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다 거절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첫인상을 신뢰하는 편이 아니다.
내가 영업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난 첫인상에 속아서 호구 짓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신 사장은 조금 특별한 케이스였다.
이런 경우도 참 드문 경우인데, 신 사장을 보는 순간 마음이 열려버렸다.
만약 신 사장만 개인적으로 만났다면 기본적인 경계라도 했을 텐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회사에 소속된 매장 직원들의 모습이 너무 밝아서 신 사장이 어떤 마인드로 사업을 대하는지, 아직 말 한마디 직접적으로 섞어 보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대충은 알 것만 같았다.
매장의 공기가 참 따뜻했다.
진짜 온도가 따뜻해서 따뜻한 게 아니라 매장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미소, 그리고 손님들이 한 명도 없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사장의 눈치를 보거나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나도 본사에서 매장 관리를 참 오래 해 왔지만,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쉽지가 않다.
하물며 매니저에 매장 직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장이 직접 나와 있고, 매장엔 파리만 날리고 있음에도 모두가 저렇게 편할 수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장이 모자라거나, 아님 매장 직원들을 대하는 사장의 마인드가 그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한 거니까.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 큰 건물을 어떻게 직원 네 명이서 관리를 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최 실장이 말했던 직원 네 명은 오로지 한국 직원에만 한정된 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님이 없는 거치고는 직원이 많았다.
대충 매장에 스탠바이하고 있는 매장 직원만 해도 벌써 네 명이 넘었다.
저 인원을 스탠바이시키기 위해선 매장 관리상 최소 여섯이서 많게는 일곱 명 정도 고용을 해놓아야 매장이 문을 닫는 날 없이 스케줄을 짤 수 있다는 결론.
“처음 뵙겠습니다, 신우철입니다.”
“공은태입니다.”
신 사장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분명 40대 후반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 무척 동안이었다.
새치가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었는데, 만약 저 새치만 염색으로 숨겼다면 40대 초반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동안이었다.
작은 키, 그리고 마른 몸.
하지만 소매를 걷어서 보이는 팔뚝 위로는 제법 단단한 잔근육들이 붙어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직접 한국에 가서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저희 같은 직장인들에게 이런 출장은 일종의 휴식과도 비슷하죠. 이런 핑계로 또 그동안 한 번도 못 와 봤던 인터라켄 구경도 해보는 거고….”
“처음이십니까?”
“네, 어쩌다 보니 유럽을 올 때마다 출장으로 와서 인터라켄까지 와 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신 사장은 그렇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은 한 층 올라가야 되는데….”
“그 전에 매장부터 한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직접 와서 보면 왜 이 좋은 호텔 건물을 가지고 호텔 비즈니스를 더 이상 하지 않는지 알 거라던 최 실장의 말이 바로 이해가 갔다.
호텔에 리셉션이 없었다.
보통 1층에 리셉션을 깔아 놓는 게 정상인데, 신 사장은 호텔 건물 1층을 아예 다 자기네 브랜드 매장으로 활용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1층 전체를 매장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넓게 탁 트인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바꿔 말해 지나치게 넓은 매장 공간으로 인해 브랜드의 컬렉션이 많이 비어 보였고, 결과적으로 매장 인테리어가 허술하다는 느낌까지 받게 됐다.
한국의 백화점으로 따지면 최소 여섯 개 정도로 점포를 분할해도 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물론 매장 뒤로 얼마나 더 넓은 공간이 탈의실이며, 재고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방법은 없었지만, 일단 밖에서 본 호텔의 전체 면적을 놓고 짐작해 보면 최소 1층 총면적의 절반 이상을 한 브랜드만 가지고 운영을 하고 있는 거였다.
만약 그 한 브랜드가 대형 브랜드라면 충분히 커버를 치고도 남겠지.
하지만 신 사장이 론칭을 한 브랜드는 대형 브랜드와 비교를 한다는 게 민망할 정도로 만들어 놓은 제품들을 디스플레이하는 감각도 형편없었고, 심지어 컬렉션 구분까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 이쪽 공간을 그때 강 대표님이 보고 가셨습니다.”
언제 따라왔는지, 내 옆으로 서며 신 사장이 말했다.
신 사장은 웨스트역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윈도 쪽은 자기네 브랜드를 노출시키고, 호에벡 거리 쪽으로 나 있는 윈도를 폴앤크루가 사용하게 될 거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그렇군요.”
난 영혼 없는 대답을 던졌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이 건물의 베스트 노출 뷰는 누가 뭐래도 웨스트역 쪽으로 난 윈도다.
만약 폴앤크루가 이 건물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월세를 더 올려 주더라도 무조건 웨스트역 쪽으로 난 윈도를 확보해야 했다.
웨스트역 쪽으로 난 윈도는 백화점으로 따지자면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있는 브랜드나 마찬가지였다.
관심이 있든 없든 그 백화점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다 봐야만 하는 위치.
당연히 이 자리를 잡아야지….
하지만 시작부터 진을 뺄 생각은 없었고, 또 상대의 조건이 날 여기까지 부른 만큼 일단은 신 사장이 하는 말에 진심을 다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그런데 날 당황하게 만드는 상황은 그때부터 끊임없이 생겨났다.
