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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77화 (277/325)

#277

가장 합리적인 의심

아마도 박기태의 발표 이후부터였던 거 같다, 이젠 현장에서 미련을 버려야 할 때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게….

앞으로 내가 해야 되는 건 지금까지 줄곧 내가 해 왔던 디테일을 그려내는 작업이 아니라, 차장 이하 팀장들이 만들어 오는 디테일을 체크하고 영업부 팀원들이 자신들이 가진 역량을 120퍼센트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옆에서 격려하고 응원을 하는 일뿐이었다.

그게 홍성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부장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기태의 발표는 나의 지난 홍성 생활을 되짚어 보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나 혼자 잘나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니었다.

어떤 아이디어를 던지더라도 일단 한번 해보고 결과에 따라 작전을 바꿔 보자는 식의 열려 있는 마인드가 탑재된 선배들이 내 위를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 줬고, 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따라간다는 식의 부하 직원들이 단단하게 내 뒤를 받쳐 주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다.

예상치 못한 박기태의 폭풍 성장(따지고 보면 그동안 안 차장과 장향은의 그늘에 너무 가려져 있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좀 들고…)에 난 더 이상 내가 영업부 안에서 디테일에 씨름할 이유는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미 내가 없어도 삼차장의 지휘 아래 너무 잘 굴러가는 영업부가 되어 버렸다.

“은근히 서운하지?”

“그러니까요… 그러네요. 따지고 보면 서운할 게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거고, 그래서 서운할 게 전혀 없는데, 저 없이도 자기들끼리 너무 잘 굴러가니까 괜히 아직 내가 할 일은 많을 거 같은데, 이게 뭐지? 하고 헷갈린다고 할까요?”

“크크큭… 나도 그 기분이 뭔지 잘 알지.”

장 대표가 낄낄거리며 곰탕 한 숟가락을 입안으로 넣었다.

정말 오랜만에 장 대표와 단둘이서만 점심 식사를 가졌다.

알렌 강이 손 부장과 함께 상무님을 모시고 건물 계약 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박 이사 역시 사장님의 호출에 아침부터 사장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삼차장은 각자의 부서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난 부장이 되어서도 여전히 점심 식사 파트너를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홍성과 폴앤크루 본사 중간쯤에 있는 곰탕집에서 장 대표와 만나 가볍게 반주 삼아 소주 한 병을 시켜 놓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난 자랑하듯, 괜히 서운한 척 홍성 영업부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중이라고 장 대표에게 말했다.

그에 질세라 장 대표는 그동안 서로 척을 지고 살았던 손 부장과의 호흡이 예상외로 너무 잘 맞다며 손 부장과 문 차장의 승부욕을 자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린 기분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소주가 반병쯤 사라졌을 때였다.

내 잔에 술을 채워주며 장 대표가 물었다.

“사장님한테 다이렉트로 이사 계약 제안받았다면서?”

“뭔 놈의 회사가 이렇게 비밀이 없는지….”

난 대수롭지 않은 척 장 대표로부터 소주병을 건네받아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오너 집안 혈연관계 제외하면 최연소 임원 승진 아냐?”

“모르겠습니다, 그런 거까지는….”

“아직 대답을 안 줬다면서?”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으니까요. 고민을 좀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뭐… 그때 내가 했던 말 때문이라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공 부장 하고 싶은 대로 해.”

“무슨 말이요?”

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얼굴에 미소를 띄워놓고 물었다.

“짓궂긴….”

“아… 3년 뒤에 계약 끝나면 같이 장사나 하자고 하셨던?”

“내가 공 부장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기회일 거 같다. 장사야 뭐 언제든지 나와서 할 수 있는 거고.”

“그렇죠. 놓치기 아까운 기회죠.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아깝습니다.”

“뭐가?”

“공기, 분위기… 그리고 냄새를 잃어버릴 거 같아서요.”

“…?”

“아직은 현장에서 더 뛰고 싶은 모양이에요. 근데 또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저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기회를 못 얻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거기다 박 이사님까지 함께 올릴 수 있는 조건이라며?”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사장님도 어지간히 약은 분은 아니세요? 하하하….”

“보통 분이시겠어? 그 정도 딜은 웃는 얼굴로 할 수 있으시니 그 자리에 계시는 거지.”

“아무튼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기도 했고, 또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을 전혀 안 해 본 상황이라 고민을 좀 해 보겠다고 대답을 미뤘습니다. 대표님 때문은 아니니까 괜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시고요. 만약 이사 계약 제안을 못 받고 그때 했던 3년 계약이 다 끝난다 하더라도 저는 대표님과 같이 일 안 합니다.”

내 말에 장 대표는 미간을 좁히며 날 빤히 쳐다봤다.

