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천천히 들어가십시오
변수.
언제부턴가 난 이 변수라는 단어에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예전엔 그 변화가 귀찮고 성가셔서 변수가 일어날 때마다 예민해지고 또 스트레스를 받아 왔는데, 그 변수로 인해 지금의 내 삶이 크게 한번 변화하고 난 이후부턴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거 같다.
변화를 두려워했던 내가 어느새부턴가 반복적인 일상을 더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런 반복적인 일상에 그나마 약간의 긴장이라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치가 바로 변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더 변수를 기대하게 되는 거 같다.
언제나 내게 유리한 쪽으로만 작용해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변수라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난 매일같이 긴장이라는 걸 할 수 있고, 또 확인이라는 걸 반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리고 이번에도 이 변수는 내게, 그리고 홍성 타워 프로젝트 전체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을 해주고 있었다.
홍성 타워 프로젝트의 성패 여부는 이미 브랜드 포지셔닝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브랜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인 것인데, 아무리 옐로 폭스와 그리덜, 그리고 킹스가 다양한 브랜드를 고루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따지고 보면 CGM의 브랜드를 적절하게 나눠 먹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도 겹치는 브랜드도 여럿 있고.
그런데 어떻게 CGM 단독으로 만토바, 링겐의 브랜드를 모두 모아놓은 홍성 타워의 브랜드 파워에 비할 수가 있을까.
이건 게임 자체가 안 되는 거라고 봐야 했다.
루가노의 폭스타운처럼 CGM이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각기 다른 플렉스 샵 세 곳으로 브랜드들을 고루 분산을 시키고 있으니, 아무리 할인 바우처를 만들어서 뿌리고, 여행사, 가이드들을 끌어들인다 한들 브랜드 화력에서부터 홍성 타워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 스타벅스가 붙고, 빅토리녹스라는 최고의 미끼 상품 브랜드까지 확보한 홍성 타워를 이겨낼 재간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텐데, 상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방어라는 걸 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으니, 내 눈엔 그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어 보일 뿐이었다.
이미 만토바 물건과 링겐 물건들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있는 상태에서 스타벅스 영입까지 확실해진 순간 승기를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빅토리녹스, 발리 팩토리, 짐멀리는 그저 그 구색을 맛깔나게 맞춰줄 조미료에 불과했던 거고.
여기서 내가 말한 변수는 바로 폴앤크루였다.
폴앤크루가 드디어 홈런 한 방을 시원하게 때려 주었다.
“미쳤다. 사고 났네….”
“어때? 괜찮지? 잘 뽑혔지?”
난 대답할 정신도 없이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장 대표가 샘플이라고 가져다준 폴앤크루 스위스 컬렉션을 펼쳐서 넋 놓고 살피기만 했다.
“디자인팀이 진짜 스페셜은 스페셜이네요. 그동안 이런 걸 뽑아낼 능력이 되는 사람들한테 쇼핑백 디자인만 계속 부탁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로….”
“자기들도 보여주고 싶었겠지. 칼을 갈았어, 그동안.”
“우와… 진짜, 이건… 하아…. 감탄밖에 안 나오네요, 진짜.”
큰 고글을 쓴 시베리안 허스키 얼굴이 맨투맨 티셔츠 정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프린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허스키가 쓰고 있는 고글에 아이거 북벽과 뫼니, 융프라우 산맥이 반사되어 담기게 디자인을 해 놓았는데, 폴앤크루의 특징인 엠보싱 처리를 그 산맥에만 적용을 시켜서 볼륨감도 훌륭하게 살려냈고, 무엇보다 보는 순간 아, 그래! 스위스에 이런 이미지도 있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컬렉션이었다.
우리가 흔히 스위스라 하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동화 같은 집, 샬레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미지들만 떠올리기 쉬운데, 이번에 폴앤크루 디자인팀은 그런 상투적인 스위스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깨뜨렸다.
