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럼 말을 하지 이 사람아. 기태 데리고 저녁 먹는 거 꼭 오늘 아니었어도 되는 건데….”
“그러니까.”
강혜선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꼭 오늘 아니어도 되는 건데, 며칠이나 출장 때문에 집을 비운 사람이 굳이 또 출장 다녀오자마자 술을 마셔?”
무조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맞는 거 같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난 입을 꼬옥 다물었고, 강혜선은 그런 날 향해 한참 동안 눈을 흘기다가 다시 자리에 누워 등을 돌렸다.
“저녁은? 그래서 저녁은 뭐 먹었는데?”
“아침에 먹다 남은 식은 밥에 콩나물이랑 쉰 김치 넣고 고추장, 참기름에 비벼 먹었어.”
또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마치 내게 미안해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계란 후라이라도 하나 넣고 비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지금 나가서 사 가지고 올게.”
“아, 됐어. 피곤해.”
“장모님한테는 말씀드렸어? 뭐라셔? 좋아하시지?”
“당신한테 제일 먼저 말해 줄 거라고 며칠 동안 입 꼭 다물고 있었거든요?”
“아… 그랬구나. 그럼 지금이라도 연락드려.”
그러자 강혜선은 다시 확! 하고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그리고 또 한참 동안 말없이 날 쳐다보기만 했다.
“….”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걸까?
난 도무지 저 화의 핀트를 찾지 못할 거 같았다.
이럴 땐 그냥 무조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뭐가?”
“….”
“통닭 시켜 줘.”
“…어?”
“나 치킨 먹고 싶어.”
“아!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뭘로 시킬까? 순살? 반반?”
그제야 강혜선은 화가 풀린 듯 주먹으로 날 때리는 시늉을 했고, 난 애써 겁을 먹은 듯 크게 놀란 척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침대에서 내려오며 강혜선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잘근 묶었다.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거실로 나갔다.
“내가 진짜 보살이다, 보살이야. 좀 두고두고 바가지 긁을까 하다가 몇 날 며칠 일하느라 고생하며 돌아다녔을 거 생각하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더는 못 하겠다.”
“뭐 해? 하지 마,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나 시켜. 내가 할게.”
“통닭이나 시켜. 시켜 놓고 배달 올 동안 씻어.”
“놔둬. 내가 할게.”
강혜선은 내가 출장 때 들고 갔던 슈트 케이스를 소파 위로 올려놓고 그걸 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놔두라니까. 거 참 말 안 듣네….”
“아, 통닭만 시켜 놓고 얼른 들어가서 씻고 나오라고! 담배 찌든 내 딱 맡기 싫어.”
“넵!”
임신을 한 몸으로 저렇게 쪼그리고 앉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평소였다면 신경도 안 썼을 부분인데,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소파 앞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아서 지난 출장 동안 내가 사용했던 짐들을 정리하는 강혜선의 모습이 무척 불편해 보였다.
평소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 왔던 보살핌과 사랑이라 크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야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이고 또 고마운 마음들이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
강혜선이 먹고 싶다고 하는 치킨을 주문해 놓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그동안 상상만 해 봤었다.
아이가 생기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상상.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길길이 좋아 날뛸 줄 알았었다.
하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물론 감사하고 또 기쁜 마음이 컸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어다닐 만큼 흥분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행복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함에 더 자중하고 겸손하게 이 행복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든 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새치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언제나 대학 새내기 시절 그대로인데 피부 탄력은 누가 봐도 아저씨였고.
그런데 참… 내 입으로 이런 말 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성실하게 잘 늙어가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에서 항상 성실하셨고, 또 가정을 위해 헌신하셨던 내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 얼굴이 웃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리며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후우….”
진짜 이젠 나이가 나이니만큼 호르몬 조절이 잘 안 되는 걸까?
갑자기 왜 이렇게 벅차오르지?
갑자기 여기서 왜 내 아버지의 지난 세월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내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을 시절, 이제 막 기억이라는 걸 가지기 시작한 막내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학교 앞 문방구에서 2개에 100원씩 하던 떡볶이를 사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거울에 담긴 내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식탁 위로 케이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강혜선은 치킨만 배달이 되어 오면 바로 먹자며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케이크 하나와 잔 두 개.
난 강혜선 옆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의 배를 한번 슥슥 만져 보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우얀 일이고?
“엄마, 아버지 좀 바꿔 주세요.”
-아버지는 와?
“그냥 좀 바꿔 주세요.”
-알았다. 있어 봐라.
그리고 잠시 후 귀가 잘 안 들리시는 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버지.”
-…
“아버지!”
-어, 그래! 은태가?
“뭐 하고 계세요?”
-어?
“뭐.하.고.계.시.냐.고!”
-어, 그래 아빠 잘 있다. 느그는? 느그는 별일 없제?
“하아… 아버지!”
-어, 와?
“집사람 아기 가졌어요!”
참 신기하지….
정말 거짓말처럼 다른 대화는 다 한 번에 못 알아들으셨던 아버지가 집사람이 아기를 가졌다는 말은 한 번에 정확하게 알아들으셨다.
-진짜가!
“네, 아버지!”
-아이고, 잘됐다. 참말로 잘됐다. 하하하….
“집사람 바꿔 줄까요?”
-어, 그래그래. 엄마 바꿔 줄게. 잠깐만 있어 봐라.
“아니, 엄마 바꾸라는 말이 아니라 집사람 바꿔 드리….”
