해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여기 1층과 스타벅스가 오픈했던 시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지난 세 달 동안 이 여자와 같은 진실되지 못한 가이드들로 인해 홍성 타워에 들어온 귀사의 브랜드 영업에 큰 손해가 발생했을 거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해지는 순간입니다.”
“그 부분은 저희 쪽에서 법적 대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제가 났던 빅토리녹스 측 대표가 약속을 하듯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은 증거도 없고, 있다고 한들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이번 건은 명백한 증거와 증인이 있고, 또 곧 폴리짜이(경찰)가 올 거니까 바로 진행을 할 수 있겠네요.”
폴리짜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투어 가이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경찰이 도착했다.
우린 이 상황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건물 밖으로 해당 고객과 투어 가이드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 거리를 지나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해당 문제를 노출시키며 경찰이 있는 앞에서 현 상황을 설명했다.
지나간 일들, 그리고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다른 투어 가이드, 여행사들은 귀찮아서 일절 걸고넘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일본인 투어 가이드만 지목하여 그녀가 그녀의 고객들을 상대로 한 홍성 타워의 영업 방해에 대해 고발했다.
출동한 경찰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클레임을 걸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셔서 클레임을 접수하셔야 합니다. 그 비용은 500프랑입니다.”
난 내가 한국에 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피해는 우리 쪽이 입고 있는데, 이걸 제대로 문제화시키기 위해선 500프랑의 비용이 든다는 말이었다.
정말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절차였고, 예전 코로나 사태 때도 느꼈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 뭐가 중요한 건지를 모르는 거 같았다.
그러니 법이 이따위겠지.
하지만 그 500프랑, 그게 뭐 큰 문제가 될까 싶었던 거지.
“진행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