큰 고글을 쓴 시베리안 허스키를 앞세워 역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스위스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그중에서도 허스키가 쓰고 있는 고글 속 엠보싱 처리가 된 만년설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맨투맨의 뒷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폐라고 하는 스위스 프랑이 실물로 프린팅이 들어가 있었다.
10프랑짜리 노란 지폐와 20프랑짜리 빨간 지폐, 그리고 50프랑짜리 녹색 지폐가 어지럽게 배열되어 있었고, 밑쪽으로는 100프랑짜리 파란 지폐와 200프랑짜리 갈색 지폐, 그리고 1,000프랑짜리 보라색 지폐가 다발로 쌓여 있는 이미지를 아주 재미나게 표현을 해 놓았다.
“허허, 허허허… 하하하… 대박. 진짜 대박. 우와….”
“어때?”
“대박이라니까요?”
“아니, 그거 말고 이젠 돈 주고 사서 입을 거 같아?”
“네?”
“왜 예전에 상무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한 적 있잖아. 작가 컬렉션을 제안하면서 상무님 작품만 놓고 본다면 솔직히 돈 주고는 안 사서 입을 거 같다고.”
“아….”
“나 그때 솔직히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이건 당연히 사서 입죠.”
“다행이다. 에휴… 그동안 고집 센 디자인팀장이랑 매일같이 콘셉트를 놓고 지지고 볶느라고 피가 다 마르는 거 같더니, 이제 좀 손발이 맞아간다.”
“디자인팀장이 고집이 셉니까?”
“세야지. 그게 정상이야. 대표가 직접 디자인을 하지 않는 이상 회사 대표가 디자인에 참견을 하는 순간 브랜드 콘셉트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면서 같이 붙어서 지지고 볶을 땐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 드는 게 아니었는데, 막상 또 이런 디자인을 턱 하니 내어놓으면 그동안 징글징글했던 게 눈 녹듯 다 사라지고…. 이게… 틀린 소리를 하면 모르겠는데 꼭 맞는 소리로 뼈를 때리니까 더 얄밉더라고. 그런데 확실히 컨트롤 업무만 볼 때랑은 또 다른 쾌감이 있어. 지금처럼 디자인 하나 멋지게 뽑히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희열이 올라온달까?”
“그런데 이거 하나가 전부예요?”
“일단 화이트 바탕이랑 블랙 바탕, 그리고 네이비, 레드 바탕으로 컬렉션을 뽑을 거야. 그렇게 컬렉션 네 개 먼저 뽑아서 홍성 타워에 보내 놓고, 스위스 추가 컬렉션은 계속 고민을 해 봐야지. 그건 그렇고 이거 한번 봐 봐. 이건 어때?”
장 대표가 그다음으로 보여준 컬렉션이 바로 그때 내가 제안했던 별자리 컬렉션이었다.
해당 컬렉션은 아직 샘플까지 뽑지는 못했다며 아이패드로 실사 이미지만 살짝 보여줬는데 이 역시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무엇보다 일본 이토 측과 단독 매장 협상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많은 컬렉션이 필요했는데, 그 부분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별자리별 다양한 컬러로 뽑아 족히 60여 컬렉션은 만들어낼 수 있게끔 콘셉트를 잡아 놓고 있었다.
“동화 일러스트 작가들을 섭외했어.”
“아, 어쩐지 그림이 그때 제가 제안했던 웹툰 스타일은 아니네요.”
“이거도 디자인팀장 고집이야.”
“아….”
“웹툰 작가한테 그림을 맡기면 자칫 조잡해 보일 수도 있을 거 같다고 걱정을 하더라고.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데, 웹툰 작가한테 그림을 맡기는 건 아닌 거 같다면서 말이야. 그렇게 또 몇 날 며칠을 둘이서 대가리 맞대고 앉아서 고민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기들 동화책에 일러스트를 넣는 작가들에게 맡겨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 자기도 말해 놓고 이거다 싶은 눈치… 뭔지 알지?”
