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65화 (265/325)

#265

여긴 촌 동네고요

다음 날 아침이었다.

8시로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샤워를 하고 곧바로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조식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선 난 호에벡 거리가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확하게 내가 예약을 한 호텔을 경계로 쇼핑 거리와 일상 거리가 나뉘는 거 같았다.

웨스트역 쪽으로는 유명 브랜드들의 샵이 즐비해 있었지만 오스트역 쪽으로는 케밥집, 태국 식당, 베트남 쌀국수집, 패러글라이딩 예약소와 같은 쇼핑과는 거리가 먼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거리의 너비도 호에벡 거리의 두 배 정도는 더 넓어서 한결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20분 정도나 걸었을까?

천천히 걸었는데도 20분 만에 오스트역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여행을 생각하고 왔다면 그 안에서도 뭔가 볼거리를 찾을 수 있었겠지만, 쇼핑과 관련해서 뭔가 특별함을 발견하고자 했던 발걸음이었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스트역에서 다시 천천히 걸음을 돌려 신 사장의 회사에 도착했을 땐 9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최 실장이 매장 입구에서 날 반겼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최 실장은 업무복이라고 하기엔 지나치리만큼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매장 근무를 하는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동네가 이렇게 작을 줄 몰랐습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려고 좀 일찍 호텔 체크아웃을 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네요.”

“아직 사장님 출근 전이신데….”

“아….”

“보통 10시 전후로 출근을 하십니다. 아마 곧 오실 겁니다. 괜찮으시면 올라가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좀 여쭤볼 게 있었는데….”

“네.”

“아무리 찾아봐도 스타벅스가 없네요?”

“스타벅스요?”

“네. 살 게 좀 있어서….”

인터라켄의 상징이 그려진 머그컵을 하나 구하고 싶었다.

폴앤크루 때문에 오게 된 출장이 아니겠나.

비싼 건 못 해줘도 장 대표, 알렌 강에게 그 정도 선물은 해주고 싶었고.

“아… 머그컵이요. 나중에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일단 올라가시죠.”

난 최 실장을 따라 전날 신 사장과 오랫동안 마주 보고 앉아서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던 2층으로 올라갔다.

신 사장이 오기 전까지 최 실장이 말 상대를 해주었고, 난 최 실장에게 몇 가지 궁금한 걸 물어봤다.

“그… 오면서 좀 봤는데, 옐로 폭스, 그리덜, 그리고 킹스까지 플렉스 샵이 제법 많이 눈에 띄더라고요.”

“플렉스 샵밖에 없다고 봐야죠, 인터라켄엔.”

“네,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 플렉스 샵들이 장사는 좀 됩니까?”

“어후… 잘되죠. 무척 잘됩니다.”

최 실장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그런 플렉스 샵도 장사가 잘되는데, 왜 브랜드 단독 부티크는 하나도 안 들어와 있는 겁니까? 제가 인터라켄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제네바는 몇 번 가 본 적이 있거든요. 저는 사실 인터라켄도 제네바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내 말에 최 실장은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제네바와 인터라켄을 비교하십니까. 거긴 말 그대로 메이저입니다, 메이저. 거기에 비해 인터라켄 여긴 촌 동네고요. 물론 관광으로 유입되는 수만 보면 여기가 더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 부티크가 들어가기엔 제약이 많죠.”

“제약이라면….”

“호에벡 거리 보셨잖아요.”

“네.”

“단독 부티크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그래도 단독 부티크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매장 규모가 나와야 하는데, 인터라켄에 있는 건물들, 특히 호에벡에 있는 건물들은 제네바 쪽이랑 비교를 해서 너무 작습니다. 딱 워치 부티크를 하기에 최적화된 크기라고 할까요? 의류 브랜드가 들어가기엔 많이 아쉽죠.”

“그래도 플렉스 샵들이 들어가 있는 매장들은 규모가 꽤 나오는 거 같던데요?”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최 실장.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 플렉스 샵들 옆에 뭐가 있는지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음….”

“옐로 폭스 옆에는 편의점이 있습니다.”

“아… 네, 그랬던 거 같네요.”

“그리고 그리덜 옆에는 서브웨이가 있죠. 샌드위치 가게 옆에다가 어느 명품 브랜드가 자기네 부티크를 열겠습니까? 서브웨이까지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킹스 옆에는요? 관광객들 상대로 엽서, 인형, 카우벨, 마그네틱 같은 걸 파는 오래된 기념품 가게가 있죠.”

