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저희는 CGM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짐멀리.
한국과 아예 인연이 없는 브랜드는 아니다.
나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분명 짐멀리는 이너웨어 전문 컨트롤 업체를 끼고 한국에 한 번 들어왔다가 매출 부진으로 인해 철수를 해야 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는 브랜드다.
물론 나크리스랑 비슷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크리스와는 다른 이유로 매출이 부진했었다.
당시 어느 기업이 짐멀리를 한국에 들여왔을 땐 150년이 넘는다는 짐멀리가 가진 역사와 아직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고유한 브랜드 파워만 믿고 보정 속옷 콘셉트로 대중에게 소개를 했었는데, 그게 큰 실수였다고 난 보고 있다.
물론 짐멀리가 헉 소리가 절로 나는 금액대의 보정 속옷으로 유럽에서 꾸준한 인기를 끌어 왔던 건 사실이지만, 유럽인의 체형과 아시아인의 체형이 같을 수가 없다는 부분을 당시 짐멀리를 취급했던 이너웨어 전문 컨트롤 업체가 간과를 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짐멀리는 국내에서도 무조건 되는 브랜드다.
난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보정 속옷이 아닌 기본형 이너웨어 위주로 상륙을 시킨다면 안 될 이유가 없는 브랜드.
물론 팬티 한 장에 40만 원, 50만 원을 호가하는 브랜드이긴 하지만, 짐멀리 역시 그 안에서도 보급형 컬렉션이라는 게 존재하고, 따지고 보면 그 40만 원, 50만 원을 호가하는 컬렉션들도 극히 일부이지, 그 가격대 컬렉션이 짐멀리의 주력 컬렉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격대의 속옷이라도 이젠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변화하고 또 소비 형태도 변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있는 사람들은 40만 원, 50만 원이 아니라 더 주고라도 사서 입을 거고.
누군가의 말처럼 짐멀리라는 브랜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착용을 해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착용감이나, 만족감, 그리고 그 속옷을 입었을 때 얻게 되는 자신감은 분명 제값을 해주는 브랜드이다.
‘지미추 힐과 피아제 다이아몬드로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여성이라면 반드시 드레스 안에 짐멀리를 입고 있을 거야.’라는 어느 코미디 영화의 대사처럼, 짐멀리는 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액세서리 장치처럼 여겨져 왔었다.
12월에 다시 찾은 스위스.
그리고 말로만 들어봤지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었던 스위스의 베벌리힐스, 생 모리츠.
온 세상이 눈에 덮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넓게 펼쳐져 있는 고급 전원주택촌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그 전원주택촌을 지나 도착한 좁은 명품 거리는 마치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마을 풍경 같았다.
실제로 풍기지는 않았지만, 마치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고소한 바게트 굽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할 것만 같았다.
그 거리의 거의 끄트머리 즈음에 ‘짐멀리 하우스’라는 간판이 달린 작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짐멀리 역시 모리엘츠처럼 건물 전체를 본사로 사용하면서 1층엔 짐멀리 매장을 운영한다는 걸 신 사장에게 미리 전해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그 건물 1층을 짐멀리 매장이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리 커피가 함께 들어와 있는 게 약간은 의외였다.
그리고 직접 매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이 매장이 한때 프랑스 사교계 여성들을 짐멀리 홀릭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짐멀리의 본사 매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작아서 또 한 번 놀랐다.
날 이곳까지 직접 데리고 와 준 신 사장.
신 사장과 매장 직원은 이미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듯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로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고, 신 사장은 이내 그 직원에게 날 소개했다.
매장 직원의 영어는 수준급이었다.
매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큰’이라는 성을 가진 짐멀리의 사장을 직접 만나게 됐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호큰. 홍성 인터내셔널의 공은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공. 이쪽으로 앉으세요.”
은발이 고급스러운 중년의 남성이었다.
수염의 색깔을 봐서는 염색을 한 건 아닌 거 같았다.
외모로만 보면 분명 크게 다르지만, 풍기는 이미지는 모리엘츠의 타미 총게와 아주 흡사했다.
