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5주네요.”
의사의 입에서 임신이 확실하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난 책상 아래에서 강혜선의 손을 꼭 잡았다.
강혜선 역시 혹시 몰라 테스트기 세 개로 확인을 하고 또 확인을 했던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린 의사의 입에서 임신이 확실하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안심하고 또 감사했다.
“건강한가요?”
나의 물음에 의사는 한참 동안 싱긋이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올챙이처럼 생긴 작은 생물체가 찍힌 사진을 손짓하며 내게 묻는 의사.
그제야 난 의사가 내게 농담을 던진 거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제가 봤을 때 정상적인 위치에 착상이 잘된 거 같습니다.”
“아, 네….”
“궁금한 게 많고 또 오래 기다려 오신 만큼 걱정도 크시겠지만 지금 어머니 나이면 그렇게 노산도 아니에요. 사십 대 중반에 첫 임신을 하시는 분들도 요즘엔 흔해요. 그러니까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자고요.”
“네, 감사합니다.”
오후 1시 30분.
분명 배가 고파야 정상인데, 임신 사실을 확인받기 전까지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인지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건 강혜선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봐도, 그냥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 아무거나 빨리 나오는 거로 먹자고 하는 강혜선.
난 그런 그녀에게 혹시 회사에 임신 사실을 말했냐고 물어봤다.
“아직 못 했지.”
근처 곰탕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눴다.
“그래도 해야지.”
“해야지. 해야 되는데… 지금 타이밍이 조금 그래.”
“뭔 타이밍?”
“과장 단 지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임신했다고 말하면 다들 좋아하겠다, 그지? 당연히 인상 쓰지.”
“그게 왜 인상을 쓸 일이야?”
“진우 대리 대신 내가 과장 올라간 거잖아.”
“진우 씨보다 당신이 3년이나 입사 선배 아냐.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라도 그동안 당신이 승진 양보한 게 어디 한두 번이냐고. 회사 입장에선 당신이 지난 몇 년간 꾸준히 2세 준비하고 있다는 거 알면서도 달아줄 만하니까 달아준 거 아니겠냐고. 혹시 뭐 과장 달아줘 놓고 벌써부터 실적 압박 주고 그런 거야?”
“그런 게 없을 수가 없잖아. 그건 과장으로 올려줘서가 아니라 대리, 평사원 때에도 줄곧 있어 왔어. 왜 당연한 걸 물어?”
“그럼 그 부분만 채워 주면 눈치 안 보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실적만 확실하게 올려주면 출산 휴가가 문제야?”
“그럼 뭐 내가 깔끔하게 정리해 줄까?”
“피… 당신이 무슨 수로?”
“뭐지, 그 반응은? 지금 남편 능력을 무시한다 뭐 그런 도발로 받아들여도 되나?”
“아이고… 그래서 자존심에 스크래치 생기셨쪄요? 우쭈쭈 해 줄까?”
“아놔, 진짜. 안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스위스 관련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해외 투자 관련 대출….”
“그만.”
“….”
“딱 거기까지.”
“….”
“오버 좀 하지 마. 나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야. 일로는 절대 당신이랑 안 엮여. 그리고 나 당신이 생각하는 거처럼 그렇게 약한 사람 아냐.”
“누가 당신이 약하대?”
“설마 내가 이만한 일 혼자 해결 못 하겠어? 나만 특별한 것도 아니고, 다들 똑같은 시기 지혜롭게, 어른스럽게 헤쳐 나가는데, 이게 뭐라고 그렇게 걱정을 해? 그냥 지금은 우리 지점뿐 아니라 금융 계열 전반적으로 상황이 별로 안 좋아. 거기다 지점장님도 매일같이 본점 불려가서 깨지고 돌아오는 상황이고. 거기에 나까지 보탤 필요 없잖아. 조금 상황 지켜보다가 지점장님 기분 좋을 때 슬쩍 말하면 돼. 당신 말대로 내가 어디 그동안 승진에 목숨을 걸어 왔던 사람도 아니고, 내 타이밍 때도 몇 번이나 먼저 가라고 양보를 해줬는데, 그런 나한테 뭐라고 할 거야?”
“그런데 있잖아.”
“응?”
“오해하지 말고 들어. 정말 난 당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일 그만둘 생각 없냐고?”
“….”
