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왜 대기업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신우철입니다.
“네, 사장님. 안 그래도 제가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시차가 안 맞아서 언제 연락을 드려야 편하게 전화를 받으실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는데…”
-아무 때나 전화 주셔도 됩니다. 자다가도 받아야죠.
그로부터 며칠 뒤 스위스의 신 사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 사장은 투자 건에 대해 물었다.
“아직 실질적인 컨펌을 줄 수 있는 분들을 다 모시고 프레젠테이션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홍성의 영업 총괄을 하고 계시는 이사님께는 보고를 올렸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낸 상태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제가 그때 컨택을 한번 해보시라고 했던 브랜드와는 연락을 해보셨습니까? 제가 회사 임원 회의 요청해서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위해선 그때 제가 말씀드렸던 부분의 확정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뒤에 회사로 찾아와서 건물 상태를 직접 한번 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장님.”
-네, 부장님.
“사장님께서 그 브랜드를 입점만 시키면 말 그대로 게임 끝입니다. 하지만 바꿔 말해서 못 시켜도 다른 대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비밀 유지니까요. 비록 호에벡 거리에 명품 단독 매장은 없지만, 그래도 스위스를 대표하는 플렉스 샵 브랜드 세 개가 그 거리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플렉스 샵들은 하나같이 CGM과 직간접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샵 브랜드들이죠. 괜히 제가 말씀드렸던 브랜드 따낸다고 그 건물에서 이뤄질 프로젝트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시다, 혹 CGM이 알기라도 하면 한국에서 브랜드 센딩하는 데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 네. 그 부분은 최대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홍성과 CGM은 몇 년째 관계가 상당히 뒤틀려져 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희가 사장님 건물에 저희 물건과 브랜드를 넣을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걸 상대가 알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를 하려고 할 겁니다.”
-흐음….
“물론 뭐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 역시 작정하고 상대를 해버린다면 아예 진행을 못 할 건 없지만, 시작부터 큰 의미도 없는 상대의 견제 때문에 힘 뺄 필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지 말자는 뜻입니다.”
-…네.
“위치가 좋으니까…. 어떤 브랜드라도 제가 말씀드렸던 조건이라면 들어오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사장님. 끌려가지 마시고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말거면 말라는 식으로 자신 있게 딜을 넣어 보세요. 한국에선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습니다. 사장님은 건물주 아닙니까. 끌려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브랜드 측에서도 무척 긍정적으로 제안을 받아들였고, 또 직접 와서 보겠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럼 저는 언제쯤 투자 관련 확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선 제가 최 실장님한테 건물 도면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도면으로 3D 이미지를 따서 그 이미지를 가지고 프레젠테이션을 해보려고요. 저희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사업의 가능성보다는 프레젠테이션의 퀄리티로 사업이 통과가 되고 막히기도 하거든요. 저 역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점 꼭 말씀드리고 싶고, 그래서 급하게 접근하기보다는 완벽하게 아무런 태클도 받지 않고 프로젝트 기획을 통과시키려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중입니다.”
-….
“저 믿고 제가 그때 부탁드렸던 거 하나씩 진행하시면서 마음 편하게 기다려 주세요. 여기 일은 제가 최선을 다해서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부장님만 믿고 그때 말씀해 주셨던 부분들 하나씩 진행해 나가겠습니다.
신 사장과의 통화를 끝낸 뒤 곧바로 회의실로 내려갔다.
양 차장을 시켜 차 팀장과 이지혜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을 했고, 난 그 세 명에게 앞으로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벌어질 CGM과의 전면전 플랜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걸… 저희 팀에서 맡으란 말씀이십니까?”
차 팀장이 물었다.
“아뇨. 다 맡으라는 말이 아니라 신 사장님네 브랜드를 SS샵에 넣어주자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단독 매장은 아직 어림도 없는 브랜드입니다. 하지만 적정 수량을 오더해서 SS샵에 깔아 주는 건 가능할 거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될 만한 컬렉션들, 그나마 무난하게 SS샵에 현재 깔려 있는 브랜드들과 섞여서 끼워팔기 형식으로 최소의 턴 오버는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한 컬렉션들로 차 팀장이 진행을 해주면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차 팀장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요즘은 좀 어때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그 공황장애….”
“아, 많이 나아졌습니다. 약도 꾸준히 먹고 있고.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 되네, 나는….”
“….”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을 텐데, 이런 업무까지 맡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미안하긴요. 부장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 있지 않습니까?”
