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김형찬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이건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라 100퍼센트라는 확신이 섰다.
-혹시 부장님도 아는 사람입니까?
“알죠. 잘 알죠. 그 인간 덕분에 나크리스 브랜드 무너질 뻔하기도 했고, 그걸 또 저희 홍성이 어거지로 중국 시장에 가지고 들어가서 회복시켜 주기도 했으니까요.”
-….
“상당히 무례한 인간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 제 생각에 에스컬레이터 업체 쪽으로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공사 진행을 무기한 딜레이시키는 게 맞는 거 같은데요.
“보통 그런 공사 보류 판정이 떨어지면 뒤집을 수는 없는 겁니까?”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처음 저희 건물을 호텔에서 상용 건물로 용도 변경을 할 때에도 공사 보류 판정이 한 번 떨어졌었죠. 그쪽에서 요구하는 요건들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근데 문제는 공사 보류 판정이 신청서를 제출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게 왜 문제죠?”
-스위스 애들이 그렇게 일을 빨리빨리 처리해 주는 애들이 아니에요. 보통 신청서를 넣으면 몇 차례 직접 와서 확인을 하고 이것저것 따진 다음에 허가 관련 답변은 최소 한 달 이상은 지나야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신청서 넣고 며칠 되지도 않아서 사람이 왔더라고요? 그런데 와서 건물 내부를 살펴볼 땐 별말이 없었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넣어도 된다는 식으로 좋은 뉘앙스만 주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별문제 없을 거라고 에스컬레이터 업체 측이랑 진행을 했던 거고.
“그런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보류 판정이 떨어졌다?”
-인터라켄이 베른주입니다. 자체 게마인드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 공사에 관한 허가 건은 인터라켄 게마인드에서 베른주 본청 게마인드로 넘어가서 거기 도장이 찍혀야 돼요. 근데 그게 일주일 만에 처리가 됐다는 것도 일차적으로 의심스럽고, 더군다나 보류 판정이 나왔다고 하니까 제 입장에선 옐로 폭스 측에서 압력을 넣은 게 아닐까란 의심이 드는 거죠.
“의심이 아니라 그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폭스타운이 그렇게 막강한 기업입니까, 스위스 안에서?”
-막강하다고 하기보다는 아무래도 관계가 긴밀하죠, 베른 주정부랑. 베른 시내부터 인터라켄, 거기에 툰, 슈피츠까지 옐로 폭스가 안 들어가 있는 곳은 없습니다. 거기다 베른에서 루가노 쪽 다이렉트 열차 노선도 따지고 보면 폭스타운 때문에 개통이 된 거나 다름이 없거든요. 그리고 유비에스 은행 쪽이랑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보니 영향력이 절대 작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의외네요. 한국에서도 그런 사업 공작은 없어진 지 오랜데, 선진국 중에서도 선진국인 줄 알았던 스위스에서 그런 압력이 먹힌다는 게 살짝 충격입니다.”
-제가… 여권만 스위스 여권을 취득했다 뿐이지 그들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이방인 아닙니까. 거기다 고용 형태 역시 스위스 자국인들 비례 아시아 스태프가 많고…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부당한 대우에는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제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익숙해져야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괜히 더 열받네요.”
-허허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화내면 손해입니다. 그냥 유연하게 생각하세요.
“하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부장님. 일단 공사 보류 판정이 떨어진 거 내년까지 공사 마무리 지으려면 지금 결정을 내려야 됩니다. 에스컬레이터 관련 허가는 지금 상황에선 아무리 짧게 봐도 최소 반년은 걸릴 문제인 거 같고, 그럴 거면 차라리 현재 있는 계단 허물지 말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질만 좀 고급스럽게 바꿔서 다른 공사랑 같이 진행을 해버리죠.
“사장님 건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브랜드만 보내드리는 프랜차이즈 형식의 매출만 기대하는 거고요. 제가 아니라 사장님이 아쉬워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별일 아닌 것처럼 오히려 절 설득하시면 제가 민망해지지 않습니까.”