“그랬음 좋겠어? 일 그만두고 집에서 애 볼까?”
“음….”
“만약에 당신이 그러길 원하면 진지하게 생각은 해 볼게.”
“나는 그냥 당신이 걱정돼.”
“뭐가?”
“그냥… 경험이 없으니까, 나는.”
“나는 뭐 경험이 있어?”
“하하하, 크크큭…. 그걸 또 그렇게 받아치네. 암튼 뭐… 나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아무 상관 없어. 애 태어나면 무조건 육아도 함께할 거고. 근데 그런 거 다 떠나서….”
“나는 있잖아.”
“….”
“멋있는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오히려 현모양처 같은 게 더 적성에 맞을지도 몰라. 그런데 우리 인생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너무 많이 들어. 그래서 일을 못 놓겠어, 아직은.”
“나는 당신이 그냥 아름답게 나이가 들어 갔음 좋겠어. 이런저런 스트레스 같은 거 안 받고….”
“….”
“우리 누나. 젊었을 때 참 예뻤거든? 그런데 아영이 낳고 매형 사업 몇 차례 엎어진 뒤로 완전 폭삭 삭았잖아. 나 그거 볼 때마다 진짜 가슴이 아팠거든.”
“다 일러준다, 삭았다고 말했다고.”
“그래서 물어본 거야, 다른 뜻이 있어서 물어본 게 아니라. 일하는 게 행복하면 해.”
“일하는 게 행복하단 말은 안 했거든?”
“뭐야 그럼, 도대체.”
“로또 낳고 조금만 더 해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고민해 볼게. 결국은 우리 만족하자고 만든 아이잖아. 그럼 당연히 포기할 건 포기를 해야지. 그래도… 아직은 좀 더 해 보고 싶어. 지금 내 마음이 그래. 내 욕심이라는 것도 잘 알겠는데, 그냥 내 맘이 그래. 엄마도 틀림없이 언니 때처럼 도와주실 거고….”
“장모님도 장모님 인생 사셔야지. 언제까지 손주들만 봐주실 순 없는 거 아냐. 그거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돼. 아영이 어릴 때 우리 엄마 고생하신 거 생각하면 난 아직도 마음이 안 좋아. 물론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걸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이 나은 자식까지 당연하게 다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하긴 그건 또 그렇다.”
“천천히 고민해 보자, 같이.”
“그래, 지금은 그냥 로또 생긴 걸로 행복하기만 하자.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식사가 대충 끝나갈 즈음, 난 사장님께 받은 상품권 봉투를 강혜선 앞으로 내밀었다.
“뭐야, 이건?”
“사장님께서 주시더라. 당신 임신했다고 하니까 축하한다면서 말이야.”
“뭘 이런 걸 사장님이 직접 챙겨주시고 그래?”
“그러게, 사람 부담스럽게… 암튼, 당신 데리고 백화점 가서 선물이나 하나 사 주라면서 주시던데… 그냥 당신이 들고 있어.”
“아싸… 이거 우리 로또 유모차 사는 데 쓰면 되겠다.”
“그걸 뭐 벌써부터 신경 쓰고 있어? 그냥 들고 있다가 배불러 오고 몸 붓기 시작하면 옷이랑 신발 같은 거 작아질 거 아냐. 그냥 당신 옷이나 사.”
“언니 거 받아서 입으면 돼. 언니 임신했을 때 입었던 거 그대로 가지고 있을 거야.”
“아이고, 짠순아,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그렇게 가방, 가방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낄 땐 안 아끼고 꼭 보면 써야 되는 데에만 아끼려고 들지?”
“내가 뭐 일 나가서 은행에 잘 보일 사람 있어?”
“나 은행에서 첫눈에 당신한테 반했거든?”
“그럼 나 계속 예뻐도 돼?”
“예뻐서 반했단 말은 안 했어.”
“죽고 싶어?”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젠 제법 배가 많이 불러온 장향은에게 기회가 좋아서 한번 물어봤다.
혹시라도 장향은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박 이사와 사장님께만 말씀드렸던 강혜선의 임신 사실을 먼저 말해준 뒤, 출산 후엔 어떻게 일을 할 거냐고 물어봤다.
“집사람도 향은 씨처럼 계속 일을 하겠다고 해서 말이죠. 줄곧 기다려 왔던 애였는데, 막상 임신을 했다고 하니까 기다린 만큼 부모가 될 준비를 제대로 하지는 못한 거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꾸 드네요.”
