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소고기 한번 살게
“이야… 진짜 국내 컨트롤 라이선스 하나 던져줘 놓고 그걸 미끼로 호구 제대로 낚으셨네. 다들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장 대표는 애먼 곳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 부장 역시 자기가 생각을 해 봐도 너무 뻔뻔했던지 애써 웃음을 삼키며 나의 시선을 피해버렸고, 알렌 강은 그리 예쁘지도 않은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호구라니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같은 편 아닙니까.”
“같은 편은 무슨….”
“그럼 우리가 적입니까?”
“지금 이 순간은 그러고 싶네요. 아, 진짜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에 너무 재미 붙이시면 안 됩니다.”
“에이… 마음에도 없는 말씀 하지 마시고….”
“아니, 근데 강 대표님. 적응이 너무 빠르신 거 아닙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그냥 처음부터 이런 스타일이셨던 걸로 오해하겠습니다.”
“장 대표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더라고요.”
“거기서 또 내 이야기가 왜 나와요? 난 분명 이거까지 공 부장한테 부탁하면 우리가 너무 염치가 없어지는 거라고 내 입장을 정확하게 밝혔어요.”
“우와… 공 부장님 분위기 봐 가면서 기분 좋을 때 부탁하라고 하셨던 분이 인제 와서 이러면 제가 뭐가 됩니까? 공 부장님 마음 약해서 어지간하면 다 들어줄 거라고 힌트까지 주신 분이….”
장 대표는 아예 스마트폰을 꺼내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웃음밖에 안 나왔다.
“물론 로드샵 매장 오픈을 할 수만 있으면 유통 판 쪽은 로드샵 매장 안정화부터 시킨 다음에 천천히 들어가도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습니다.”
잠깐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대충 접어 놓고 알렌 강이 제법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상무님께서 샵 자리를 직접 알아봐 주신다고 하고, 또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이토 쪽 문을 두드렸던 게 아깝기도 해서요. 처음부터 2호점, 3호점… 이렇게 쭉쭉 오픈을 시킬 계획은 아니었는데, 상대가 던지는 미끼가 너무 큽니다.”
“어떤 미끼요?”
“오로지 미니멈 개런티로만 가자고 하네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장 커미션이요.”
“아….”
“지점별로 조율은 필요하겠지만, 긴자 이토 같은 경우엔 100만 엔으로 미니멈 개런티 설정하고 입점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미니멈 개런티만 맞춰주면 그 이후 추가 수익에 한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냥 이토 측 역시 폴앤크루와 홍성 본사가 한 뿌리라는 건 알지만, 엄연히 분리가 된 상태라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탁이라는 표현을 썼겠죠.”
임대료 100만 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제안이 확실했다.
어차피 폴앤크루는 상무님이 직접 건물을 매입해서 그걸 월세 1달러에 빌려주겠다는 이야기가 있기 전부터 그 이상의 임대료를 예상하고 일본 진출을 계획했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 제대로 된 위치라면 월세 하나도 얻기 힘든 비용으로 매장 두 개를 오픈할 수 있다면 욕심이 날 수밖에.
거기다 폴앤크루 본사 입장에선 그만큼 제품 생산에 여유가 생기는 거고, 재고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 것이다.
일본 시장에 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지만, 대충 긴자가 한국의 명동 정도 레벨이 된다고 봤을 때 국내 유통 판의 명동점에 그것도 폴앤크루급 정도 되는 브랜드가 들어갈 층이라면 최소 미니멈 개런티 800에서 1,000만 원 정도는 보장을 해주고 거기서 그 이상의 매출이 올라오면 올라가는 만큼의 퍼센티지를 더 지불해 줘야 한다.
솔깃한 제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2년 재계약을 하기로 했습니다.”
“…!”
알렌 강의 입에서 자신의 재계약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장 대표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올라가고 있었다.
“어우, 잘하셨네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글쎄요… 계약 조건을 들으시면 절대 그런 말씀은 못 하실 겁니다.”
“…?”
“연봉 1억이 깎였습니다.”
“…!”
하지만 알렌 강은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거기다 약속받고 들어온 옵션 모두 포기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아니, 그건 좀….”
“대신 장 대표님이나 공 부장님처럼 지분을 약속받지는 못했지만, 전체 영업 순이익 대비 퍼센티지는 약속받았습니다.”
“흐음….”
“사실 저처럼 한 직장에서 10년 넘게 근무를 하다가 이직을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약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
“10년을 넘게 근무했던 회사와 이별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중요하게 여겨 왔던 의리와 충성심… 그런 가치를 놓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구속력으로부터 해방을 원했다고 해야 할까요? 따지고 보면 그런 의리와 충성심에 염증을 느껴서 이직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 홍성으로 이직을 결심하면서 최대한 깍쟁이처럼 제가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 먹자… 하는 주문을 스스로 상당히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고, 평생을 그렇게 직장생활을 해오지 못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랬다.
알렌 강은 분명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굳이 홍성 본사까지 직접 찾아와 공개 프레젠테이션으로 상무님의 실수를 날카롭게 비난했었다.