“…?”
“이게 어디 부장님 개인 사업도 아니고, 다 회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인데 당연히 따라야죠. 그리고 무엇보다… CGM을 밟는 일 아닙니까.”
“에이… 그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쩌다 보니 또 CGM이랑 전면전을 하게 생겨서 그런 거지, 애초에 CGM을 보고 인터라켄을 갔던 건 아니에요.”
“어쨌든지요. 어쨌든 저희 입장으로서는 전의를 불태워야 하는 명분이라는 게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SS샵에 때려 박고 브랜드 턴 오버 하나 만들어 내는 거야 어디 일이겠습니까? 제가 우리 이 대리랑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해 볼 테니까, 부장님은 그 부분에 대해선 신경 끄고 다른 일 하십시오.”
“우리 부장님 든든하시겠네. 야 이, 차 팀장 이 나쁜 새끼야.”
“…?”
양 차장이 정색을 하는 순간 이지혜는 화들짝 놀라며 겁을 먹었고, 차 팀장 역시 영문을 몰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너, 왜 내가 일시킬 땐 그렇게 토를 달면서 지금 부장님 앞이라고 액션 까는 거야? 너무 나긋나긋하잖아.”
그제야 양 차장이 장난을 치는 거라는 걸 눈치챈 차 팀장과 이지혜는 긴장한 얼굴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차장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라고 하시는 분이고, 부장님은 뭐라도 소스를 하나 던져 주시면서 발전을 시켜 보라고 주문을 하시잖아요. 주문의 성질이 다른데, 일을 쳐내야 하는 사람의 반응이 다른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자, 자… 두 사람 티카타카는 사무실 올라가서 하시고, 지혜 씨는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네.”
난 양 차장과 차 팀장을 밖으로 내보낸 뒤 이지혜에게 주문을 걸었다.
“예전에 내가 딱 이 대리 포지션이었을 때 장 대표님이 제 사수였고, 또 팀장이었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칭찬에 진짜 인색하신 분이죠, 장 대표님.”
“….”
“그런 장 대표님이 다른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절 공개적으로 칭찬해 주신 적이 한 번 있어요. 물론 직접적으로 우리 공 대리 일 잘한다, 최고다…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장 대표님 성격상 정말 큰 용기를 내셨고 또 그 칭찬을 하시면서 얼마나 본인 손발이 오그라들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어떤….”
“컨트롤하고 있는 모든 브랜드를 다 띄울 수는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손을 대는 것마다 다 대박을 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나에겐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브랜드라도 다 띄울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다.”
“…?”
“모든 작전을 다 써 봤는데, 그래도 브랜드가 뜰 기미를 안 보이면 난 내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다. 그 카드가 뭔지 아냐… 라고 하시면서 당시 팀원들과 하나하나 돌아가며 눈을 마주치셨죠.”
“그 마지막 카드라는 게 뭔가요?”
“절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면서 아무리 해도 뜰 기미가 안 보이는 브랜드가 있으면 그냥 공 대리한테 전담 마크를 시키면 된다고 하셨어요. 다른 업무 아예 못 보게 만들고 딱 그 브랜드 하나만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전담 마크하게 만들고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게 당시 장 대표님이 제게 해주신 최고의 찬사였다고 생각해요.”
“신뢰가 대단하시네요.”
“제가 그래요, 지금.”
“…?”
“아무리 힘든 브랜드가 있어도 저는 이 대리가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안 해요.”
“그게 무슨….”
“나크리스 때부터 쁘띠토널까지… 진짜 힘든 브랜드, 말도 안 되는 브랜드를 나랑 같이 몇 번이나 띄워 봤잖아. 나는 이 대리가 못 띄우는 브랜드는 샤넬 코코, 칼 라거펠트가 홍성 영업부에 와서 마케팅을 해도 절대 못 띄운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
“아이작… 내가 양 차장님한테 따로 말해 놓을 테니까 다른 거 보지 말고 당분간은 아이작만 보세요.”
“…넵!”
“믿습니다. 그럼 올라가서 안 차장님이랑 장 팀장, 그리고 박 대리 좀 이쪽으로 내려오라고 해주세요.”
잠시 뒤 안 차장과 장향은 그리고 박기태가 내려왔다.
내가 마시던 커피가 다 떨어졌다는 걸 눈치챈 이지혜가 박기태를 통해 내가 마실 커피를 한 잔 더 준비해서 내려보냈다.