“우선 축하드려요, 부장님.”
“고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남편도 육아 휴직이 가능한 상황이고, 또 친정, 시댁 양쪽에서 낳기만 해라, 보는 건 우리가 알아서 봐주겠다… 는 식이라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거 같아요. 오히려 저희 부부는 양가 부모님들 모두 너무 일찍 일을 그만두셔서 오히려 경제적인 압박이 더 심한 편입니다. 제가 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상황 자체가.”
“…그렇군요.”
“모든 게 완벽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또 모든 게 다 완벽하기만 하면 그게 인생인가요, 어디.”
“난 향은 씨의 그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항상 부러워요.”
“전 그걸 좋게 봐 주시고 또 항상 지원해 주시는 부장님이 언제나 너무 고맙습니다.”
“피….”
“남편도 부장님께 고마워하고 있어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여러모로 제가 부담 안 느껴도 되게끔 조치를 해 주셨잖아요. 박 팀장 올려서 제 백업 만들어 주시고…. 정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도 회사 차원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인 거고…. 아무튼 알겠습니다.”
“한숨 쉬지 마세요. 그게 뭐 한숨 쉴 일인가요, 어디?”
“이 한숨이 상황이 답답해서 쉬는 한숨이 아니라, 그동안 제가 너무 고민이 없었던 거 같아서 쉬는 한숨이에요.”
“…?”
“애가 생겨서 너무 좋은데, 애가 생기기만 바라 왔지, 애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다… 하는 걸 전혀 생각을 안 했던 거 같아요.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 왔던 거에 비하면 너무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서 뭐랄까… 스스로 좀 한심해. 하하하… 나이는 얼굴로만 먹어온 거 같아요.”
“그러지 마세요. 이미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 자체가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 아닐까요? 그렇게 따지면 진짜 생각이 없는 쪽은 부장님이 아니라 저나 제 남편이죠. 저희는 그냥 어떻게든 다 될 거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좋은 일이잖아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건. 그래서 여전히 저흰 어떻게든 다 될 거란 생각만 하면서 매일매일 열심히만 살자… 이러고 있네요.”
“따지고 보면 그게 정답이다, 그죠?”
“음…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정답인지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가을이 짙어지고, 그렇게 추위가 찾아오면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홍성의 제2 황태자 민규는 안 차장 밑에서 노예보다 더한 대우를 받으며 꾸준한 담금질을 당했고, 결국 FW 시즌이 끝이 날 즈음 안 차장으로부터 하산을 허락받았다.
안 차장의 구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민규는 이제부터 자유를 만끽하나 기대를 했겠지만, 안 차장보다 더 까칠한 양 차장 밑에서 겨울보다 더 혹독한 팀장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민규의 얼굴에 다크 써클이 번지기 시작하고, 그 몰골이 점점 해골 모양으로 변해갈 즈음 양 차장은 드디어 그 특유의 노총각 히스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하아… 진짜 뭐지?”
“아, 왜?”
“바보죠?”
“뭐래?”
월요일 아침.
아침부터 양 차장이 안 차장으로부터 구박을 받고 있었다.
“뭔데 그래요?”
“아니, 부장님. 인간적으로 부장님이 결혼을 안 했다 치고, 썸타고 있는 여자가 있어요.”
“…?”
“그런데 그 여자도 마음이 있어, 부장님한테. 아니 부장님보다 그 여자가 먼저 부장님을 마음에 들어 했어. 그래서 이리저리 밀당 아닌 밀당을 몇 달째 계속 하고 있단 말이죠.”
“이미 몇 달째 그러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모지리죠.”
난 양 차장을 보며 농담을 던졌고, 양 차장은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며 딴청을 부렸다.
“아, 모지리인 건 기정사실인 거고. 아무튼 그런 상대한테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말하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려워도 해야죠. 진짜 마음이 있다면.”
“와, 나 진짜 살다 살다 양 차장님 같은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결국 양 차장이 혀를 차는 안 차장에게 물었다.
“아, 그래서 뭐라고 하면 되겠냐고. 디스는 그만하면 됐으니까 방법을 알려달라고.”
“아, 그냥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요.”
“뭘 좋아하는지를 몰라.”
“씨바, 진짜… 아, 그냥 차장님이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럼!”
