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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95화 (295/325)

#295

여유 있게 해요, 여유 있게…

그렇게 4월의 둘째 주가 시작됐다.

박기태와 민규는 그보다 일주일 전에 이미 스위스로 넘어가 홍성 타워 그랜드 오픈을 준비 중인 상태였고, 난 회사를 대표해서 영업이사 자격으로 그 오픈식에 참석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 공식적으로 이사 승진을 한 건 아니었다.

상반기 인사 승진 기간이 영업부 사정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뒤로 미뤄질 정도로 홍성은 이번 홍성 타워 그랜드 오픈에 전사적 집중을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 오픈식에 최소 이문 전무님이라도 얼굴을 내비치시는 게 맞는 건데, 아무래도 CGM의 홈그라운드다 보니 돌발 상황이 생길 우려가 있었고, 그런 부분을 모두 감안해서 내가 그냥 이사 자격으로 홍성을 대표해 참석하게 된 것이다.

4월의 스위스는 1년 사계절을 모두 품고 있었다.

참 놀라운 풍경이었다.

취리히에서 인터라켄으로 넘어가는 동안 브루너라는 고산지대를 한번 거쳐야 했는데, 그곳은 아직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타지 않아 쌓인 눈이 그대로인 모습이었고, 저 멀리 코발트블루 빛깔 호수가 인상적이었던 툰 시내에는 한국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특이한 색상의 꽃들이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최 실장이 일부러 조금 빠른 길을 선택해서 들어선 라툰부르너라는 길은 말 그대로 여름이었다.

거리 분수에선 벌거벗은 어린 천사 동상이 수줍은 듯 소변을 보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물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와….”

인터라켄 서역 앞을 지나칠 때, 난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거리는 관광객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장난 아니네요.”

차창으로 시선을 돌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관광객 무리를 보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최 실장은 피식하고 웃으며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좋네요’라는 말로 이제 막 성수기 초반에 들어섰을 뿐인데, 자기가 봐도 날씨가 좋아서인지 성수기 피크 때만큼 사람들이 많은 거 같다고 했다.

“….”

최 실장이 운전대를 잡은 차 안 조수석에 앉아 홍성 타워 앞을 지나칠 때였다.

최 실장이 차 핸들을 꺾어 운터젠 방향으로 차 머리를 돌리는 타이밍이었는데,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며 소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차 공간이 안쪽으로 있었기에 중간에 내리기도 애매한 상황.

하지만 이미 난 홍성 타워 입구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는 많은 관광객들을 봐 버렸고, 그와 동시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호에벡 거리를 통해 홍성 타워 쪽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파를 보고 바로 성공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됐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흥분된 속마음을 최 실장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무덤덤한 척 연기를 했지만, 이미 난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로 여기가 바로 노다지판이라는 걸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밀라노나 파리처럼, 거리가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이 좁은 호에벡 거리 하나로만 통하는 인터라켄.

여긴 그냥 구매력 높은 관광객들을 가둬 놓고 때리는 형국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선 아무리 CGM이 편법을 들고나와 우리의 장사를 방해한다고 해도, 자가 건물을 들고 있는 신 사장, 그리고 물건을 대 주는 우리 홍성의 관계만 확실하다면, 말 그대로 뭘 갖다 놓고 팔아도 팔리는 자리가 확실했다.

아주 오래전, 벌써 30년도 더 전에 난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야구장이라는 곳을 가 봤다.

그때 난 롯데가 뭔지도 몰랐던 거 같고, 내가 왜 롯데를 응원해야 하는 건지,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때 아버지는 아버지의 친구분과 야구장에서 소주를 한잔하시고 싶은데, 아마 나도 봐야 했기 때문에 겸사겸사 날 데리고 야구장을 가셨던 게 아니었나 싶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의 첫 사직 야구장 방문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분 한 분…. 이렇게 셋이서 방문을 했던 거 같다.

야구장 안에 들어서기 전부터 난 저 안에서 뭐 어떤 게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닭꼬치 자판들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큰 양철 대야에 담긴 충무김밥을 파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얼린 생수(아마 생수인 척하며 소주를 넣어서 팔았겠지), 신문 등을 파는 모습에 야구장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한껏 들떠 있었다.

저 안에서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밌고, 새로운 세상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

그리고 그 기대는 나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었다.

처음 녹색 다이아몬드 판을 실제로 봤을 때 난 탁 트인 그라운드와 그 안에서 캐치볼을 하는 선수들의 모습에 완전히 압도당했었다.

그리고 아버지 친구분이 배가 고프냐며 사다 주신 핫바와 캡틴 사발면 한 그릇에 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그리고 난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친구분이 왜 야구장을 자주 다니셨는지….

두 분 모두 귀가 잘 안 들리시는 분인데, 그 시끄러운 야구장 안에선 아무리 목소리를 크게 높여 대화를 나눠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고, 그래서 두 분은 종종 그렇게 함께 야구장을 다니시며 그 안에서 소주도 드시고,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시간을 보내셨다고….

홍성 타워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내 기분이 딱 처음 아버지 손을 잡고 사직 야구장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었다.

저 안에서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이 모든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준비해 온 나도 쉽사리 짐작을 못 할 정도로 아직 4월의 둘째 주일 뿐인데, 벌써부터 너무 많은 인파들이 홍성 타워 1층 로비를 붐비게 만들고 있었다.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게마인드도 하지 못한 무료 공중 화장실 오픈을 인터라켄 시내 한복판에 자기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의 한 사업가가 해버릴 거라고.

