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 곰탕 국물을 한 숟갈 떠먹은 후 말했다.
“저 누나 있는 거 다들 알고 계시죠?”
“…네.”
“매형이 사업을 하다가 평생지기한테 뒤통수를 크게 한 방 얻어맞았었어요. 그 결과 온 집안이 휘청거렸죠.”
“….”
“아마 그때 이후로 저한테 그런 트라우마가 생긴 거 같아요. 누군가가 뒤통수치는 걸 보면,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하게 되더라고요.”
“음…”
“물론 사람이 살다 보면 처한 상황도 다 다르고, 입장 차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자기 혼자 살겠다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함께했던 파트너, 동료… 지인들 뒤통수치는 걸 보면 꼭 제 매형이 뒤통수를 맞아 나의 20대가 내 삶에서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그때가 떠올라서 참지를 못합니다.”
“아… 그래서 상무님이 알렌 강을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스카우트해 왔을 때도….”
“뭐 꼭 그것만 그런 건 아니고, 제 지난 홍성 생활을 되돌아보면 꼭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내가 너무 그 당시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필요 이상의 리액션을 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남는 상황이 제법 많아요.”
“….”
“문 차장 건도 그렇고.”
“…!”
“물론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문 차장 건은. 하지만 문 차장도 억울할 거예요. 자기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많은 팀장들이 팀 세팅을 위해, 더 나은 맨파워 확보를 위해 부하 직원들의 파견 근무를 막는 경우가 많은데, 재수 없게 그걸 저한테 들키는 바람에 본사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흐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이젠… 그런 트라우마로부터 좀 벗어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냥은 힘들고, 이번에 CGM, 그리고 김형찬 그 인간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시원하게 그 트라우마를 털어버리고 싶네요.”
“그런 이유라면….”
안 차장이 말했다.
“우리가 또 무조건 협조를 할 수밖에.”
* * *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영업 마케팅부에서 김 차장이 내려왔다.
“부장님.”
“네, 어쩐 일이세요?”
“커피 한잔 하실까요?”
“커피… 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고작 커피나 같이 마시자고 층도 다른 사무실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테니까.
“담배는 끊으신 겁니까?”
“끊어야죠. 애 뇌량 안 보인단 소리 듣고 한 몇 주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 정말 거짓말처럼 끊게 되더라고요. 하하하….”
“그렇죠. 내 몸 가는 건 별로 무섭지 않은데, 애 몸에 이상이 생기면 부모인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뭐라도 해야죠. 그게 부모죠.”
“그러니까요. 처음 애한테서 뇌량이 안 보인다는 소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나 때문이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애가 생각처럼 잘 안 생길 때부터 줄곧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임신이 됐다고 하니까 그동안 내가 내 몸을 너무 혹사시켜 오진 않았나, 그런 몸 컨디션이 애한테 어떤 영향을 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뇌량이 안 보인단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가 죄인이 된 거 같더라고요.”
“이젠 뭐 괜찮잖아요.”
“네, 다행히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럼 된 거죠. 꼭 애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담배는 백해무익한 거죠. 잘하신 겁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탕비실 옆 휴게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김 차장이 마치 허를 찌르듯 물어왔다.
“이사님한테 대충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뭘요?”
“이사 계약 제안 수락하셨다고요?”
“아, 그거… 네, 뭐… 어차피 언제 해도 해야 되는 거 같아서, 조금이라도 몸값이 살아 있을 때 해버리려고요.”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요?”
“3부장 체제로 가는 걸 조건으로 내거셨다고 들었습니다.”
“…!”
“혹시, 저 때문입니까?”
“….”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미련하십니까? 이사 계약은 좋게 말해 임원 승진이지, 현실적으로는 계약직 전환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죠.”
“그럼 한 푼이라도 부장님 몸값을 올리려고 해야지, 왜 이 좋은 기회에 가장 의미 없는 카드를 협상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셨습니까?”
“의미 없는 카드라니요? 저한테 현 삼차장님들 중 의미 없는 카드는 하나도 없습니다.”
“양 차장을 올리는 게 맞는 거죠.”
