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콜! 진행하세요
그렇게 가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스위스 출장을 다녀온 이지혜는 출장 후 출근 첫날 대형 슈트케이스 하나를 끌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슈트케이스 속에는 스위스에서 가져온 아이작 기본 티셔츠와 카디건 등이 들어 있었다.
“어후… 이걸 다 직접 가지고 온 거야? 그냥 샘플본 관세 처리해서 우편으로 부치지 그랬어?”
차 팀장이 기겁을 하며 혀를 내두르자 이지혜는 배시시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금요일 오후에 최종 초이스를 끝냈거든요. 한국처럼 국제 우편 퀵이 활성화가 되어 있는 게 아니래요. 주말엔 아예 센딩 작업을 하지도 못한다고 하고….”
“아무리 그래도….”
“어영부영하다 보면 샘플 받는 데만 일주일 넘게 걸리게 생겼는데, 뭐 하러 그래요.”
“근데 이게 다야?”
“최대한 무난한 디자인들로만 뽑아 왔어요. 그리고 대표 컬러들만 추려 왔고. 여기 원단 샘플은 따로 챙겨 왔으니까 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여러 컬러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엥? 뭐야? 고작 일곱 종류네….”
“최소 같은 디자인에 다른 컬러로 세 종류씩은 더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아무리 단독 매장 세팅이 아니라서 최대한 짜게 추려 왔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짜게 추렸는데?”
이지혜의 업무 처리 방식에 차 팀장이 잠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어디 동대문에서 물건 사입해다가 파는 개인업자들도 아니고 너무 찔끔찔끔 받아 오는 거 아냐? 에이… 이건 너무했다. 고작 이거 초이스해 오겠다고 스위스까지 갔던 거야? 최소한 편집샵 안에 한 브랜드 섹션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은 가져왔어야지.”
차 팀장의 실망감 앞에 이지혜는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어차피 이월 제품들 중에서도 도저히 안 될 거 같은 것들은 우리 쪽 아웃렛에 깔아서 컬렉션 채우기용으로 써도 되는 거 아냐. 제대로 밀어주기로 한 거잖아. 그냥 간 김에 그쪽 재고 창고 공간도 확보해 줄 겸 쫙 빼서 오지 그랬어? 부장님도 그렇게 해 주라고 하셨잖아.”
“실은….”
이지혜는 차 팀장 앞으로 주말을 이용해 정리를 끝낸 출장 보고서를 내밀었고, 그 출장 보고서를 확인한 차 팀장은 그제야 이지혜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람들 참… 왜 이렇게 일을 안일하게 처리하지? 준비가 덜 됐음 우리 쪽에서 넘어가기 전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양해를 구했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도 맨파워 부족해 죽겠는데,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대리 주말까지 반납하게 만들어 놓고.”
차 팀장이 답답함을 숨기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자 이지혜는 차 팀장이 여기서 더 흥분을 하지 않도록 최대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어가며 신 사장 측의 입장을 대변했다.
“몰랐던 거 같아요.”
“뭘? 뭘 몰랐다는 거야?”
“뭐랄까… 홍성이 그리고 있는 사업의 전체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감을 못 잡은 거 같아요.”
“그게 말이 돼? 이거 어디 우리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홍성 자체 프로젝트냐고. 다 자기네 브랜드 같이 띄워 보겠다고 이러는 거 아냐.”
“아마 저희 같은 대기업이랑 코퍼레이션을 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저도 싫은 소리를 좀 했어요. 그랬더니 또 바로 수긍을 하면서 자기들이 실수를 한 거 같다면서 사과를 하잖아요.”
“어후…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 하나도 없어.”
이지혜의 말만 들어 보면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올 아이작의 컬렉션을 초이스하러 이지혜가 스위스로 넘어갔을 때까지도 신 사장네 건물은 여전히 각 층의 전 객실을 재고 창고로 쓰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지혜는 매장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신상들 말고 재고 컬렉션들 좀 보여달라고 했고, 그쪽 최 실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해맑게 이지혜를 데리고 재고 창고로 쓰고 있는 객실 층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이지혜는 아무런 체계도 갖춰지지 않은 신 사장네 회사 시스템에 학을 뗐다고 한다.
