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월세 1달러
“대장이랍시고 맨날천날 대장 대접만 받았지, 정작 대장질하면서 위에서 제대로 너희를 끌어준 적도 없는데, 이제 와 너희한테 밀어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가 않다.”
퇴근 후 박 이사와 단둘이 술을 한잔 마셨다.
사장실에서 동시에 나올 때였는데, 박 이사가 어쩐 일로 퇴근 후에 같이 소주나 한잔하자며 나의 의향을 물었다.
박 이사가 같이 소주 한잔 하자는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그동안 박 이사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대표가 영업부 부장으로 있을 때야 장 대표가 종종 챙겨 드렸는데, 전사 운영본부장으로 보직을 옮긴 이후부터 박 이사는 거의 줄곧 혼자 계셨다.
나 역시 장 대표를 대신해 박 이사를 챙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어쩔 수 없이 나랑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또 홍성에서의 짬밥도 크게 차이가 나니까 내가 먼저 술 한잔 사 달라는 말을 하는 게 어려웠던 거다.
그런 미안함이 생겨서일까.
난 박 이사에게 ‘그럼 오랜만에 차장들 소집 한번 들어갈까요?’ 하고 장난스레 물었고, 박 이사는 ‘그냥 오늘은 둘이서 한잔하자.’라는 말로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밑밥을 깔았다.
그래도 오늘은 내가 모시고 싶었다.
회사 선배, 나이 이런 걸 다 떠나서 그냥 오늘은 내가 모시고 싶었다.
새벽집으로 예약을 했고, 그곳에서 소를 잡는 날에만 들어오는 특수부위를 양껏 시켜서 박 이사를 대접했다.
“너 괜찮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오버죠. 와이프 알면 또 며칠 바가지 긁힙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이사님이랑 같이 좋은 음식을 좀 먹어 보고 싶네요.”
“영업하면 이게 문제야. 여기저기 접대하러 다닌다고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면서 입맛만 높아지지.”
“그냥요, 그냥… 제가 먹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동안 마음이 많이 불편했었습니다.”
“왜?”
“음…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가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
“이상하게 저는 제 위에 누가 있는데, 그 존재를 건너뛰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꼰대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폴앤크루 초창기 때 분명 이사님이 계신데, 계속 상무님이 절 불러서 일을 맡기시니까 그게 괜히 불편하더라고요. 제 본의와는 상관없이 이사님을 건너뛰는 거 같고,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이사님께 제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는 것도 우습고….”
“너무 질겨도 문제지만 너무 연해도 탈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 공 부장 넌 여기저기 네가 다 챙겨야 한다는 그런 강박증이 좀 있는 거 같아.”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공 부장을 보면 저걸 왜 저렇게 혼자 다 짊어지고 가려고 하나… 하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저렇게 하니까 저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거지…. 하며 이해도 되고 그래.”
“거품입니다.”
“무슨 거품?”
“실은… 무섭습니다.”
나는 박 이사에게 거의 처음으로 내가 회사로부터 받고 있는 기대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란 사람이 가진 진짜 능력은 고작 요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난 검지 첫 마디를 반대 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이상하게 타이밍과 운때가 계속 맞아들어가서 던지는 것마다 하나같이 과녁을 맞히고 있는 거 같습니다. 분명 제가 알고 있는 제 진짜 실력은 절대 이 정도가 아닌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또 그 오해 때문에 실력이 부풀려지는 거 같아서, 도대체 그다음엔 어떤 거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솔직히 이젠 저도 겁이 납니다.”
“그래서 거품이다?”
“네….”
“그런데 공 부장 그거 아나?”
“뭐요?”
“카푸치노는 거품 맛으로 마시는 거야. 그리고 공 부장은 오늘 사장님도 인정을 하셨지만, 홍성이 내린 최고의 카푸치노고. 거품일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냐. 회사는 지금 공 부장이 펌프질하는 텐션에 만족을 하고 있고, 그 펌프질은 공 부장 너만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태야.”
