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그래, 진짜다!
“아마 오늘도 좀 늦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하지?”
-얼마나? 얼마나 늦는데?
“최대한 일찍 들어갈 수 있도록 해볼게.”
-아, 그래서 언제 오냐고.
“….”
-설마 오늘도 회식이야?
“으으음… 회식이 아니라…. 그… 기태 씨 있잖아? 그 친구 데리고 가서 저녁에 밥이나 한 끼 사 주려고.”
-그 사람이랑 같이 출장 갔던 거 아니었어?
“…맞아.”
-그래서 결국은 또 술 마시겠단 말 아니야?
이상하게 오늘따라 강력한 태클을 걸어오는 강혜선이었다.
-며칠 동안 같이 붙어서 출장 다녀와 놓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또 저녁에 밥을 같이 먹겠다는 거야?
“출장은 출장이고… 출장 가 있는 동안 미처 못 했던 이야기가 좀 남아 있어서 그래.”
-아주 그냥 일이랑 결혼을 했지? 회사가 집이고, 집이 회사야, 그지?
“뭔 또 그런 소릴 해?”
-아, 몰라. 알아서 해.
“최대한 빨리 끝내….”
뚝.
뚜. 뚜. 뚜….
난 그때까지만 해도 강혜선이 왜 좀처럼 하지 않던 바가지를 긁는 건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그저 자기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작 이 정도도 이해를 못 해 주나 싶었고,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주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까 그동안 내가 너무 밖으로만 나돌았나 싶은 마음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이미 박기태와는 저녁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폴앤크루 측과의 투자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내 놓고 복귀한 홍성 본사.
난 사장님께 올릴 보고를 제외하고 지난 며칠간 있었던 스위스 출장에 대한 마무리를 모두 박기태와 함께 정리했다.
박 이사의 사무실을 찾아가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에 나온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박기태를 데리고 갔고, 그 건으로 프로젝트 제안서를 직접 만들 때에도 박기태를 내 옆자리에 앉혀 놓고 하나하나 가르쳐 가며 함께 만들었다.
그리고 재무 리스크팀에게 프로젝트 진행 승인 요청을 할 때에도 박기태를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높은 확률로 승인을 받아낼 수 있는지 노하우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네.”
“눈치 보고 들어가면 안 돼요. 우린 재무 리스크팀의 승인을 받아내는 게 목적인 게 아니라 그 승인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게 목적인 사람들인 거고, 재무 리스크팀은 어떻게든 우리 영업이 진행해 보겠다고 하는 프로젝트의 허점을 찾아서 태클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어차피 프로젝트의 가능성은 여기 이 제안서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이 제안서가 마무리가 됐고, 더 추가 수정할 내용이 없다면 우린 주사위를 던진 거나 마찬가지, 뒤돌아볼 이유가 없잖아.”
“네.”
“당당하게 들어가요. 그리고 이런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검토를 좀 해주십시오… 하는 식으로 저자세로 나가면 안 돼. 이런 프로젝트가 있어서 진행을 한번 해볼까 하는데 빨리 확인 좀 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압박을 하면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아….”
“그 뉘앙스의 차이를 알겠어요?”
”네, 어떤 건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은 대충만 알면 돼. 한두 번 하다 보면 바로 감을 잡을 거예요. 재무 리스크팀은 우리 영업이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재무 관련 시선으로 다시 살펴보는 부서이지, 결코 우리 영업부의 상위 부서가 아니란 말이죠. 프로젝트 자체의 가치를 평가해 주는 부서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재무 관련 리스크만 잡아 주는 부서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박 팀장이 단독 프로젝트 차고 나가게 돼서 재무 리스크팀의 승인을 받아야 할 때가 오면 긴장하지 말고 당당하게 찾아와서 승인 스탬프 찍어 달라고 하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승인이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내가 말했죠,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난 고개를 갸웃거리는 박기태의 등을 떠밀며 재무 리스크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부장님. 직접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재무 리스크팀의 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난 그런 하 팀장에게 사무실 문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업무의 특성상 부장 포지션 중 유일하게 단독 사무실을 사용하는 재무부장.
임원들처럼 별개의 독립된 공간을 개인 사무실로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재무부장은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재무부와 재무 리스크팀 중간에 단독 파티션을 치고 홀로 업무를 본다.
“재무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자리에 안 계시네?”
“아, 시티 쪽 은행장이 바뀌었답니다. 재무 이사님 모시고 거기서 초대한 다과회에 가셨어요.”
“번거롭게 다과회는 무슨….”
“그런데 어쩐 일로….”
“아, 이거 나 내일 사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내용인데, 그 전에 리스크 관련 컨펌을 좀 받아야 해서요.”