“징글징글… 미운 정, 고운 정, 볼 꼴, 못 볼 꼴 서로 다 보여주고, 다 본 사이에 뭐 하러 또 대표님이랑 엮여서 같이 일을 하겠습니까? 그것도 회사에 엮인 것도 아니고 맨땅에 헤딩인 개인 장사에 엮여서… 어후… 싫습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힙니다.”

“이거 너무 필터링 없이 솔직하기만 한 거 아냐?”

“좋아해서요.”

“….”

“제가 대표님은 너무 좋아해서… 그냥 뭐 이젠 본사 나가셨으니 하는 말이지만 처음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는데 이젠 이상하게 친형 같고… 그래요. 그래서 더 이상 일은 같이 안 하려고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아무리 가까워도 친구끼리는 동업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가족이랑은 같이 일하면 안 된다…. 그게 이상하게 대표님이랑 저 사이에도 적용이 되는 말일 거 같아요. 딱 지금 이 관계가 좋은 거 같아요. 비록 홍성에 묶여 있긴 하지만, 서로 다른 포지션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그런데 만약 여기서 개인 장사라는 울타리 속에 묶이게 되면 지금 딱 좋은 이 감정이 다시 또 지리멸렬함으로 변하게 될까 겁이 납니다.”

“흐음….”

“어쩔 수 없잖아요. 좁은 공간 안에서 한정된 투자, 인프라로 업계에 뛰어드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거기다 같이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또 별것도 아닌 일로 서로 지지고 볶으며 얼굴에 핏대를 올려야 하고…. 앞으로 대표님하고는 딱 지금처럼 서로 여유 있게 만나서 기분 좋은 대화만 하고 싶어요. 돈, 명예… 이런 거 다 떠나서, 그냥 한때 제 사수였고, 실력으로는 여전히 제게 벽 같은 존재…. 대표님은 제가 이 업계를 떠나기 전까지도 제 마음속에서만큼은 영원한 제 사수로 남아 주세요. 괜히 일로 엮여서 지금 딱 좋은 서로의 이미지에 금 같은 게 생길 빌미는… 안 만들고 싶어요.”

장 대표에 대한 거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장 대표 역시 그저 피식하고 웃어넘길 뿐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식당을 나와서 폴앤크루 본사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근처 테이크 어웨이 커피숍에서 1,500원짜리 아이스 라떼를 하나씩 주문해서 그걸 빨대로 빨아 마시며 나와 장 대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업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강 대표가 바로 한 방 먹였지. 난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리고 관심도 크게 없다. 다만 우린 당신의 그림을 볼 뿐이다. 우리 눈에 당신의 그림은 폴앤크루와 어울리지 않는 거 같다. 그게 우리가 당신의 작품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의 전부다.”

“그랬더니요?”

“그랬더니 본사까지 찾아와서 어떻게 자기한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간 세상에 미친놈들 많아. 아니, 명색이 대학 교수씩이나 된다는 인간이 가난한 무명 아티스트들의 작품 노출을 우선순위로 하고 있는 폴앤크루에 자기 수상 이력 들이밀면서 자기 작품으로 콜라보를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는 것부터가 양심이 없는 거 아냐?”

“무례하네요.”

“그러니까. 무례한 것도 어느 정도껏 해야 인상이 안 찌푸려지지. 자기 제자들 그림을 가지고 와서 그런 요청을 한 거라면 이해라도 해 보겠어. 근데 이건 뭐 자기 명성 조금 더 올려보겠다고 자기 그림 장당 300에 주겠다는 식으로 선심 쓰듯 딜을 걸어 오지를 않나, 자기 그림의 가치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림으로 이런 사업을 할 생각을 하느냐며 억지를 부리지를 않나…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쓰럽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돼먹지 못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

“그나저나 폴앤크루는 컬렉션 확장이 더 이상 없는 겁니까? 지금 현재 너무 작가 컬렉션에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해야지. 컬렉션 확장도 서서히 준비를 해야 되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알겠지만, 손 부장까지 붙어서 강 대표하고 출장 다니기에 정신이 없고, 그나마 문 차장은 작가 컬렉션 선별하는 것만 해도 벅차니까. 디자인팀이 붙어도 문제야 이럴 땐. 디자인팀이 있으니까 괜히 더 디테일에 신경을 쓰게 되는 거 같아. 예전에 본사에서 우리끼리 쳐냈을 땐 디자인 자체에 승부수를 띄운 게 아니라 브랜드 콘셉트로 밀어붙였잖아. 그런데 이게 이제 슬슬 시장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잡혀 가면서 소비자들이 좀 더 자극적인 걸 원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컬렉션 수를 늘리기보단 컬렉션 자체의 디테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게 되더라고.”

“흐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겠네요.”

“이게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어. 아무리 유통을 잡고 있다고 해도 확실히 컨트롤 업무하고 브랜드 자체 업무는 다른 게 한두 개가 아닌 거 같아. 나도 요즘 정신없다. 거의 뭐 배우다시피 하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요.”