“자기들끼리는 나름 찾기 쉽게 간이 선반 같은 걸 객실마다 다 설치를 해서 재고를 관리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저처럼 디자인을 확인하러 간 사람의 입장에서는 디자인 체크를 하는 게 보통 업무가 아니더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지. 깔끔하게 정리만 해놓으면 뭐 해? 이렇게 다 비닐에 싸져 있으면 디자인 확인을 못 하는데…”
“재고 창고로 쓰고 있는 방 하나에 들어가 있는 이월 제품 디자인들 확인하는 데만 1시간 넘게 걸리더라고요. 일일이 다 비닐 까서 확인하고, 또 옆에서 거기 직원은 제가 확인한 제품들 다시 비닐에 넣고…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지금 저한테 이런 식으로 전 객실에 들어가 있는 재고들을 다 파악하란 말이냐며 싫은 소릴 좀 했어요.”
“잘했어. 당연히 해야지.”
“자기들 말로는 그래요. 인터라켄에서 운터젠 쪽으로 빠지는 곳에 대형 아시안 마켓이 하나 있대요. 일종의 아시안 식료품을 파는 가게인 거 같은데, 거기에 자리가 나서 인천 창고에서 보고 배운 대로 거길 아이작 재고 창고로 쓸 계획이라고. 그런데 한국처럼 일 처리가 빨리빨리 진행이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건 그쪽 사정이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제가 만토바 창고를 이야기하면서 필요하면 만토바 쪽과 대신 접촉을 해줄 수도 있으니까 거기 가서 창고 운영을 어떻게 하는지, 다시 한번 제대로 보고 오라고 했어요. 아무래도 제반 시설 세팅 같은 경우는 저희 창고보다는 만토바 쪽 창고를 카피하는 게 더 쉽고 효과적일 거 같더라고요.”
“흐음… 그렇지.”
“아무튼 이런 식으로 저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챙겨줘 가면서는 같이 일을 못 한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아 놓고 왔어요. 그쪽에서도 고의가 아니라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체계적인 방법을 몰라서 버벅거리는 거라는 거라며 인정을 했고. 그래서 다음 달에 재고 창고가 확실하게 마련되고, 그래서 저는 가서 딴 거 안 하고 제품 초이스만 하면 되게끔 세팅이 다 끝나면 다시 연락을 달라고 했어요. 그 전까지 대량 오더는 없을 거라고 확실하게 입장을 밝혔고.”
내가 대리 1, 2년 차였을 때에도 이지혜만큼 저렇게 일을 똑 부러지게 처리를 했었는지 스스로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이지혜처럼 저렇게 똑 부러지게 일을 처리 못 했던 거 같다.
내가 대리 1, 2년 차였을 땐 여기저기 눈치를 참 많이 봤었던 거 같다.
신 사장네 회사는 홍성이 전사적 차원으로 과감한 투자까지 해 가면서 더 큰 타깃을 잡고 협력을 약속한 거래처 아닌가.
내가 이 대리의 입장에서 아이작의 국내 론칭에 쓸 아이템을 초이스하러 갔었다면, 내가 만약 대리 1, 2년 차 짬밥으로 그 큰일을 하러 갔었다면 상대의 역량 따윈 고려하지 않고 내 몸을 축내서라도 아이템 초이스를 완벽하게 끝내고 돌아왔을 거 같다.
네 일과 내 일의 구분을 짓는 능력 따윈 대리 1, 2년 차였던 내게는 없었던 게 확실하다.
그저 회사 경비로 스위스까지 출장을 간 상태이고, 그래서 난 내가 자리를 비운 만큼 본사에 남아 다른 팀원들이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기에 출장의 목적을 최대한 달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신 사장네 건물 전 객실 재고 창고들을 다 뒤집어 까서라도 초이스를 완벽하게 끝내 놓고 왔을 거다.
하지만 이지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준비가 안 된 상대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뒤, 그 문제점을 다시 홍성으로 가져와 공론화시키고 있었다.
지금의 난 당연히 저게 맞다는 걸 알지만, 그때의 난 그렇게 큰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그저 무식하게라도 내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다 쳐내는 게, 그게 진짜 일을 잘하는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좀 늦게 가도 된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제대로 가는 게 중요한 거다.
그렇게 제대로 된 방법으로 무리하지 않고 가야 롱런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파트너와 얼굴도 붉히고 또 지지고 볶아가며 우리의 방향을 설득할 수 있어야 결국 그게 우리 입장에선 지름길인 것이다.
“잘했어요.”
“죄송합니다. 출장을 가기 전에 그 부분을 제대로 체크하고 갔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그걸 이 대리가 무슨 수로 체크하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그냥 잘했어, 그냥 잘했어요.”
“….”