“얻어걸렸네요.”
“딱 그런 눈치였어. 하하하… 아무튼 이거도 나름 괜찮게 뽑혔어. 깔끔해.”
“이거….”
그리고 난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를 추가해 보고 싶었다.
“응. 말해.”
“BSF 컬렉션으로도 뽑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반팔 티셔츠?”
“어차피 BSF 컬렉션 슬슬 준비하셔야 하잖아요.”
“BSF 컬렉션은 이미 섭외해 놓은 작가들 그림이 있어. 초이스도 다 끝났고.”
“추가만 하면 되는 건데요, 뭐.”
“흐음… 하긴.”
“홍성 타워 폴앤크루 매장, 작지 않습니다. 빽빽하게 채우자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장이 비어 보이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그 부분은 일단 디자인팀장한테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
“그건 그렇고 전시회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폴앤크루 작가전.
이게 대박이 난다.
모리엘츠 전시를 해 오던 갤러리아 측에 전시관을 확보해 놓고, 그동안 폴앤크루 작가 컬렉션을 만들었던 모든 그림을 전시해서 작가 컬렉션 리미티드 넘버 1번과 함께 판매를 했는데, 총 전시 기간 5일을 잡고 기획을 했던 게 단 3일 만에 매진이 나 버리는 초대박이 터져 버렸다.
그 기간 동안 폴앤크루는 폴앤크루 작가 컬렉션에 참여했던 국내 작가들을 초대했고, 그 자리에서 해당 컬렉션 리미티드 넘버 1번과 그림을 구입해 가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이벤트도 함께 열었다.
그 전시 행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준 일등 공신 로즈마리.
그녀는 폴앤크루로부터 그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오히려 폴앤크루에 허락을 구해 해당 이벤트 홍보 영상을 만들어서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업데이트해도 되겠냐고 제안을 했고, 그 제안에 장 대표는 부족하겠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고 싶다고 폴앤크루의 뜻을 밝혔지만, 로즈마리는 그 성의로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금액만큼 본 전시회의 취지대로 많은 무명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고사를 했다고 한다.
그 홍보 영상에서 로즈마리는 올해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에만 한정된 전시회를 열었지만,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해외 작가들의 작품으로 다양한 컬렉션을 뽑을 계획에 있고, 또 내년부터는 해외에 있는 작가들도 모두 초청해서 폴앤크루 작가전을 펼칠 계획이라며 폴앤크루 측의 계획을 대신 밝혀 주었다.
그렇게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김형찬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홍성 타워 오픈 축하드립니다, 공 부장님.
작정을 한 목소리였다.
이 전화를 걸기 위해 오랫동안 칼을 갈았던 게 느껴질 정도로, 마치 너희가 해 봤자지… 하는 듯한 조롱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오픈이라니요? 아직 공사 끝나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가오픈도 오픈이죠.
“….”
-스타벅스 커피 맛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비록 2층이지만, 여기 이렇게 앉아서 내려다보는 호에벡 거리 풍경이 아주 훌륭하네요.
“그럼 다행이네요. 경치야 이미 몇 번 봤지만, 스타벅스가 들어간 상태에서 여유롭게 그 경치를 보지는 못했는데… 직접 보시면서 친절하게 중계까지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아직 가오픈이라 그런지 조금 썰렁하네요?
“아직은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몰릴 시즌이 아니니 그런 거 아닐까요?”
-여긴 벌써 설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관광객들 밀려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가롭게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저희 쪽 상황을 직접 다 알려주실 여유까지 되시는 모양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연락 한번 드려 봤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 대표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 참…. 그런데 떡국은 좀 드실 수 있으십니까? 김 대표님은 좀 많이 드셔야 할 거 같은데… 몇 그릇 드세요. 한 그릇만 드셔선 안 될 거 같습니다.”
-….
“그럼 조만간 제가 연락 한번 다시 드리겠습니다. 커피 마저 드시고, 천천히 들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