“뭐가?”

“별자리는 어떤가요?”

“별자리? 무슨 별자리? 뭐 물병자리, 전갈자리… 그런 거?”

“네.”

장 대표는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쳐다봤다.

뭔가 감이 잡힌 듯 걷는 걸음에 속도가 줄어드는 장 대표였다.

“이게 한정판으로 제작하는 작가 컬렉션이랑은 또 다르거든요. 제작 물량에 한계를 두지 말고 연도별로 디자인만 새로 만들어 주면 될 것도 같지 않습니까?”

“별자리, 별자리… 뭔가 느낌은 오는데, 그렇다고 확 이거다! 하는 확신은 안 서네.”

“그냥요… 저는 그냥 아이디어만 툭툭 던져주는 거니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고요. 걸러서 들으세요, 걸러서.”

“근데 별자리 그게 먹히겠어?”

“한국에서야 블러드 타입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한국, 일본 제외하면 블러드 타임에 딱히 관심을 가지는 나라가 많지는 않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갑자기 웹툰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웹툰?”

“네, 저 요즘 자기 전에 웹툰 찾아봅니다. 하하하….”

“애도 아니고, 웹툰은 무슨….”

“아니, 근데 웹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보는데 그림체는 상당히 괜찮은데 이상하게 못 뜨는 작품들이 부지기수더라고요. 스토리 같은 게 아무래도 빈약해서 그런 거겠지만, 어쩔 수 없이 폴앤크루 때문에 지난 몇 년 그림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사실 폴앤크루가 예술성 높은 작품들을 초이스해서 작가들이랑 콜라보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한국 웹툰 시장이 중국 웹툰 시장보다 훨씬 더 큰 거 아세요?”

“난 그쪽으로는 전혀 몰라. 관심이 없어.”

“아무튼 그렇대요. 이게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이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올라오는 그 작품을 기다렸다가 직접 결제를 해 가면서 작품을 보는데, 중국 사람들은 굳이 결제를 해 가면서 만화를 안 본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웹툰을 보는 사람들은 한국보다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시장 자체는 한국 시장이 훨씬 더 크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서는 단가를 맞춘다고 중국 그림 작가를 섭외해서 그림을 그리게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웹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네요.”

“시장의 원리지. 그걸 가지고 좋다, 나쁘다를 따질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아니, 제 말은 그런 걸 따지자는 게 아니라 웹툰을 그리는 작가들 중에서도 분명 힘들게 자기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말이죠.”

“…!”

“인기 없는 작가들의 작품들이랑 콜라보를 하는 건 아무래도 뭐랄까… 그 작가들의 작품 홍보 수단밖에 안 되는 거 같고, 또 그렇게 가다 보면 폴앤크루의 이미지가 자칫 저렴하게 변질될 위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아까 말한 별자리 같은 캐릭터 공모전을 웹툰 작가들을 상대로 펼쳐 보는 건 어떨까 해서요.”

“나쁘지 않다. 마케팅의 건덕지가 생기겠어.”

“별자리가 총 몇 개죠? 열두 갠가?”

“몰라.”

“암튼, 별자리를 주제로 상금 얼마 걸어 놓고 컬러풀한 캐릭터를 공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어차피 폴앤크루는 현재 그림 그리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이슈잖아요. 틀림없이 많은 작품들이 모일 거예요.”

“흐음….”

“그중에서 각 별자리별로 한두 작품씩만 뽑아서 물량 제한 없이 제품으로 만들어내면, 이건 작가 컬렉션보다 더 대중적인 컬렉션으로 매년 디자인만 바꿔 가면서 뽑아낼 수 있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대체 그런 생각들은 언제 다 하는 거야?”

“매일요.”

“…매일?”

“네, 매일요. 저는 폴앤크루가 이런 식으로 분리경영을 하게 된 걸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폴앤크루에 제 지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본사에서 대표님이랑 같이 폴앤크루 아이디어 만들어낼 때 정말 재밌었거든요. 지금은 아예 분리가 되어서 이런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괜히 참견을 하는 거 같아서, 이렇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려 보는 거지…. 저 매일 폴앤크루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내가 공 부장 점심을 자주 사 줘야겠네. 나야 공 부장이 이런 아이디어들을 종종 던져 주면 아무래도 고맙지.”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이고요.”

“별자리, 별자리… 이거 내가 나중에 강 대표랑 손 부장 일본에서 복귀하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겠네. 나쁘지 않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서 폴앤크루 본사에 도착했을 때였다.

장 대표는 내가 던진 별자리 컬렉션에 갑자기 꽂힌 사람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가서 커피나 한잔 더 하고 가라고 제안했다.