“….”
“영업부가 무거워져서 그 파워 밸런스를 맞추는 게 걱정이셨다면 차라리 해외 영업부만 따로 떼서 양 차장, 안 차장 이렇게 2부장 체제로 돌리고 영업 마케팅, 기획 쪽은 양 차장이 차고 나가게 만들고, 해외 영업부는 안 차장 구도로 맞춰 놓는 게 누가 봐도 맞는 거죠.”
“차장님….”
“말 나옵니다. 이거 틀림없이 말 나옵니다, 부장님.”
“그게 걱정이십니까?”
“홍성은 사장님 한 분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회사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장님은 그렇게 맞춰 주겠다 말씀을 하시겠죠. 부장님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못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나중 일은 어떻게 감당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부서장들, 그리고 그 부서장들의 다이렉트 파이프 임원진들의 견제는 어떻게 감당을 하시려고요. 안 그래도 영업 쪽으로 파워가 쏠려 있는 홍성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덩치를 키우겠다고 3부장 체제를 맞춰 달라고 하는 건 다른 부서나 임원진들 입장에선 욕심으로 비춰질 겁니다.”
“그럼 제대로 비춰진 거죠.”
“…네?”
“욕심이 맞다고요.”
“그, 그게 무슨….”
“어차피 할 거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부장님.”
“차장님 말씀대로 임원 승진은 계약직 전환이죠. 언제 짤려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걸 해 보겠다고 하는 겁니다. 제게 그 도박을 제안한 건 회사입니다. 그럼 그 리스크만큼의 판돈은 회사가 깔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제가 요구해도 되는 걸 요구한 거라고 보는데요. 어차피 해야 되는 게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임원까지 단 마당에 다른 선배 임원진들 눈치 보며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처럼만 해 나가시면 분명 부장님은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욕심은 조금만 내려놓으시고 차근차근 하십시오.”
“어차피 올라갈 거 왜 좀 더 빨리 가면 안 됩니까?”
“하아… 부장님.”
“차장님 때문에 제가 무모한 딜을 걸었느냐고 물으셨죠?”
“….”
“네, 맞습니다. 차장님 혼자 남겨놓고 양 차장, 안 차장 둘만 올리려니까 차장님이 눈에 밟혔습니다. 앞으로 제가 이사를 달고 임원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차장님이 가지고 계신 정치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거 같아서요.”
“…!”
“아무것도 안 해주고 차장님 능력만 빌려달라고 하면… 그러는 것만큼 비양심적인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김 차장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때 제가 분명히 말했죠? 차장님의 사내 정치력, 절 위해서만 써달라고.”
“…!”
“차장님은 제가 그동안 아껴두고 있었던 진짜 제 히든카드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영업부를 3부장 체제로 키워서 누군가의 견제가 들어온다면… 그건 차장님이 책임지고 푸셔야 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하아… 공 부장.”
“네, 차장님.”
“고맙다, 진짜.”
“무슨 그런….”
“내가… 진짜 좀 더 노력할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차장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날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인 후 휴게실을 나갔다.
알 수 없는 쾌감.
김 차장의 진심을 샀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온몸에 전율이 올라오고 있었다.
꼭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만 나의 것이 늘어나는 게 아니란 걸 배워갈 즈음이었다.
뭔가를 좀 더 가지고 싶다면, 먼저 상대의 배를 채워주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라는 걸 알아갈 즈음, 그렇게 난 천천히 영업부를 떠날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토 측 MD 총괄이 만토바 물건을 인천 창고에서 바로 받는 건으로 한국을 찾았다.
해외 영업부 쪽에서 회사 귀빈 환대 전용 차량으로 공항 픽업을 진행했고, 그 건 역시 안 차장은 박기태에게 맡겼다.
“홍성 인터내셔널 공은태 입니다.”
“이토 MD 총괄 사가모토입니다.”
우린 중형 사이즈 회의실을 하나 빌려 이토 측 담당자를 맞이했고, 그곳에서 서로의 입장과 요구 조건, 그리고 서로가 기대하는 파트너십의 성격을 확인했다.