“아마도 당시 장 대표님과 공 부장님이 보여주신 행동들이 절 흔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 봤죠. 도대체 본사 상무님은 전생에 무슨 공덕을 그렇게나 많이 쌓았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연타로 하고 있음에도 장 대표님과 공 부장님이 마치 자기 회사 기우는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두 팔 다 걷어붙이고 나서는 걸까…. 그래서 가슴이 간질간질했습니다. 제가 이직을 결심하면서 버리기로 결심했던 회사에 대한 의리, 그리고 충성심이 이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홍성에서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서서히 알겠더라고요. 제가 근무했던 이전 회사와는 다른 뭔가가 홍성에 있다는 걸. 본사 상무님이 제게 재계약을 부탁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의 재계약 건 역시 따지고 보면 자신의 업무가 아닌 장 대표님의 권한인데 폴앤크루에 관해 앞으로는 일절 관여를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자기가 또 실수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면서 말이죠.”
장 대표는 여전히 스마트폰에 시선을 던져놓고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다.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예의를 갖춰서 정확하게 뭐가 어떻게 필요하다는 걸 상대에게 말해주고 부탁을 해야지, 상대는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눈치조차 못 채고 있는데, 계속 눈치껏 알아주기만을 바라다 보니, 장 대표님이나 공 부장님이 거기서 피로도가 쌓였고 또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옆에서 악역을 자처하며 지켜보는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갈등을 조장한 게 저였기 때문에 할 말도 없었고요.”
“뭐… 다 지나간 일 아닙니까.”
“이게 홍성이 제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이전 회사와의 다른 점이더라고요.”
“…?”
“실수에 대한 인정. 그걸 할 수 있는 리더라면… 지금 당장은 좀 더디겠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는 회사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
“그래서 저도 공 부장님이 알아서 챙겨주시겠지… 알아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기대만 할 게 아니라 조금 밉상처럼 보일지라도 저희 폴앤크루가 정말 필요한 걸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서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막 분위기 깔고 그러시면 제가 알았다고 뭐든 다 협조를 하겠다… 그럴 줄 아셨어요? 하하하….”
“장 대표님도 저나 손 부장님을 불러놓고 말씀을 하셨지만, 공 부장님의 번뜩이는 재치와 아이디어는 사실… 따라가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현재의 폴앤크루는 공 부장님의 능력과 홍성 본사의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폴앤크루 역시 앞으로는 홍성 본사와 국내 시장 컨트롤 라이선스 건에 한해선 더 이상 공 부장님과 의미 없는 줄다리기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 놔, 씨… 이거 이상하게 계속 낚이는 거 같은데….”
잠시 생각을 해 봤다.
알렌 강의 부탁이 홍성 본사 영업부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부탁인 걸까.
그다지 부담스러운 부탁이 아닌 건 확실했다.
손 부장은 이 건으로 내가 직접 센젠 법인에 전화를 한 통 넣어주기만 하면 잘 해결이 날 거라고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직접 전화를 해서 요청을 하는 것보다 센젠 법인 밥을 그래도 몇 년 정도 먹고 돌아온 손 부장이 직접 정리를 하는 게 모양새가 좋을 거 같았다.
그저 폴앤크루의 입장에서 필요한 건 홍성 본사 영업부의 컨펌일 뿐이다.
내가 오케이 사인을 넣었다는 것만 센젠 법인 쪽에 전달하면, 센젠 법인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선 쉽게 통과를 시켜줄 사안.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그렇지 않아도 차고 나가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마진도 안 나오는 만토바 물건 일본 수출 건을 우리가 떠안았을 때, 만토바 물건을 인차지하고 있는 안 차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였다.
그런데 내가 안 차장을 너무 몰랐던 거지….
“만토바 물건을 인천 창고에서 다이렉트로 일본 쪽에 넘겨주라고요?”
“아니, 일본 전체가 아니라 이토 측으로만… 마진은 인천 창고에서 센젠으로 들어가는 마진율 그대로 적용시켜서.”
안 차장과 박기태가 신 사장과 최 실장을 데리고 식당에 도착했을 때였다.
스위스에서 온 손님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업 이야기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그 부분을 잠시 접어놓고 폴앤크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주제가 폴앤크루에서 홍성 타워로 바뀌었다.
그리고 노련한 장 대표는 CGM이라는 거대 기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신 사장을 안심시킨다는 명목으로, 대화 주제를 홍성과 만토바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손 부장이 안 차장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며 만토바 물건을 인천 창고에서 센젠 법인을 거치지 말고 바로 일본으로 쏴주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신 사장은 우리끼리 치고 있는 딜을 아주 흥미롭게 구경했다.
마치 우리 홍성이 만토바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듯 이야기를 이어가니, 그에 대한 믿음도 생긴 듯해 보였다.
“에이… 그럼 우린 특별 마진도 안 생기는 일을 두 번, 세 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냥 센젠 법인으로 다이렉트로 쏴 주는 게 훨씬 편하죠, 저희 입장에서는.”
“소고기 한번 살게.”
안 차장에 대한 파악이 끝난 손 부장이 그 자리에서 강수를 뒀다.
“2차는 회.”
“크흠….”
“3차는 조개구이 어때?”
“음….”
“4차는 국밥으로 해장하고 첫차 타고 헤어지자. 금요일에 시간 비워 둬. 괜찮아?”
“부장님, 이건 매출을 떠나서 회사 전체적인 차원으로다가 저희가 무조건 폴앤크루를 도와줘야 하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