“….”

“그나마도 그리덜이 인터라켄에 들어온 건 2년이 채 안 됩니다. 호에벡 거리 자체가 애초에 딱 시계 부티크 정도만 열 수 있는 크기의 건물들로 채워져 있다고 보십니다. 워치 스트리트를 만들기엔 이상적인 거리죠. 하지만 패션 의류 브랜드가 들어가기엔 적합하지 못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패션 관련 매장은 아이템의 수가 많고, 또 탈의실이나 재고 창고 등 부수적인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이즈가 어느 정도는 나와 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브랜드 본사들이 저희 건물에 눈독을 들여왔던 거죠. 위치부터 시작해서 규모까지…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브랜드 단독 부티크를 열 수 있는 건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난 최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살짝 적셨다.

“어제 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처음부터 자체 브랜드를 오픈할 생각은 없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저도 저희가 이 길을 걷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브랜드를 받아서 매장 영업을 해보려고 했다던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져버린 겁니까?”

“브랜드를 아무도 안 주더라고요. 자기들이 직접 하겠다고 자리를 빌려달란 브랜드는 많았는데, 저희가 해보겠다고 브랜드를 달라고 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군요.”

“단독 부티크 매장은 당연히 안 되죠. 그건 저희 홍성도 힘든 일입니다. 어떤 대형 브랜드가 자기네 브랜드 유통을 다른 사람 손 빌려서 하나요, 어디….”

“그러게요.”

“근데 단독 부티크 매장은 힘들더라도 뭐 옐로 폭스, 그리덜… 저런 샵들처럼 플렉스 샵 형식으로 건물을 사용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제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니까 현재 객실은 비워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재고 창고처럼 쓰고 있다면서요? 그렇게 활용을 하시느니, 아예 위에 객실 층까지 다 오픈을 시켜서 샵으로 꾸며버리면 인터라켄 이 일대에선 최대 규모의 멀티샵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봤을 때 못해도 브랜드 40개 정도는 충분히 넣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난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히 최 실장을 떠봤다.

“그 브랜드들을 다 어디에서 받겠습니까?”

“현재 제품 생산을 만토바에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량은 아니지만 일부 만토바 공장을 통해 생산하고 있죠.”

“만토바에 창고 많잖아요. 거기서 물건 떼 오면 되지 않습니까?”

“에이… 힘들죠.”

“어째서요?”

이건 정말 궁금했던 부분이다.

“스위스는 루가노 쪽에 폭스타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이탈리아는 만토바, 그리고 프랑스는 링겐, 독일은 메칭엔….”

“…?”

“일단 다른 EU 국가들과 달리 화폐 단위가 다른 스위스는 관세가 없더라도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물건을 받는 건 손해고요, 그런 부분을 감수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물건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개인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자유롭게 물건을 줄 수 있겠지만, 폭스타운, 만토바, 메칭엔, 링겐… 이 네 군데는 그래도 자기들끼리 어느 정도 상도덕은 지켜 가면서 유지를 하고 있죠.”

“아… 한마디로 남의 밥그릇을 무리하게 넘보지는 않는다….”

“그렇죠. 특히 스위스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쪽 업계가 상당히 폐쇄적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옐로 폭스가 폭스타운 자체 플렉스 샵 브랜드인 거.”

“네, 알고 있습니다. 루가노 역시 출장을 자주 다녔던 곳입니다. 폭스타운 안에도 옐로 폭스 매장이 있잖아요.”

“그리덜 역시 CGM의 지분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는 프랜차이즈 플렉스 샵 브랜드이고요.”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킹스. 그나마 유일하게 CGM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플렉스 샵 브랜드이죠. 하지만 물건을 다 폭스타운에서 떼 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저희가 멀티샵, 혹은 대형 플렉스 샵을 오픈하기 위해선 CGM의 문을 두드리거나, 아님 직접 폭스타운에 가서 물건을 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죠. 인터라켄에 있는 대형 플렉스 샵 세 개 중에 두 개는 CGM과 직접 연관이 있는 브랜드고, 나머지 하나 브랜드 킹스는 스위스 전역에 12개 매장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 1등 플렉스 샵 브랜드입니다. 그런 세 브랜드를 상대로 저희가 무슨 수로 플렉스 샵을 오픈할 수 있겠습니까?”