“네.”
“나는 오늘 사장님이 날 미끼로 너한테 딜을 걸었단 생각은 안 한다. 다만 오죽 급하셨음 나까지 불러다 앉혀 놓고 그런 퍼포먼스를 하실까 하는 짠한 기분에 맞장구를 쳐 드렸던 거지, 그럴 분은 아니시니까.”
“….”
“그래서 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너한테 말해 주는 거야. 네 선택에 내 목숨이 달려 있단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설마요. 그건 말도 안 되죠.”
“그러니까. 나 아직 쌩쌩하다. 근데 은태야. 너는 부족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회사는 이미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있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더 줄 준비도 되어 있고.”
“…네.”
“근데 왜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려?”
“제가요? 저 그런 적 없는데요?”
“….”
“저 그런 적 없습니다. 물론 부장… 따지고 보면 부장도 일반 사원이죠. 그런 일반 사원의 자리에서 자회사의 지분을 받고, 또 3년이라는 계약으로 묶여 있다는 게 조금 특수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저는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한 이후부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야?”
“네. 아직 2년 넘게 남은 일입니다. 계약서에 사인은 했고, 폴앤크루 지분까지 받은 이 상황에서 제가 왜 그 부분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지금 마음이 무척 편합니다. 어쨌거나 제가 일을 잘하든 못하든 앞으로 2년은 돈 나올 구멍이 있는 거 아닙니까.”
“나가지 마라, 회사.”
“…!”
“장 대표도 네가 가끔씩 잊을 만하면 툭툭 건드려서 흔들어 주고.”
“흐음….”
“회사에 뼈를 묻으라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네 꿈을 한번 펼쳐 보란 말이야. 집 나가면 고생이다.”
“크크큭….”
“웃긴.”
“아니, 저희 아버지가 자주 하시는 말씀을 하셔서요.”
“진짜야. 집 나가면 고생이야. 내가 뭐 사장님 근심거리 하나 덜어 주자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고, 현실적으로 말해 주는 거야. 그게 거품이든 뭐든 넌 딱 너만의 사업 스타일이 있어. 그 스타일은 네 뒤에 배경이 있어야 돼. 넌 그 배경을 120퍼센트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나고, 그 재주로 너 자신뿐 아니라 배경의 크기까지 함께 키우는 능력이 탁월해진 거야. 내가 봤을 땐 그렇다.”
“…네.”
“네가 가진 가능성을 혼자만의 능력으로 펼쳐보겠다는 뻘짓 같은 거 하지 마. 네가 어디 어린 나이도 아니고, 그 나이 먹고 그러는 건 나잇값 못 한다는 소리 듣기에 딱이야. 인생은 실전이다. 상상처럼 되는 게 아냐. 내가 꼰대라서 남의 능력을 축소하고 또 한정된 테두리 안에 그 능력을 가두려는 게 아냐. 펼쳐. 능력이 있음 펼쳐야지. 그런데 지금까지 네가 만들어 놓은 배경을 버리지는 말라는 뜻이야. 네가 회사 나가서 시작하면 지금까지 홍성에서 네가 만들어놓은 인프라가 다 너의 배경이 되어 줄 거 같지? 안 그래. 쉽지 않다. 나는 그냥 네가… 이 안에서 끝장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장 대표 그놈도 무슨 헛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같이 가라, 같이. 너희는 딱 둘이 붙어 있을 때가 옆에서 보기에도 제일 든든하다.”
물론 난 장 대표가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정에 대해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사장의 한국 방문 하루 전날이었다.
폴앤크루 쪽에서 장 대표와 알렌 강이 홍성 본사를 찾아왔다.
본사 영업부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 아니었고, 상무님의 호출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들끼리 아침부터 만나서 장기간 미팅을 가졌고, 점심 식사 후에도 다시 본사로 들어와 미팅을 이어갔다.