실질적인 매출로는 이어지지 못하겠지만, 홍성 타워는 이미 공중 화장실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잠재 고객들을 끌어들일 만반의 준비가 끝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너무 다양한 언어들이 섞이는 공간이었다.

누군가가 화장실이 급해서 줄을 서 있었는데, 그 일행 중 한 명이 뭘 마시고 싶냐고 물어본다.

기다리는 동안 자기가 스타벅스 줄을 서서 음료를 주문하겠다는 내용 같았다.

그리고 또 어느 누군가는 화장실 줄을 서 있는 가족에게 천천히 볼일을 보라며, 자기는 기다리는 동안 빅토리녹스 나이프를 구경하겠다고 했다.

폴앤크루 매장은 매장 직원들이 손님들을 하나하나 서빙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저 고객들이 사이즈를 말하면, 그 사이즈를 찾아서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발리 팩토리 매장은 아예 랄프로렌 아웃렛 매장을 방불케 했다.

매장 중간중간에 설치된 아일랜드 형식 카운터에 이월 제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 산더미 속에서 옥석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발리니까 가능한 거다.

다른 브랜드는 모르겠지만, 스위스에서만큼 발리를 좋은 가격에 구매할 순 없을 테니….

그런 심리가 정확하게 적중을 했고, 사람들은 열광을 했다.

짐멀리?

그나마 폴앤크루, 빅토리녹스, 발리 팩토리에 비해 한산한 샵 내부였지만, 짐멀리 쪽 매장 직원들 역시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고객들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주 주말부터 이랬습니다.”

난 최 실장의 설명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박기태를 통해 현지 사정은 전화로 보고를 받았었다.

물론 난 직접 본 게 아니었기에 반응이 이 정도로까지 폭발적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었고.

2층 스타벅스 쪽은 그냥 패스를 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잡지 못해서 호에벡 거리가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따닥따닥 붙어 있는지….

자리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제값을 주고도 테이블을 잡지 못해 서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주문 카운터 쪽에서 직원들이 포스 기계 두 개를 놓고 정신없이 주문을 받고 있었고, 그럼에도 주문하는 줄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흡사 아주 오래전, 명절 때마다 물에 불린 쌀과 각종 재료가 담긴 대야를 들고 방앗간을 찾은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뭐 명절이라도 떡 같은 건 다들 사서 차례를 지내지만, 우리 어릴 땐 방앗간에 가서 직접 떡을 했고, 또 그런 재미가 바로 명절의 재미 아니었나.

그 방앗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한쪽에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 휩싸여서 정신없이 떡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상이 될 정도로 스타벅스 안은 북새통을 이뤘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쳐진 바리케이드.

난 속으로 생각해 봤다.

과연 내일 이 바리케이드를 치워 버리면 이 북새통이 조금은 해소가 될까, 아님 이 상황 그대로 3층, 4층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차게 될까?

영문으로 적힌 온리 스태프라는 푯말이 붙은 바리케이드를 치워 3층으로 올라갔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정신없이 매장을 뛰어다니던 민규가 날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워 고개를 숙였다.

“뛰지 마요.”

“네?”

“손님이 있건 없건, 매장 안에선 뛰는 거 아냐.”

“아, 네. 죄송합니다.”

“박 팀장은 어딨어요?”

“4층에 있습니다. 지금 본사 측과 포스 커넥션 상태 같이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데리고 내려오겠습니다.”

“놔둬, 놔둬…. 한참 정신없을 텐데, 내가 올라가면 되지 뭐 하러 바쁜 사람을 내려오라고 하나. 전 대리도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해요.”

“네, 그럼.”

“또, 또!”

“…!”

“뛰지 말라고. 어디 전쟁 났어요?”

“아, 네….”

“천천히, 여유 있게 해요, 여유 있게. 마음 급한 건 알겠지만, 동선은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몸은 지금 당장 쳐낼 것만 하면 돼. 나 왔다고 액션 까는 거 아냐?”

“아, 아닙니다. 허허허….”

“웃기는… 보는 눈 많아요. 본사에서 온 사람들이 그렇게 허둥지둥대는 거 보면 현지 매장 직원들 마음이 퍽이나 편하겠다.”

“…!”

“오늘 다 못 하면 내일 하면 돼. 내일 다 못 끝내면 그랜드 오픈 하루 미루면 그만이고. 뭐가 중요한 건지 따져 가면서 일하란 말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수고.”

자리를 떠나는 민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 실장이 말했다.

“홍성 회장님 둘째 아드님이라면서요?”

“…네.”

“저는 사실 회장 아들쯤 되면 완전 금수저라서 이런 일은 안 할 줄 알았는데, 회장님 아들이란 소리 듣고 완전 놀랐어요.”

“그런가요? 하하하….”

“진짜 지난 한 주 박 팀장님도 박 팀장님이지만 전 대리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듣기로 어제도 아마 시차 때문에 새벽까지 박 팀장님이랑 둘이 남어서 한국 쪽 포스 커넥션 확인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보통 사람들은 재벌 집 자식들은 망나니에 놀고먹고, 인성도 개차반… 뭐 그런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회장님 아드님 둘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결과 왜 재벌이 될 수밖에 없는지 알겠더라고요.”

“….”

“형제지간이지만 자기들끼리 또 경쟁이라는 걸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안 사정까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그런 경쟁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우애가 돈독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떡잎이 나쁘지 않다는 걸 증명을 해야 꽃을 피울 영양분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저들의 DNA는 다 알고 있는 거 같아요.”

“다 그럴까요, 어디. 홍성의 DNA가 좋은 거겠죠.”

“그럴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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