“….”

“거기다 잘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땅덩어리 면적, 대한민국 3분의 1 수준. 전체 인구수 대한민국 6분의 1 수준. 그런 스위스 안에서도 인터라켄이라는 시장에 CGM이 얼마나 집중을 할까요? 그냥 귀찮은 일 안 만드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현 상태 유지만 잘 해줘도 자기들 입장에선 옐로 폭스, 그리덜, 킹스가 알아서 매출을 잘 올려주니까 말이죠.”

10시가 조금 넘어서 신 사장이 출근을 했다.

신 사장은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그는 들고 온 녹색 투미 서류 가방을 아무렇게나 의자에 올려놓고 날 마주 보고 앉았다.

“사장님, 커피?”

“어, 조금 연하게….”

난 최 실장과 신 사장의 대화에서 또 한 번 당황을 했다.

반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대는 더 아닌 어중간한 최 실장의 말투를 신 사장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주고 있었다.

살짝 부럽기도 했다, 이런 기업 문화가.

하지만 신 사장과 최 실장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질감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고.

“저는 어제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하셔서 11시는 넘어야 오시겠거니… 했는데….”

“네, 뭐… 어쩌다 보니까 좀 일찍 오게 됐습니다.”

한쪽에서 커피를 내리던 최 실장이 말했다.

“동네 구경을 좀 해보겠다고 일찍 서두셨는데, 볼 게 없어서 바로 오셨다네요. 하하하….”

최 실장의 말에 신 사장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신 사장이 마실 커피를 챙겨 온 최 실장.

최 실장은 신 사장 앞으로 커피를 내려놓고 자기는 그만 업무를 보러 가 보겠다고 말했다.

그런 최 실장에게 신 사장은 바쁜 일 없으면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어제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가치라는 거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전날 나와 신 사장이 나눈 대화 내용을 알 리가 없었던 최 실장은 고개만 갸웃거렸고, 신 사장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처음 여행사를 운영하실 때 한국 직원을 못 구해서 여행 비자로 아는 동생들을 스위스로 불러들이고, 그나마도 비자 문제로 석 달에 한 번씩 한국을 다녀오게 만드셨다고요.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 결국 합법적으로 외국인 고용이 가능한 숙박업을 시작하셨고… 그렇게 번 돈으로 구입하신 호텔이 이 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난 최 실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또 이 숙박업 자체가 시즌 비자는 발급이 가능해도 영주권 개념의 비자 신청엔 한계가 있어서 결국 제조, 유통 관련 회사를 차리게 되셨다… 거기다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진출을 할 수만 있으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스위스 생활을 더 못 하게 된 직원이 생기더라도, 한국에서 아무것도 없는 제로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 이 브랜드를 관리하면서 인연을 계속 이어나갈 수도 있을 거고… 그게 어제 사장님께서 제게 이 회사를 차리게 된 배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 실장의 두 눈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 사장은 뭘 또 그런 내용을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이야기를 하냐는 식으로 겸연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람… 그게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가치라고 말씀하셨죠? 저 역시 사장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브랜드가 아닌 사장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가치만 보고 함께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신 사장은 그동안 막혀 있었던 긴 한숨을 천천히 뽑아냈다.

“그런데 사장님.”

“네, 부장님. 말씀하시죠.”

“그 가치… 사장님께서 사장님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표현하셨던 사장님의 직원들 말인데요.”

“네.”

“그 직원들은 과연 현재 사장님께서 만드신 브랜드를 취급하면서 본인들의 가치를 얼마나 크게 느낄까요?”

“…?”

“프라다와 아이작. 어떤 브랜드를 취급하면서 사장님의 직원들은 자존감을 느낄까요? 발렌시아가와 아이작.”

“….”

“버버리와 아이작, 발렌티노와 아이작, 몽클레어와 아이작….”

“흐음….”

“그 모든 브랜드들을 모두 컨트롤하고 있는 홍성의 멀티샵 브랜드, H,I 편집샵과 아이작.”

“…!”

“사장님. 이 건물… 현재 놀리고 있는 전 객실…. 재고 창고로 사용하지 마시고,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로 다 한번 채워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