“그건 너무 비매너 아닐까?”
“이렇게 사람 답답하게 만드는 게 더 비매너거든요?”
“좀 쌈박한 데이트 신청 방법 같은 거 없을까?”
“저 인간 저거는 평생 혼자 살아야 돼. 답답해서 내가 뛴다는 마음이 뭔지 이젠 확실히 알겠어. 그냥 앞으로 차장님이 비혼주의 하세요. 제가 연애하고 결혼까지 대신 다 해 줄라니까. 이럴 거면 뭐 하러 훈수를 두나? 내가 직접 하고 말지.”
“아, 그러지 말고 같이 고민 좀 해 줘. 뭘 좋아하는지 물어봐도, 항상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는 대답밖에 안 한단 말이야.”
“지친다, 지쳐, 진짜… 아니,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였어요?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사랑한다, 안 차장.”
“후우… 그냥 이렇게 물어봐요. 오늘 제가 어디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물어볼 거 같아요?”
“…?”
“그럼 혼자 막 여기저기 떠올려 보겠지. 그러다 어디로 데리고 갈 거 같다고 대답을 하겠지. 바로 거기가 로즈마리 여사가 차장님이랑 오늘 같이 저녁을 먹고 싶은 곳이에요. 거기로 데리고 가세요.”
“오… 천잰데?”
“차장님이 바본데?”
그렇게 양 차장은 주위 모든 사람들의 진을 빼가며 서서히 정상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양 차장과 로즈마리의 연애가 조금씩 진전을 보일수록 양 차장의 눈엔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였고, 그렇게 그의 히스테리가 사라져갈 즈음 민규는 방심을 하고 있었다.
안 차장의 밑에서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하며 버틴 끝에 드디어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양 차장 밑에서 조금은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전 대리님, 나 좀 봐요.”
“네, 선배님.”
“선배님이 아니라 정확하게 호칭을 불러 달라고요. 몇 번을 말해요, 제가. 여기 아름 씨, 재홍 씨, 한울 씨 빼고 전 대리 선배 아닌 사람이 어딨어요?”
“아, 죄송합니다, 이 대리님.”
“이거 뭐예요?”
“오전에 지시하셨던 발주 리스트입니다.”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요?”
“….”
“제가 분명 컨사인먼트 브랜드랑 크레딧 노트 신청 가능한 브랜드 구분해서 발주 리스트 뽑으라고 전달하지 않았나?”
“그렇게 했는데요?”
“지금 이게 구분이 돼요? 아니 이렇게 된 걸 볼 거였음 내가 뭐 하러 전 대리한테 부탁을 했겠어요? 누가 컨사인먼트 브랜드가 뭔지, 크레딧 노트 신청 가능한 브랜드가 뭔지 몰라서 구분을 해 놓으라고 했겠냐고요. 알지만, 최종 발주 넣을 사람이 실수를 안 해도 되게끔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한 거 아니겠냐고. 이거, 이거… 이렇게 해놓으면 최종 발주 넣을 사람이 다시 또 일일이 체크해 가면서 발주 넣어야 하는데, 도대체 일을 왜 이렇게 해요?”
“…죄송합니다.”
“일 대충대충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전 대리는 진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
“왜요? 제 말이 너무 지나친 거 같아요?”
“아, 아닙니다.”
“나도 전 대리한테 이런 싫은 소리 하는 거 불편해요. 어차피 내년이면 팀장 달 거잖아요. 내년이면 보고를 받는 게 아니라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대한테 이렇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제 입장도 좀 생각을 해 달라고요.”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랬다.
비록 양 차장은 두 눈에 하트가 들어차서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고 있었지만, 영업 기획부엔 언제부턴가 갑자기 부서 고춧가루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지혜가 있었다.
그럼에도 홍성의 제2 황태자 민규를 달달 볶는 이지혜를 불안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이지혜는 비록 같은 직급이지만 실력으로 모든 면에서 민규를 압도하고 있었고, 이지혜의 싫은 소리엔 트집이 잡힐 만한 건덕지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인터라켄 홍성 타워의 디테일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고, 1층 출입문 쪽의 시큐리티 가드가 완료된 이후부터 신 사장은 주 단위로 공사 현황을 보고하듯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임신 14주 차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강혜선과 함께 초음파 사진을 찍겠다고 병원에 들렀던 날이었다.