“새로운 브랜드를 번들(끼워 팔기)로 해 달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내용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일본인 특유의 영어 발음.
하지만 어색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발음이었다.
사가모토는 아이작은 번들을 하길 희망한다는 우리 홍성 측의 기대에 MD들 특유의 깐깐한 자세로 일차 거리를 두려고 했다.
“스위스 브랜드입니다. 이탈리아 만토바 쪽에서 생산되는 브랜드이기도 하고요. 세일즈 포인트는 넘쳐납니다. 다만 아직 아무런 인지도가 없다는 게 약간의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아지지만, 그 부분 역시 이토라면 일본 시장에서 확보하고 있는 유통력으로 충분히 커버를 칠 수 있으리라 보아집니다.”
“그런데 미스터 공.”
“네, 사가모토. 말씀하시죠.”
“저는 만토바 물건을 인천 창고에서 받는 조건으로 폴앤크루를 폴앤크루 측이 희망하는 저희 쪽 유통 판 전 지점에 깔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해 주기로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한 사전 조율은 다 끝이 났고, 저는 이번에 인천 창고를 둘러보고 디테일한 마진 협상만 하면 되는 거로 알고 왔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작에 대한 이야기는 사전에 일절 하지 않았으니까.
사가모토는 꽤 신사적인 협상 능력을 가진 자였다.
우리 측의 요구를 명확하게 거절할 줄도 알았고, 그 거절에 대한 명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확실히 MD 총괄이라 그런지 그 나름의 협상 능력이 탁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홍성의 홈그라운드고,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한국까지 직접 넘어왔을 땐 만토바 물건에 관한 마진을 어떻게든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잡아내고 돌아갈 책임이 그에겐 있어 보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런 상대의 절실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맞는 말입니다. 다 맞는 말씀이시긴 한데…. 딱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네요.”
“어떤….”
“폴앤크루는 저희 쪽 협상 무기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폴앤크루에 대한 브랜드 이해가 부족하신 거 같아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폴앤크루는 저희 홍성 입장에서 이토 측에게 만토바 물건 마진을 낮춰 줘야 하는 이유가 안 됩니다.”
“…?”
“폴앤크루는 안 팔리는 브랜드가 절대 아닙니다, 사가모토.”
난 어이없는 웃음을 상대에게 일부러 들키며 말을 이어갔다.
“알렌 강이 이토 측과의 미팅을 먼저 했다 뿐이지, 만약 알렌 강이 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 유통 판과 먼저 접촉을 했더라도, 만토바 물건에 대한 이야기 없이 입점을 시킬 수 있을 만큼 파급력이 있는 브랜드입니다, 폴앤크루는.”
“…!”
“아니, 혹시 폴앤크루가 이토가 가진 유통 판 지점들에 들어가서 그 유통 판이 기대하는 만큼의 매출을 못 올릴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뇨, 전 완전 반대 생각입니다. 오히려 폴앤크루의 입점으로 이토의 유통 판들은 없던 매출을 추가로 더 올리게 될 겁니다. 아직 일본까지 진출을 안 했다 뿐이지, 많은 일본 커스터머들이 폴앤크루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거나, 혹은 일본 아티스트들이 폴앤크루 본사 쪽으로 자신들의 그림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모르셨던 건 아니죠?”
“….”
“그런 브랜드를 어떻게 저희가 만토바 물건 마진을 무기로 이토 측에 깔려고 한다고 생각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꼭 이토가 아니라도 됩니다, 폴앤크루는. 다만 저희는 이토의 유통 장악력을 믿고 있고, 또 이토와의 관계는 앞으로도 꾸준히 좋기를 희망하는 차원에서 이토가 희망하는 직거래를 중국 이우를 거치지 않고 해주는 쪽을 고려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작 번들을 희망합니다.”
“…!”
“미니멈 개런티 오더는 이우가 아닌 인천 창고에서 바로 받아 가시면서 남기게 될 마진의 70% 정도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2밀리언 정도씩만 오더를 해 주시면 모두가 해피해질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