-허허허… 어쩌겠습니까? 화를 낸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일단 에스컬레이터 업체랑 다른 미팅은 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그야 뭐…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그쪽이랑 이야기를 한번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쪽이라면….
“옐로 폭스 쪽이요.”
-에이… 그러지 마세요. 자기들이 뒤에서 공작을 했더라도 어디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겠습니까?
“아마 진짜 했다면 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겁니다.”
-…?
“우선 제가 정확한 배경을 좀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일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사장님이 괜찮다고 하시니, 에스컬레이터를 못 넣으면 사장님 말씀대로 공사를 변경하면 그만 아닙니까. 에스컬레이터 공사 제외하고 시큐리티 가드 관련 공사랑 객실 오픈하는 공사만 들어가면 공사 기간도 줄어들겠네요.”
-네, 맞아요. 좋게 생각합시다. 그럼 공사비도 대폭 줄어들 거고 말이죠. 하하하….
“어쩔 수 없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좋게 생각할 수만은 없네요. 이렇게 사장님을 건드린 건 저희 홍성을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죠. 이건 사업 매출을 떠나서 그동안 그쪽이랑 해왔던 자존심 싸움 때문에라도 같이 한 번은 물어뜯고 양보를 해야 하는 그림입니다.”
-어떻게….
“태생이 무례한 것들은 기회를 줘도 그대로고, 아무리 잘해줘도 변하지를 못하는 거 같습니다. 오히려 말로 잘 타이르기보다는 한 대 세게 쥐어박아 줘야…. 그런 원초적인 방법을 써야 무서워하는 거 같아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부류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원초적이니 무례할 수 있는 거기도 할거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신 사장과 통화를 끝내고 난 곧바로 이지혜를 불렀다.
“혹시 이 대리 예전에 쁘띠토널에 파견 근무 가 있었을 때 CGM 쪽에서 물건 좀 받자고 쁘띠토널 본사에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찾아왔죠, 그 인간이랑 같이. 김형찬….”
“그러니까. 그때 거기 CGM 마케팅 디렉턴가 하는 사람 앞에서 김형찬 그 인간 깠다고 하지 않았었나?”
“나름대로 있는 힘껏 깠습니다. 그 인간이 나크리스를 나올 때 어떻게 나왔으며, 그래서 나크리스랑 홍성 본사가 그 뒤처리를 하느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다 말해줬죠. 그리고 그런 인물이 있는 회사랑은 절대 같이 일을 못 한다고 저희 쪽 입장도 확실히 밝혔고.”
“나도 그렇게 들었어요. 법인장님이 그때 이 대리 칭찬을 엄청 하시더라고. 나도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있는데… 김형찬 그 인간이 여전히 CGM에 있네? 그때 그렇게 아웃됐던 거 아니었나?”
“거기까지는 저도 잘….”
“혹시 이 대리 그 인간 연락처 알아요?”
“아뇨, 지웠죠, 진작에.”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어요? 옐로 폭스 GM으로 있다고 하네요, 지금.”
“용하네요, 진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매장 GM으로라도 붙어 있네요.”
“바퀴벌레 같다, 그죠?”
“푸흡… 알겠습니다. 쁘띠토널 쪽에 부탁하면 연락처 따는 거 정도는 금방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부탁 좀 할게요.”
20분 정도나 지났을까….
사내 메신저로 이지혜가 김형찬의 현지 연락처를 보내 왔다.
그리고 난 17층으로 올라가 담배 한 대와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전투력을 끌어 올려 놓고 다시 사무실로 내려와 김형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헬로우?
분명 국제전화 발신 표시가 떴을 텐데도 김형찬은 영어로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홍성 인터내셔널의 공은태 부장입니다.”
-아이고, 이게 누구세요? 이게 진짜 얼마 만입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벌써 부장을 다셨군요.
김형찬이라는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고 그냥 목소리만 들었다면, 정말 나라는 사람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오해를 했을 것이다.
그만큼 김형찬은 야비한 인간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젠 아무런 사업적 교차점이 없는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걸 빤히 다 알 텐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갑게 전화를 받는 김형찬.