난 몰래 박기태에게 윙크하며 가지고 온 사업 제안서를 하 팀장에게 건넸다.
“급한 건가요?”
“안 급한 사업이 어딨겠습니까, 다 급하지. 근데 이거 내일 오전 중에 보고를 드려야 하는 거라서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통과 스탬프를 받았음 싶은데….”
“그럼 일단 부장님 오시면 바로 결재받고 제가 PDF 파일로 만들어서 메신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저야 고맙죠.”
“근데 무슨 건입니까, 이번엔?”
“똑같아요, 일전에 요청했던 승인 건이랑. 스위스 쪽 관련 프로젝트인데, 이번엔 저기 폴앤크루랑 쁘띠토널 투자 조금씩 섞어서 자체 건물 매입을 한번 해 볼까 해서요.”
“살살 좀 하십시오, 부장님. 저희쪽 금고 탈탈 털어 가시려고 아예 작정을 하신 거 같습니다?”
“물건이 너무 좋아요. 거기 서류 보면 저번 인터라켄 홍성 타워 건 때 첨부했던 신 사장 쪽 재무제표는 그대로일 거예요. 폴앤크루야 뭐 아직 전년 대비 재무제표가 안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누락을 시킬 수밖에 없었고, 쁘띠토널은 최대한 신경 써서 자료 첨부했으니까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봐 주시면 될 거 같아요.”
“네, 놔두시고 가십시오, 제가 정리해서 부장님 오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참, 아참….”
“…?”
“인사해요. 서로 오다가다 얼굴 정도는 봐서 알 거 아냐. 여기 우리 해외 영업부 박 팀장.”
“잘 알죠, 기태 씨… 같이 담배 나눠 피운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아, 그래요? 이번에 팀장 승진했잖아요.”
“그거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내가 따로 설명 안 해 줘도 되겠네. 우리 영업부 유망주. 앞으로 잘 좀 부탁합니다.”
“넵!”
박기태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기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몰라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재무 리스크팀 사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벌써 끝난 겁니까?”
박기태가 물었다.
“네.”
“이게 설마 하루 만에 통과가 되는 겁니까?”
“더 디테일하게 준비한 제안서도 일주일, 이 주일, 거기에 반려, 보류 판정까지 나와 버리면 길게는 한 달 이상씩 걸리기도 하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몇 장 되지도 않는 제안서…. 그거 아무리 디테일하게 검토를 한다고 해도 딱 각 잡고 자리에 앉아서 집중해서 보면 한 시간이면 충분해. 첨부 내용이 아무리 많은 프로젝트라도 몇 명이 동시에 붙어서 검토하면 반나절이면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통과 도장 하나 찍어주는 데 뭐 1분이 걸리겠어, 2분이 걸리겠어? 결국은 신뢰죠. 이 사람이 가지고 오는 프로젝트는 큰 실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하는 신뢰. 그리고 그 신뢰는 발품이 만들어 주는 겁니다.”
“발품….”
“얼마나 이 재무 리스크팀 사무실을 뻔질나게 자주 들락거리느냐…. 그래서 재무 리스크팀 사람들이랑 안면을 빨리 트고 가까워지느냐가 관건 아닐까요? 한 매장의 매출이 잘 안 오릅니다. 브랜드 자체의 문제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매장의 매출은 다 괜찮게 유지가 되는데, 같은 브랜드임에도 유독 한 매장만 매출이 아쉽습니다. 그럴 때 우리 본사 영업부에서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문제점을 파악해야죠.”
“과연 현장에선 그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요?”
“….”
“매장의 문제점은 우리 본사 영업부보다 현장에 있는 매장 직원들 실장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점을 지적하는 건 쉽죠. 그건 누구라도 다 합니다. 하지만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있습니다. 바로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 주고, 그래서 함께 애를 써 주는 거죠. 매장 매출이 저조할 땐 매출을 가지고 현장 직원들을 달달 볶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주 찾아가서 얼굴을 보여주면 됩니다.”
“…!”
“회사 경비로 커피를 사서 방문을 하고, 또 매장 직원들의 생일이나 개인적인 기념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적은 금액이라도 해당 유통 판의 상품권을 선물로 전달하는 것도 작은 성의로 큰 감동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될 수가 있죠. 그리고 그 감동은 결국 상대의 입장에선 부담과 책임감을 만들어내게 할 겁니다. 재무 리스크팀… 우리 영업부 입장에선 현장 매장 못지않게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부서라는 거 잊지 마세요. 재무 리스크팀의 승인 스탬프 없이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난 박기태를 데리고 울산 식육점으로 갔다.