확실히 눈썰미라든지 센스가 보통이 아닌 친구다.
“땡큐.”
난 박기태에게 커피를 건네받은 뒤,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장향은에게 물었다.
“출산 예정일이 정확하게 언제라고 했죠?”
“내년 2월입니다. 2월 첫째 주라고 하더라고요.”
“으음….”
장향은의 표정이 무거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임신 사실을 나에게 알리며, 출산 후에도 다시 회사로 복귀하고 싶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던 장향은.
난 그런 장향은에게 그 당연한 걸 뭐 하러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느냐는 식으로 그녀를 안심시켰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홍성의 독보적인 센터 장향은을 놓칠 이유가 있겠나.
그건 절대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녀의 센터로서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난 내가 부장으로 있는 동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육아 휴직에 관해선 위로부터의 압박을 내가 대신 다 감수해 줄 생각이었다.
내겐 그 정도의 파워가 있었고, 또 그 정도 상부의 압박으로 내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장 팀장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커버를 해줄 사람을 세워 놔야 할 거 아니에요.”
“….”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침묵을 유도한 게 아니었다.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던 거다.
“박 대리.”
“네, 부장님.”
“제가 내년 상반기에 박 대리를 팀장으로 올렸음 하는데, 박 대리 생각은 어때요?”
“…!”
“안 차장님 생각은?”
“올릴 때 된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올릴 때도 됐고, 또 명분이 좋잖아. 우리 장 팀장 출산 휴가 가 있는 동안 인차지를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박 대리. 나는 박 대리 정도면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대로 그나마 장 팀장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할 수 있어요?”
“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차장님.”
“네, 부장님.”
“팀을 하나 더 만들어야 돼요. 장 팀장 출산 휴가 가 있는 동안만 그 자리에 박 대리가 인차지로 서는 거로 하고, 장 팀장 복귀하면 팀을 나눠 줘야 할 거예요. 현재 해외 사업부가 가지고 있는 프로젝트들로는 실적을 분산시키기가 어렵겠죠? 그래서 제가 다른 프로젝트를 하나 생각해 봤어요.”
그런 다음 처음부터 다시 스위스 출장에서 잡아온 프로젝트를 그들에게 설명했다.
“이거 박 대리가 차고 나가 봐요.”
“우와… 이거 사이즈가 보통 사이즈가 아닌 거 같은데….”
“왜? 못 하겠어?”
박기태는 자신의 팀장 승진이 걸려 있는 부분임에도 신중했다.
“나는 박 대리만큼 적임자도 없다고 봐요. 센딩만 해주면 되잖아. 그리고 센딩한 물건 인벤토리 관리만 해주면 되는 거고… 물론 센젠 법인으로 보내는 거에 비해 수량이 적고, 또 매출에 따른 디테일이 복잡할 거란 건 알아요. 하지만… 딱 그것만 하면 되는데, 그것만 하면 되는 팀으로 내가 맨파워를 만들어 주면 해볼 만하지 않나?”
“네, 해보겠습니다!”
“제가 이걸 박 대리한테 주겠단 결정을 하기 전에 박 이사님한테 한번 물어봤어요. 제 첫 브랜드가 나크리스였잖아요. 생초보 팀장한테 그 브랜드를 맡기신 이유가 뭐였냐고. 그랬더니 그러시더라고. 첫 브랜드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가 없다고. 배운 대로만 해주면 될 거 같은데….”
“네, 할 수 있습니다.”
“오케이. 그럼 지금부터 박 대리는 자체 팀장보로 승진을 시키는 거로 하고, 안 차장님은 인사부에 말해서 박 대리 팀장 명함 하나 파주세요. 그리고 박 대리.”
“네, 부장님.”
“배운 대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말고, 배운 대로 실수만 안 만들어 낸다는 생각으로 지금부터 이 프로젝트 차고 나가 봐요. 난… 박 대리 믿어. 자, 이거.”
“…?”
“신 사장님네 회사 최 실장이라는 친구 명함이에요. 젊은 친구가 실력이 좋아. 박 대리랑 나이대도 비슷하고. 앞으로 최 실장하고의 접촉은 박 대리가 하세요. 그리고… 홍성이 왜 대기업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얼타지 말고.”
“넵!”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난 박기태가 만들어준 PPT로 사장님께서 직접 참관하시는 프레젠테이션의 발표자 자격으로 대회의실 스크린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