난 그를 상대로 불필요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신 사장네 건물의 공사 보류 판정이 김형찬의 작품인지, 아닌지만 확실히 알고 싶을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부장까지 왔네요. 그런데 제가 호칭을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할지… 현재 옐로 폭스 쪽에서 제너럴 매니저로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냥 매니저죠, 말 그대로….
“그래도 매장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그걸 다 총괄하고 계시면…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까요?”
-그냥 편하게 하세요.
“제가 뭘 좀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현재 인터라켄에 저희 홍성 브랜드로 홍성 타워가 기획 중인 거 알고 계십니까?”
-어후… 현재 그거 때문에 인터라켄은 두말할 것도 없고 회사 전체적으로도 무척 시끄럽습니다. 말이 많아요. 발리 팩토리도 입점이 된다죠, 아마?
“네, 그렇게 됐습니다.”
-스타벅스도 들어올 거란 소문도 돌고 있고… 거기다 홍성이 하는 건데 어지간한 브랜드는 입점을 안 시킬 거 아닙니까. 현재 저희 회사도 초비상입니다. 하하하….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김 대표님께서 압력을 넣으신 겁니까?”
-압력이요? 무슨 압력?
“제가 지금 성급하게 김 대표님께 연락을 드린 걸 수도 있는데, 그동안 저희가 함께해 온 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만약 제가 오해를 한 거면 다행이지만, 만약 오해가 아니라 제가 하고 있는 우려가 사실이라면 입장을 좀 바꿔 주시는 게 어떨까… 해서 확인차 여쭤보는 겁니다.”
-혹시 뭐 해당 건물 공사 건에 관한 건가요?
“…!”
-그거 확인하시겠다고 전화를 주신 거면…음…네, 맞습니다. 저희 쪽에서 인터라켄 게마인드 쪽으로 민원을 넣었습니다.
“민원이요?”
-그래도 아직은 성수기 아닙니까? 추석 전후로는 관광객들이 넘쳐납니다, 인터라켄은. 그런데 호에벡 거리 입구 딱 정면에 위치한 건물에서 외벽 공사지를 다 씌우고 리노베이션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이건 문제가 있는 거죠.
“….”
-한 철 장사입니다, 인터라켄은. 베른이나 루체른, 툰, 제네바, 취리히랑은 또 달라요. 성수기 한 철 반짝 벌어서 겨울을 나는 지역인데, 아직 성수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거리 입구에 알박기한 건물에서 거리 전체 이미지를 해치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그걸 문제 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 김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지금 악수를 두고 계시는 겁니다.”
-하하하… 공 부장님. 지금 저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뇨, 협박이 아니라 친절하게 경고를 해 드리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핑계 갖다 붙이지 마시고, 여기까지는 저희가 애교 차원으로 참아드릴 테니까 딱 여기서 멈추세요.”
-공 부장님 자신감은 여전하시네요.
“스위스 생활은 좀 어떠십니까? 저는 기회만 된다면 거기서 한번 살아 보고 싶던데….”
-홍성 덕에 스위스로 유배를 오긴 했지만… 나름 나쁘지는 않습니다. 조금 지루한 것만 빼면 뭐… 그럭저럭 애들 키우고 살기엔 괜찮아요.
“그럼 그 스위스 생활 오래 하셔야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거기서 다시 스위스로…. 이제 더 옮길 곳도 없지 않습니까?”
-무례하시네요.
“김 대표님께는 그렇게 해도 될 거 같아서요. 무례한 상대에게 혼자 예의를 갖추는 건… 조금 모자란 대처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희 홍성을 상대로 뭘 믿고 그런 무리수를 던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김 대표님이 저희가 허용할 수 있는 도발에서 그치셨으면 좋겠습니다.”
-방금 공 부장님께서 저한테 하신 말씀을 토씨 하나 안 빼먹고 CGM 본사 측에게 제가 그대로 전달을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그런데… 하실 수나 있습니까?”
-못 할 것도 없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김 대표님도…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