“이 집 사장님은 나한테 무조건 스페셜 디스카운트를 해 줘야 돼. 나랑 장 대표님이 단골로 만들어 준 사람만 도대체 몇 명인지 모르겠네. 하하하….”
“이 집 유명하죠, 우리 영업부 직원들 사이에선.”
“그러니까. 이젠 여기 오는 게 살짝 겁나기도 해요.”
“왜요?”
“왔는데, 혹시라도 아는 얼굴 만나면 그냥 내가 먹은 것만 딱 계산하고 나갈 수 있나요, 어디. 같이 계산해 주고 나가야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지갑을 열어야 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더라고. 그러고 보면 진짜 어쩌다 벌써 내가 이 나이까지 먹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내 소리 들으면서 상사들 비위만 조금 맞춰 주면 지갑을 안 열어도 되는 나이였는데, 이젠 어딜 가나 입은 닫고 지갑만 열어야 좋은 사람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어 가고 있어요.”
박기태는 피식하고 웃으며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안 그래도 나랑 같이 며칠간 출장 일정 쳐낸다고 피곤할 텐데, 쉬고 싶은 사람 잡아 놓고 눈치도 없이 같이 저녁까지 먹자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아니라고 해야지, 뭐라고 할 거야. 그죠? 그러고 보면 이런 말 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아니라니까요? 진짜 저는 부장님이랑 이런 자리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습니다.”
“진심이에요.”
“네.”
“나도 그랬어요.”
“…?”
“나도 박 팀장처럼 그랬던 거 같애.”
난 나의 지난 홍성 생활을 회상하며 술잔을 비웠고, 날 따라 급하게 자신의 잔을 비우는 박기태를 보며 이모님께 소주 두 병을 새로 주문했다.
“우리 서로 따라 주지 말고 자작합시다. 편하게 마시고 싶어요, 오늘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집이 부산이잖아요.”
“네.”
“서울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
“그래서 나한텐 회사 사람들이 친구고, 형이고, 동생이고 그랬던 거 같아.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선배들이 마치고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하면 그걸 툴툴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지금도 그럴 거라고 봐요. 그런데 정말 특별히 피곤하거나 따로 선약이 있을 때가 아니면 대체로 이런 자리가 좋았어요. 그냥 겉으로만 상사들 비위 맞춰 주겠다고 좋은 척했던 게 아니라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어차피 혼자 있는 거 외로우니까 누구라도 같이 한잔하자고 술자리를 마련하면 그게 그렇게 반갑더라고. 이런 자리 자주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회사의 시크릿도 종종 듣게 되고, 또 사람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더라고. 뭐가 맞고, 뭐가 틀리다… 그런 걸 말하자는 게 아니라… 그만큼 나한테 지난 세월 홍성은 특별한 공간이었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일터였고, 쉼터였고, 또 삶터였던 거 같아.”
“….”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내가 박 팀장을 대리에서 팀장으로 승진시키자고 했던 날, 안 차장님이 나한테 그랬어요. 박 팀장이 드디어 부장님한테 인정이라는 걸 받네요… 하고.”
“….”
“난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 난 단 한 번도 박 팀장을 인정하지 않았던 적이 없거든. 그런데 안 차장님 말을 들어 보니까 내가 그동안 나도 모르게 박 팀장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거 같더라고.”
“아닙니다. 그러신 적 없습니다.”
“내가 그동안 지혜 씨만 너무 챙겼죠?”
“…!”
“그럴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요. 그냥 지혜 씨는 뭐랄까….”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
“그래요. 알고 있다니까 긴말 안 할게요. 내가 이 이야기를 스위스 출장 동안 기회를 만들어서 해 줄까 하다가 남자들끼리 술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좀 뭣하잖아.”
“푸흡….”
“그렇다고 신 사장님, 최 실장 다 있는 앞에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도 빡빡한 일정인데 따로 시간을 내서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같고 해서 그냥 한국 들어오면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해줘야겠다… 싶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선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그냥 지혜가 부러웠던 거예요. 그 부러움을 예전엔 저도 모르게 안 차장님과 술을 마시면서 술김에 이야기를 했던 거고…. 지혜. 일 잘하죠. 제가 부장님이었어도 지혜 같은 부하 직원이 있으면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었을 겁니다.”
“안 차장님한테 그 이야기를 딱 듣는 순간, 그때 내가 퇴사를 하겠다고 사직서 들고 임원 층 올라갔을 때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박 팀장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예요.”
“….”
“아… 이 친구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었구나… 그 마음을 몰랐던 거에 대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요.”
“….”
“좋은 팀장이 되어 주세요, 박 팀장.”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최선을 다하란 말이 아니에요. 그걸 왜 해?”