브랜드 급에 맞는 품위가 자연스럽게 행동과 말투에 모두 녹아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자기네 브랜드에 대한 자신감이 여유로 묻어나왔지만, 그 여유가 결코 의미 없는 콧대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저 역시 처음 미스터 신을 통해 인터라켄 홍성 타워에 입점 제안을 받았을 때 홍성 인터내셔널에 대해 공부를 해봤습니다. 깊게 할 필요는 없더군요. 모리엘츠의 아시아 마켓 SC 권한을 가지고 있는 기업.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린 홍성 타워에 들어갈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아시아 마켓 전체까지는 아니죠. 아무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만들어지기 전, 이미 미스터 신을 통해 미스터 공이 어떤 제안을 하기 위해 직접 스위스까지 오시려고 하신 거지 대충은 들었습니다.”
난 내가 먼저 본론을 꺼내기 전에 본론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상대의 배려에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한국 시장. 분명 쉽지 않은 시장입니다.”
“일전에 한번 들어오셨다가 철수를 하신 경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순간 난 말문이 막혔다.
“두 번 들어갔다가 두 번 다 낭패를 보고 철수를 해야 했죠.”
“두 번이요?”
“네, 한 번은 갤러리아 백화점과 깊은 커넥션이 있는 컨트롤 업체를 통해 들어갔다가 2년도 못 버티고 철수를 해야 했고, 다른 한 번은 워커힐 카지노 쪽에서 거기 명품관에 자리를 하나 내줄 테니 들어와 볼 생각이 없냐고 하길래, 면세 시스템도 잘 잡혀 있는 거 같고, 딱히 큰 투자가 들어갈 거 같지도 않아서 들어갔다가 아무런 재미도 못 보고 자리를 빼줘야 했죠.”
“아… 카지노 면세점 쪽으로도 입점을 해 보셨군요. 그 부분은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
“그럴 겁니다. 말 그대로 들어갔다가 바로 쫓겨나다시피 했으니까요.”
“쫓겨나다니요?”
“하하하… 조크입니다, 조크. 컨트롤 기업을 끼고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저희가 직접 여기서 현지 직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시스템이더라고요. 쉽지가 않았습니다. 몇 달 만에 크고 작은 인사 사고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재고가 비는 현상까지 생기더군요. 그런 사소한 부분 때문에 철수를 결심한 건 아니었지만, 매출에 대한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버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곧바로 철수를 결심했었죠.”
“그러셨군요.”
“아시아 마켓은 일본과 태국이 가장 편합니다, 지금껏 해본 결과.”
“그건 아마 홍성 타워 프로젝트 이전까지는 저희 홍성을 모르셨기 때문일 겁니다. 고백하건대, 속옷 관련 유통은 저희도 처음입니다.”
“그래서인지, 저 역시 홍성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보인 자신감에 상대는 미소 대신 진지한 표정으로 그 자신감을 존중해주었다.
이런 베테랑들과 사업을 이야기하다 보면 비록 상대일지라도 이런 섬세한 반응 하나하나에 배울 게 참 많은 거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같은 미간을 좁히는 건데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미스터 호큰의 미간 속 주름 속엔 상대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1센트라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죠. 그런데 홍성이 기대하는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마진 부분과 그 외 마케팅 비용만 따로 신경을 써 주시면 감사할 거 같습니다.”
“마케팅 비용은 어떻게 사용을 하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모리엘츠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모델 광고를 진행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짐멀리의 매력이죠. 저희 홍성 인터내셔널 역시 짐멀리를 받아서 컨트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특별히 모델을 써서 브랜드 홍보를 한다던가, 그 외 영상 매체를 통해 브랜드를 알리겠다고 짐멀리가 쌓아온 명성을 가볍게 사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부분은 정확하게 약속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이미 두 번의 진출 경험이 있고, 또 그 두 번 중 컨트롤 기업을 끼고 들어갔던 한 번은 해당 컨트롤 기업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브랜드가 쉽게 자리를 못 잡는다는 걸 직접 봤습니다.”