내가 이지혜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잘했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이지혜가 있는 앞에서 신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번 이지혜의 출장 결과에 받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는 홍성의 입장을 정확하게 밝혀줬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희 쪽에서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저희는 빨리 가자고 한 게 아닙니다, 사장님. 시간이 걸려도 됩니다. 다만 한 발 한 발 실수 없이 내디디고 싶을 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재고 창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달 안으로 세팅을 끝내겠습니다. 이 대리님 다음 출장 땐 저희 쪽에서 비행편이랑 숙박을 대신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게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요. 저희 쪽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버퍼링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네, 그 부분 역시 앞으로는 최 실장한테 다 맡기지 않고 제가 직접 다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제대로 물이 오르기 시작한 건 비단 이지혜 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여기저기 붙어 다닌다고 박쥐 인간, 베트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기태 역시 팀장 승진 이후엔 더 이상 여기 가서 이 사람 편들고 저기 가서 저 사람 편을 드는 박쥐 인간 베트맨이 아닌 안 차장을 도와 해외 영업부를 든든하게 지키는 해외 영업부의 진짜 히어로 베트맨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SS 편집샵 브랜드로 홍성 타워에 입점시킬 브랜드를 추려 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CGM의 옐로 폭스, 그리덜, 그리고 스위스 1등 플렉스 샵인 킹스와 겹치는 브랜드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가격 경쟁력에선 우리가 우위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네, 부장님 말씀대로 저희 쪽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쏟아부어 버리면 일단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먹고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바꿔 말해서 그 가격 경쟁이라는 것도 결국은 매장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 무기를 활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그러기엔 아직 신 사장님의 매장 운용 능력이 증명되지가 않았습니다.”
“흐음…”
박기태의 지적을 듣는 순간 그동안 내가 현장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마진으로 신 사장에게 물건을 보내준다고 해도, 현장에서 직접 고객들을 설득하고 또 현재 인터라켄이라는 판을 장악하고 있는 CGM과 싸우려면 그만큼의 내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걸 과연 신 사장네 회사가 제대로 해낼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해보다가 옐로 폭스, 그리덜, 그리고 킹스가 집중하지 않고 있는 브랜드를 홍성 타워의 주력 브랜드로 내세우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 세 플렉스 샵이 집중하지 않고 있는 브랜드라면….”
“버버리.”
“…!”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까인 듯한 느낌이었다.
버버리라는 브랜드 때문이 아니라, 나는 사실 박기태가 저 정도로 분석력이 뛰어날 거라고는 전혀 기대를 못 하고 있었기에 까인 뒤통수가 더 아팠던 거 같다.
“어차피 홍성 타워의 메인 고객들은 현지인들이 아니라 관광객입니다. 일반적인 서유럽 코스 패키지를 보면 파리로 인을 해서 독일, 스위스를 거쳐 로마나 밀라노, 베네치아에서 아웃을 하죠.”
“….”
“서유럽 코스 패키지에서 런던을 찍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리고 런던을 찍는 패키지 같은 경우는 대체로 고급 상품이라서 스위스를 들어가더라도 인터라켄보다는 체르마트나 생모리츠, 몽트뢰 같은 유니크하지만 고급진 코스로 도는 게 일반적이죠. 바꿔 말해 인터라켄으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은 어차피 이탈리아에서 프라다를 보고 파리에서 고야드를 접합니다. 하지만 버버리는 힘들죠. 버버리를 본다고 해도 에이… 그래도 버버리는 영국인데 여기서 살 이유가 있겠어? 하는 생각에 구매 욕구를 억누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홍성 타워 메인에 버버리가 들어가면 말은 달라질 거라 확신합니다.”
“이유는?”
“일단 인터라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구성을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정말 준비를 많이 했다는 게 표가 나는 발표였다.
“중국인 관광객이 압도적이죠. 작년 대비 인터라켄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64퍼센트가 중국인 관광객입니다. 그런데 또 재밌게도 버버리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명품 브랜드 순위 10위권 밖으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로 폭스, 그리덜, 그리고 킹스는 이 버버리라는 강력한 브랜드에 크게 집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의 소비는 결국 유통이 다 결정을 하니까. 없는 브랜드를 구매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들 입장에서도 버버리는 확보가 힘든 브랜드고, 또 확보를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굳이 이탈리아, 프랑스 중간에 끼어 있는 스위스에서 물 건너 있는 버버리에 집중을 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버버리가 없잖아요.”
“이참에 땡겨 오는 거죠.”
박기태의 자신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내가 임원들 앞에서 발표를 할 당시, 그 발표를 하는 모습을 보며 임원들이 지금의 내가 박기태를 지켜보는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독으로 땡겨 오긴 힘들겠지만, SS샵 구성 브랜드로 땡겨 온다면 앞으로… 한국에서도 SS 편집샵에 버버리를 깔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난 용기를 내고 있는 박기태에게 긴말하지 않고 짧게 지시했다.
“콜! 진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