“네?”
“최선을 다하란 말이 아니라 좋은 팀장이 되어 달라고.”
“그게 무슨….”
“왜 최선을 다하나? 팀장이 뭐라고. 최선을 다하는 건 사장이 할 일이고, 박 팀장은 앞으로 그냥 좋은 팀장만 되어 주면 되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기 위해선… 그만큼 회사 일에 자신을 갈아 넣어야 되잖아요. 갈아 넣는다…. 결국 자기 스스로 자기 착취를 하겠다는 건데, 그 착취의 결과물은 누구 몫이지? 결국 회사가 다 가져가는 거 아니냐고.”
“….”
“자기 착취에 익숙한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까지 착취해요. 그래선 절대 좋은 팀장이 될 수가 없어. 롱런합시다. 오래가야지, 뭐 한다고 불사르나?”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뭐가요?”
“부장님처럼 되려면….”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나도 정확한 답은 모르고 있었기에….
“글쎄요… 그냥 난 그렇게 해왔던 거 같아요.”
“….”
“처음 팀장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적으로 좋은 일들이 몇 번 연거푸 찾아왔어요. 금전적인 운도 크게 한 번 들어왔고….”
“….”
“그런데 그 금전적인 운이 제 인생을 한 번에 확 바꿔 주지는 못하더라고요. 나한텐 그걸 기회로 삼고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 볼 용기가 없었어. 그리고 지금까지 해 온 게 아깝기도 했고… 대신 여유가 생기니까 똑같은 상황 앞에서도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거예요. 똑같이 열심히 회사 일을 해도 그 전까지는 회사 일에 제 삶을 갈아 넣는, 말 그대로 내 에너지를 회사에 착취당한다는 기분으로 해 왔다면, 여유가 생긴 이후로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재밌게 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게 할까…. 그렇게 일에 재미가 붙어 갔던 거 같아요.”
“….”
“나도 몰라. 나도 어쩌다 내가 업계 최연소 부장을 달고 있고, 또 업계 최고 대우를 받으면서 일을 하게 된 건지. 다시 팀장으로 돌아가서 똑같이 해 보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거예요. 확실히 지난 몇 년간 난 운도 따랐고, 타이밍도 좋았어. 그런데 지금까지 홍성에서 내가 만들어낸 성과만큼 다시 올릴 자신은 없는데, 지금 내가 느끼는 만족감은 다시 팀장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 거 같긴 해요. 별거 없어요, 부장을 달아도. 아마 임원 승진해서 이사를 달아도 지금 내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걸? 이젠 안 해 봐도 대충 알겠어. 그러니까 박 팀장. 박 팀장이 데리고 있는 팀원들이랑 같이 즐기면서 해요. 본인 착취, 부하 직원들 착취 해 가면서 회사 좋은 일만 시켜 주지 말고, 회사를 배경으로 본인 좋은 일, 부하 직원들 좋은 일 위주로 하라고. 그럼…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우리 홍성은 그게 가능한 회사잖아, 기태 씨도 알다시피.”
퇴근 후에 박기태를 데리고 저녁을 먹고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강혜선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그래서 식사 자리를 더 길게 가져가지는 못했다.
딱 소주 세 병을 사이좋게 나눠 마시고, 난 다음 날 출근을 핑계로 박기태와 헤어졌고, 택시를 잡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이제 고작 9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집 안은 캄캄했다.
보통 내가 늦게 들어가면 강혜선은 아무리 피곤해서 먼저 잠을 자더라도 거실의 불은 켜놓고 잔다.
그런데 오늘은 거실의 불까지 다 꺼 놓고, 거기다 마치 늦게 들어오는 날 상대로 시위를 하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다 끌어 올려 놓고 자고 있었다.
“자?”
“….”
강혜선은 대답이 없었다.
왜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나.
분명 자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일부러 대답을 안 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데 또 술 한잔 먹고 들어와서 귀찮게 굴면 술주정 부린다고 할까 봐 더 말을 걸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난 최대한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
마치 날 보라고 일부러 거기에 올려둔 것처럼 임신 테스트기가 세면대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 테스트기엔 빨간 줄 두 개가 선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난 그 테스트기를 들고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 불을 켜고 강혜선을 흔들어 깨웠다.
“이거 뭐야? 아, 좀 일어나 봐. 이거 뭐냐고. 이거 진짜야?”
“아, 불 꺼!”
“이거 진짜야? 진짜지?”
“그래, 진짜다! 내가 씨… 당신 출장 복귀하면 서프라이즈 해 줄 거라고 일부러 며칠 동안 입 근질거리는 거 참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뭐야,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