-어, 그래 엄마다. 뭔 소리고 이게. 혜선이 임신했나?
유독 아쉬움이 많이 남는 통화였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고 싶었다.
아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부모님과의 통화가 다 끝이 날 즈음 주문한 치킨이 배달되어 왔고, 내가 그걸 받아서 식탁 위로 펼치는 동안 강혜선은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냈다.
“뭐… 하는 거야?”
“뭐가?”
“당신도 마시게?
강혜선은 당연한 거 아니냐며 정색을 했다.
“마셔도 돼?”
“우리 엄마는 나 임신하고 8주 차 때 임신 사실 아셨대. 그 사실 알기 전날까지 아빠랑 같이 막걸리 드셨고.”
“그래도….”
“마지막 한 잔이야. 기분은 뭐 당신 혼자 내? 앞으로 애 낳고 모유 수유 끝날 때까지 술은 입에도 못 댈 건데, 이런 날 축하도 할 겸 한 잔 정도 해줘야 미련이 안 남을 거 아냐.”
“….”
“아이고, 그렇게 걱정이 많은 양반이 그놈에 지긋지긋한 담배는 왜 아직 못 끊고 있을까? 괜찮아. 난 딱 한 잔만 마실 거야. 나머지는 당신이 다 마셔.”
그렇게 그날 밤 나와 강혜선은 치킨에 맥주를 마셨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이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 하면 바른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지, 그러기 위해선 부모가 될 우린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이의 태명을 그 자리에서 지어 버렸다.
로또.
난 아이의 태명을 로또라고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강혜선은 처음엔 인상을 찌푸리며 장난을 하느냐고 물었고, 그런 강혜선에게 난 진지하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게 내겐 로또라고.
당신을 만나 이런 아기자기한 가정을 꾸리게 된 것 자체가 내겐 로또고, 지난 몇 년간 속으로는 간절히 바랐지만, 그 간절함을 서로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로 겉으로 내색하지 못했던 우리의 아이가 드디어 생겼는데, 이것보다 더 큰 로또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냐고.
“흐음… 그건 또 그렇네.”
“지금까지 우리 해왔던 대로….”
“…?”
“로또가 생겼다고 괜히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로또가 생긴 거 자체에만 감사하며… 로또한테 너무 많은 기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우리 살아가자, 앞으로도.”
강혜선은 지금껏 내게 보여줬던 미소 중 단연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난 그 잔에 나의 잔을 갖다 대며…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며, 참 수고 많았고,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이 설레기 시작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일까, 아님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어제와 다를 게 전혀 없는 아침이었는데, 내게는 모든 게 다 새롭고 애착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장님.”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왜 이렇게 아침부터 파이팅이 넘치십니까?”
“안 차장님만 보면 저도 모르게 힘이 나네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하하하….”
“흐음… 수상한데….”
“저기, 박 팀장.”
“네, 부장님.”
“재무 리스크팀 승인 떨어졌어요?”
“네, 출근하자마자 확인했고, 프린트해서 부장님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굿!”
책상 위로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박기태가 정리해서 올려놓은 승인 서류를 확인했다.
그리고 서류 가방에서 아이패드만 꺼내놓고 박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근하셨습니까?”
-어, 지금 엘리베이터 안이야.
“준비 다 끝났습니다.”
-그럼 바로 내 사무실로 올라와. 사장님 출근하실 때까지 내 방에서 같이 커피나 한잔하지.
“네, 알겠습니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양 차장과 안 차장에게는 오전 미팅은 사장실을 다녀온 뒤 하자고 말해 놓고 곧바로 임원 층으로 올라갔다.
“….”
박 이사의 사무실로 가는 도중 마주친 상무님.
통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난 상무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상무님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상무님 방을 지나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기분이 상쾌했다.
“일단 어제 사장님께 대충은 보고를 드렸어, 내가.”
박 이사는 전날 내게 보고받은 내용을 사장님께 넌지시 흘렸다며, 사장님의 반응을 말해 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웃으시더라.”
“웃으셨다면….”
“이제 진짜 공 부장 이사 명함 하나 파줘야 할 때가 된 거 같다고 하시면서….”
“….”
“아직 장고 재는 거 덜 끝났어?”
“장고 잰 적 없습니다.”
“대충 흘려 봐, 나한테 먼저. 생각하고 있는 조건 같은 거 있음 괜히 나 뒤통수 때리지 말고 나랑 먼저 조율을 해 보자고.”
“그 전에….”
“그 전에 뭐?”
“CGM 이 친구들 먼저 정리를 좀 해놓고 고민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CGM, 그리고 김형찬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감정적일 필요는 없어. 뭐 하러 그래?”
“제가 그쪽을 상대로 감정적일 이유는 없죠, 개인적으로. 다만 너무 절제하고 또 절제해서 이성적으로만 대해 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계속 나름 젠틀하게, 이성적으로 상대를 해주니까 이것들이 수시로 툭툭 하고 찌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쪽 입장에선 자기네 홈그라운드를 치고 들어오는 우릴 젠틀하다고 볼 수는 없는 거겠지.”
“그런 이중성이 전 너무 밉상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자기들은요? 한국 시장 한번 먹어 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작전을 펼쳤던 건 그쪽이 먼저죠. 자기들은 해도 되고, 남은 안 된다? 일단 저는 그런 사고방식이 너무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이번엔 반드시 본때를 한번 보여줘야 할 거 같습니다.”
“흐흐흐하하하…. 김형찬이 그 친구 진짜 이번에 상대를 잘못 잡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