“홍성은 현재 한국이란 시장에서 업계 2위 기업과 큰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는 업계 1위 기업입니다.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 그리고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편집샵 브랜드, 거기에 확보하고 있는 유통 판 수 모두 타 기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하고, 또 확보하고 있는 유통 판들과의 관계 역시 매우 긴밀합니다. 현재 홍성은 그렇게 갖추어진 인프라를 기반으로 홍성 멤버십이라는 포인트 시스템을 운영 중이고, 그 포인트만큼의 추가 매출을 성공적으로 유도해 내서 성공적인 사례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죠. 어차피 그 포인트는 홍성 자체 편집샵 브랜드 측에서 지불하는 마케팅 비용이거나 해당 멤버십에 참여하고 있는 브랜드들 측에서 제공하는 크레딧 노트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가 그 시스템에 어느 정도 포인트 제한을 걸어 놓고, 그 제한 밑으로 포인트가 쌓인 고객에 한해 짐멀리 아이템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떨까요?”
“사은품으로 증정을 하겠다는 뜻입니까? 저희 브랜드를?”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난 우선 상대를 진정시켰다.
“짐멀리의 매출을 보장하겠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홍성의 짐멀리 오더 물량을 보장해 드리겠단 뜻이죠. 보급형 모델을 대량으로 확보해서 저희 쪽으로 물량을 공급해 주신다면 홍성은 짐멀리 측에서 기대하는 물량 그 이상을 오더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시기 부탁드립니다.”
“…?”
“결국 홍성 멤버십에 가입을 하고 그만큼의 포인트를 적립한 고객들은 기본적으로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아직 생소한 브랜드인 짐멀리를 소개하고 사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추가 구매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충성도 높은 고객들은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신을 하십니까?”
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에게 나의 속옷을 보여주는 시늉을 했다.
약간의 유머와 재치가 필요한 타이밍.
“제가 직접 입어 봤으니까요. 그리고 현재 제가 입고 있으니까요.”
“…!”
“남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큰돈을 쓰는 스타일이 못 됩니다. 그럼에도 짐멀리는… 투자를 하게 되더라고요. 마치 집 안은 대충 꾸미더라도, 침대 매트리스만큼은 최고 좋은 거로 선택하게 되듯이. 저는 짐멀리가 이미 루가노 폭스타운에 짐멀리 단독 매장이 들어가 있음에도 CGM 밭인 인터라켄에서 홍성 타워 입점을 결정하신 것만으로도, 저희 홍성 측과 더 많은 사업을 함께해 볼 의향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입니다. 루가노 폭스타운과의 인연은 깊지만, 사업은 사업이니까요. 인터라켄도 분명 작은 시장은 아닌데, 아직 들어갈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차에 홍성 타워 측의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지요.”
“머지않아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에도 홍성 타워가 들어설 겁니다.”
“…!”
“물론 그곳에서도 홍성은 귀사만 관심이 있다고 하시면 귀사의 공간을 따로 준비해 둘 생각입니다.”
“혹시….”
“네, 말씀하시죠.”
“CGM과의 경쟁에 저희 짐멀리를 사용하시는 건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리엘츠 역시 유럽 SC권을 포함해 아시아 쪽까지 CGM 쪽에서 SC권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아시아 쪽 SC권은 홍성 인터내셔널 쪽으로 넘어갔고.”
“….”
“이번에 홍성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CGM과의 관계를 대충은 알게 됐습니다. 혹시 모리엘츠 때처럼 저희 쪽으로 거절하기 힘든 제안들을 계속 던지시는 이유가 CGM 쪽을 도발하기 위함이 아닌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그럴 리가요.”
난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는 파트너를 절대 의미 없는 경쟁 도구 정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쟁이라니요. 저희는 CGM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쪽이 저희를 경쟁 상대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까지는 저희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저희는 CGM을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다만 때때로 거슬릴 때는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저희 홍성은 큰 힘 들이지 않고 가볍게 치워냈습니다. 지금도 그러는 중이고요.”
“점심이나 같이 먹으러 갈까요?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요 앞에 치즈 퐁듀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