그러다 오후 4시 즈음 장 대표로부터 카톡 하나가 날아왔다.
-간만에 17층에서 담배나 한 대 같이 피우자.
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미팅 다 끝나셨습니까?
-난 끝났어. 강 대표는 상무님이랑 따로 이야기 중이고.
-지금 어디십니까?
-커피 뽑고 있다. 너도 마실래?
-네, 밀크 커피 한 잔 부탁드립니다.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날씨가 좋았다.
바람도 나름 상쾌했고.
거기다 장 대표가 그곳에 먼저 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장 대표는 들고 있던 커피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우린 함께 17층 난간 앞으로 나란히 서서 건물 밖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슨 일이길래 대표님만 쏙 빼놓고 상무님이랑 강 대표 둘이서 이야기를 합니까?”
“상무님이… 열일을 하시네.”
“네?”
“강 대표 잡겠다고 용을 쓰신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다 민망할 정도로 말이야.”
“…?”
“그건 그렇고 축하한다?”
“뭘요?”
“인터라켄 프로젝트 건으로 인센티브 보장받았다며?”
“아….”
“그거 사이즈가 보통 사이즈가 아닐 건데… 인사부에 말해서 그 인센티브만 다른 통장에 넣어달라고 해라. 크크큭….”
“오… 굿 아이디어!”
“이제 살아 보니까 그때 내가 남자는 무조건 비상금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아뇨.”
“뭐?”
“푸흡….”
장 대표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진심이냐고 물었다.
“필요하면 달라고 하면 되지, 뭐 한다고 딴 주머니를 찹니까?”
“진심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집사람 은행에 다닙니다. 작정하고 추적하면 바로 걸릴 건데, 제가 그 미련한 짓을 왜 합니까.”
“아… 그런 것도 추적이 가능해?”
“모르죠, 전. 근데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추적은 일도 아니니까 엄한 짓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약 친 거에 속은 거 아냐?”
“그러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습니까. 돈 쓸 시간도 없는데….”
나와 장 대표는 서로 피식하고 의미 없는 웃음만 흘리며 담배를 빨았다.
“일본에 건물 매입 준비 중이라고 하시네.”
“아, 맞다. 그때 박 이사님 통해서 건물 알아보고 계시는 거 같던데….”
“바로 볼 수 있는 물건이 몇 개 나온 모양이야. 그거 같이 보러 가자고, 그 일정 같이 한번 잡아 보자고 부르셨어.”
“아….”
“홍성 본사에 들어가 있는 상무님 본인 지분 싹 다 빼서 그거 사장님께 넘겨 드리고, 그 돈으로 매입을 준비 중이시란다.”
“…!”
“그러면서 나한테 그 말씀을 하시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안 좋더라.”
“무슨….”
“자기는 홍성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자기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거 때문이라면 생각을 좀 바꿔 달라고.”
“흐음….”
“본인 명의로 건물을 매입하겠다고 하시네. 폴앤크루에 본인 지분이 들어가 있으니, 홍성 본사 투자로 건물을 매입하는 건 보기가 안 좋을 거 같다면서. 자기가 건물을 매입해서 거기에 자리를 줄 테니까 일본 시장은 그렇게 들어가는 거로 하자고.”
“괜찮은 방법이네요.”
“월세로 1달러만 내라고 하네.”
“…!”
난 그 부분에서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대신 폴앤크루를 제대로 띄워서 월세로 받지 못하는 금액만큼 건물 가치를 띄워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
“흐음….”
“자기는 그거면 충분할 거 같다면서 말이야. 뭐랄까… 뭔가 포기하시는 느낌이야. 그래서 마음이 별로네.”
“아닐 겁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저한테 분명히 그러셨어요. 아직은 때가 아닌 거 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뭔가 계획이 있으시겠죠.”
“….”
“우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우리 일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