“….”
“…?”
이전과는 달리 강혜선의 배에 젤을 바르고 초음파 기계를 문지르기 시작하던 의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흐음….”
알 수 없는 불안감.
“음….”
검사를 위해 젤을 발랐던 강혜선의 배를 티슈로 닦아 주며 의사가 말했다.
“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뭐가요?”
“보여야 할 게 안 보이네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만큼 의사의 표정은 무거웠다.
“그게 무슨….”
“뇌량이라고 해서 우측 뇌와 좌측 뇌 사이에 고리 같은 게 잡혀야 됩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잘 안 보이네요.”
“…!”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늦게 나오는 애들도 많습니다.”
“그게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뇌량무형성 증후군이라고 해서… 아닙니다. 일단 좀 더 지켜보고 2주 뒤에 재차 확인을 했는데도 발견이 안 되면…. 그때 대학병원 같은 데 가서 정밀 검사를 해보는 거로 하죠.”
“…!”
“아이, 괜찮을 겁니다. 종종 있는 일입니다. 늦게 나오는 애들도 많아요.”
의사가 아무리 안심을 시켜도 아무런 경험이 없었던 나와 강혜선 입장에선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극심한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뇌량이 안 보인다고요?”
“혹시 그게 뭔지 아십니까?”
회사에서 김 차장에게 혹시 몰라 물어봤다.
그러자 세 아이의 아버지인 김 차장은 너무나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
“만약에…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 만약에 진짜 뇌량이 안 나와서 뇌량무형성 증후군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네?”
“그럼 그 애 포기할 겁니까?”
“무슨 그런….”
“그런데 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그런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부모 될 사람들이 중심을 딱 잘 잡고 그 애를 어떻게 잘 키울지를 생각해야지…. 그래야 정상 아니냔 말이죠.”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저희 둘째 놈은 딸인 줄 알고 있었는데, 8개월짼가? 아무튼 딸이라서 완전 좋아하고 있었는데 출산하기 바로 몇 달 전에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아무리 의료 기술이 많이 발전을 했다고 해도 아직 카메라가 못 잡는 게 많습니다.”
“….”
“그리고 옛날 생각 해 보세요. 초음파 검사 같은 게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런 거 검사 안 했다 생각하고 있으세요.”
“좀 안심이 되네요, 차장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까.”
“진짜 별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아이고… 저는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셋이나 낳아서 키우고 계십니까? 모를 땐 몰랐는데, 막상 애가 생기고 또 그 애한테 문제가 생기니까 진짜 회사 일에 집중을 못 하겠네요.”
“하하하… 이제 시작입니다, 부장님. 배 속에 있을 땐 고마운 거죠. 낳아 보세요. 낳아서 기기 시작하고 걷기 시작하면…. 아이고…. 그땐 진짜 살이 절로 빠집니다.”
“…대단하십니다.”
“…?”
진심이었다.
난 그냥 낳기만 하면 부모가 되는 건 줄 알았으니까.
세 아이의 아버지.
거기다 와이프는 그 세 아이를 키우느라 함께 맞벌이도 못 해준다.
만년 팀장의 딱지를 그렇게 오래 달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있어야 했던 김 차장.
그리고 결국 차장이 되었지만, 첫째 아이 치아 교정 때문에 목돈이 들어가서 둘째 학원비를 걱정하고 있다.
다들 각자의 사연과 사정이 있지만, 우린 그 사연과 사정은 각자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 말하며, 그렇게 경쟁 구조를 너무나 당연하게 인정하고 그 속에서 뒤처지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기 위해 악해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2주 뒤, 정말 김 차장의 말처럼 로또에게 뇌량이 생겼다.
난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던데, 의사는 너무나 다행이라며, 비록 깨알만 한 크기이지만, 일단 뇌량이 자리를 잡았으니 크기가 커지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또는 너무나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고 덧붙여줬다.
“이사 계약…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응, 말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다 맞춰 준다고 했잖아. 어느 선까지 생각하고 있어?”
“제 연봉이 아니라….”
“…?”
“저희 영업부 조직도 말인데요. 저 올라가고 나면 누굴 부장으로 앉히실 생각이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영업 이사가 조율해야 할 일 아냐?”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현재 1부장 3차장 체제에서… 3부장 체제로 변화를 좀 주면 어떨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