난 아직 끝까지 다 마시지도 못한 라떼를 눈짓하며 무슨 커피를 또 마시자는 거냐고 되물었고, 그런 내게 장 대표는 같이 올라가서 일 이야기나 좀 더 하자고 떼를 쓰듯 제안했다.

결국 난 양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장 대표와 폴앤크루 본사 앞에 같이 있는데, 오후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자리를 좀 비워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천천히 오세요. 특이사항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폴앤크루 본사에서 장 대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오후 3시나 됐을까?

안 차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스위스에서 신 사장으로부터 홍성 타워 프로젝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 같다고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무슨 문제요?”

-건물 리모델링에 관한 허가 문제인 거 같습니다. 제가 직접 컨트롤할 부분은 아닌 거 같아서요.

“지금 스위스 현지 시각이… 거기 지금 새벽 아니에요?”

-오전 8시 조금 넘었겠네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겼다고… 일단 알겠습니다. 신 사장님께는 지금 제가 바로 전화를 넣을게요.”

난 안 차장과의 통화를 서둘러 끝내고 장 대표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곧바로 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공은태입니다. 방금 안 차장님한테 연락을 받았습니다. 허가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요?”

-건물 안에 에스컬레이터 넣기로 한 부분 있지 않습니까. 스타벅스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부분이랑 거기서 다시 4층으로 올라가는 부분에.

“네.”

-그 부분에 대한 공사 보류 판정이 나왔습니다. 현재 에스컬레이터 업체하고 단가 조율 중인데 이런 일이 터져버려서 상당히 곤란해져 버렸습니다.

“그게 왜요? 사장님 건물 아닙니까? 에스컬레이터를 넣든 엘리베이터를 넣든 자기 건물에 건물주가 돈 투자해서 공사를 하겠다는데, 그걸 왜 관공서에서 보류 판정을 때리는 겁니까?”

-이게… 한국이랑은 조금 다른 게 아무래도 그 일대 건물들이 하나같이 다 최소 100년 이상씩은 된 건물들이라 문화재적인 성격도 함께 띠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외관을 해치는 공사나 아님 지반 관련된 공사에 관한 허가는 엄격하게 하는 편이죠.

“그래도 그때 사장님께서 그 정도 공사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왜냐면 저희 건물뿐만 아니라 저희 바로 옆 건물에도 자체 에스컬레이터를 몇 년 전에 넣었거든요.

“그런데 왜 사장님 건물에만 공사 보류 판정이 나왔단 말입니까?”

-하아… 확실한 건 아닌데요. 제가 이 허가 관련 진행을 맡긴 업체 측에서 하는 말이 인터라켄 게마인드 쪽으로 누군가가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라고요.

“게마인드라면….”

-한국으로 따지면 일종의 동사무소, 구청 같은 역할을 하는 관공서죠.

“누가 압력을 넣었다는 겁니까?”

-아마도 옐로 폭스 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옐로 폭스요?”

-네, 폭스타운 자체 플렉스 샵 브랜드요.

“거기서 왜요? 아직 사장님 건물에 리모델링 끝내고 뭐가 들어간다는 건 아무도 모르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발리 팩토리 측이랑 아웃렛 매장 다이렉트 계약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던 거겠죠. 옐로 폭스가 발리도 함께 취급을 하잖아요. 거기다 절대 들어올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스타벅스까지 들어온다고 하니까 현재 인터라켄 안에선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중입니다.

“옐로 폭스가 압력을 넣은 게 확실한가요?”

-소문들 중에선 현재 저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아무래도 건물주가 동양인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네요.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는 없는 거 같고요.”

-근데 꼭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사장님께서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말씀하신 그 이유로 에스컬레이터를 못 깐다면 이건 기분상 열이 받는 거죠.”

-그렇다고 게마인드에서 보류 판정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말 그대로 보류잖아요.”

-옐로 폭스 거기 GM(총 책임자)이 한국 사람이라고 하던데, 참… 이럴 때 보면 같은 한국인들끼리 너무한다 싶네요, 진짜.

“한국인이요? 거기 GM이 한국 사람입니까?”

-인터라켄 지점의 옐로 폭스 말고, 옐로 폭스 플렉스 샵 브랜드 총괄 GM이 한국인이라고 하더군요. 고작 매장 총책이 무슨 수로 게마인드에 압력을 넣겠습니까? 거들떠도 안 보죠. 폭스타운이나 아님 CGM 자체를 등에 업고 압력을 넣은 게 아닐까 합니다.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촉이 떠올랐다.

아니길 바랐는데, 이상하게 그 인간일 것만 같았다.

“혹시 거기 한국인이라는 GM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아뇨, 거기까진 저도 잘….

“혹시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신 사장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온 건 그로부터 2시간 뒤였다.

-김형찬이라고… 예전에 나크리스 건으로 홍성과도 함께 일을 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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