“제품력이… 좋네요.”
홍성이 위탁 컨트롤을 해 주길 희망하는 브랜드 업체를 상대로 협상을 할 때 절대 해선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단연 그중에서도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브랜드의 퀄리티를 미리 인정해 버리는 거다.
어느 정도 마진 조정이 진행된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브랜드의 퀄리티를 인정해 버리면 당연히 협상은 그만큼 불리하게 진행이 될 거니까.
그런데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품력이 정말 좋았다.
나는 몇십 년째 명품 수선을 해오신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처음 원단 보는 눈을 배운 사람이다.
아마 중학교에 올라가기도 전에 이미 소가죽과 양가죽의 차이 정도는 만져 보지 않아도 구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난 어린 시절을 부모님의 수선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많은 원단을 보고, 또 만져 봤었다.
우선 신 사장네 브랜드는 대부분의 컬렉션이 원단부터 최상급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디테일한 마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완벽했고.
그런데….
“혹시 자체 디자이너가 있으십니까?”
“상주하는 디자이너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디자인 외주를 주는 업체가 하나 있습니다. 작년부터 그 업체를 통해 디자인을 공급받아 왔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가 택에 찍혀 있고, 또 이 정도 제품력을 뽑아냈다면 만토바 쪽에 있는 공장에서 찍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스위스 브랜드에 메이드 인 이탈리아….
분명 마케팅 포인트는 확실한 브랜드였다.
하지만….
하지만 커버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결점이 있었는데, 디자인이 정말 아쉬웠다.
차라리 외주 디자이너를 따로 쓰지 말고 이 정도 제품력을 유지해 나가면서 만토바 공장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디자인 샘플들에서 약간의 패턴을 추가시키거나 아님 조금씩 패턴을 바꿔가면서 거기에 브랜드 로고를 입혀 제품들을 생산했다면 오히려 더 좋았을 뻔했다.
이건 뭐 디자인 비용은 디자인 비용대로 따로 쓰고 그럼에도 시장에서 외면받기 딱 좋은 제품들만 찍어낸 꼴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신 사장은 계속 날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고.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주면, 실례가 되는 걸까?
“어떻습니까?”
신 사장이 물었다.
“혹시 브랜드 타깃층이 어떻게 됩니까?”
“….”
“우선 저는 디자인과 콘셉트만 봤을 땐 타깃층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부터가 감이 안 옵니다.”
그냥 대충 훑어보는 게 아니라 최대한 자세하게 제품들을 살펴봤다.
국내 컨트롤에 관한 거절을 할 때 하더라도 제품을 살펴볼 때만큼은 거절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브랜드를 봐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지금 진열된 것들은 다들 신상들인 거죠?”
“네, 그렇죠.”
“흐음… 네, 그렇군요.”
“….”
이런 디자인들이라면 신상과 재고를 구분 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문 나의 모습에 신 사장은 함께 입을 꼬옥 다물었다.
* * *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을 천천히 다 확인한 다음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확실히 유럽스러운 구조였다.
매장 한가운데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위치해 있고, 그 엘리베이터를 감싸듯, ‘ㅁ’ 자 모양으로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구조였다.
이 공간이 호텔이었을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이 갔다.
그래서 난 참 궁금했다.
신 사장은 도대체 왜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해야 했던 걸까….
“매장에 진열된 컬렉션들… 원단 단가부터 시작해서 디자인까지 외주 업체를 통해서 딴 거라면… 그동안 이 정도 컬렉션을 늘리기까지 투자가 꽤 많이 들어갔을 거 같은데….”
“많이 들어갔죠.”
이 건물이 호텔의 역할을 할 때까지만 해도 조식 레스토랑으로 사용되었다던 곳으로 날 안내한 신 사장.
지금은 직원 전체 미팅을 하거나, 나처럼 외부에서 손님이 왔을 때 미팅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2층이었지만, 호에벡 거리가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좋은 뷰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각자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놓고 마주 보고 앉아서 난 신 사장에게 어쩌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쉽게 덤비지 못하는 브랜드 론칭을 해 볼 생각을 했냐고 물어봤다.
“아무래도 한국 시장에선 힘들 거 같습니까?”
내 표정의 변화를 살피며 신 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난 재빨리 두 손을 가슴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뇨, 아닙니다. 고작 그거 잠깐 봐놓고 어떻게 브랜드 전체를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뭐라고 감히 한국 시장에서 된다 안 된다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강 대표님 통해서 사장님의 이력을 전해 듣기로 그전까지는 패션 쪽과 전혀 연관이 없는 여행업 관련 일을 오래 하셨다던데…. 이 정도 규모의 매장과 그 매장에 진열된 컬렉션… 절대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없는 스케일이었을 거 같아서 여쭤보는 겁니다. 그동안 해오셨던 일에서 그 방향을 확 틀어 새로운 도전을 하셨을 땐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을 거 같아서….”
그제야 신 사장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에 폴앤크루가 아까 사장님께서 보여주신 그 위치에 매장을 오픈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면 월세로 어느 정도….”
“최소 만 프랑은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만 프랑…. 한국 돈으로 천이백만 원 정도라고 보면 되는 걸까?
딱 봐도 그 정도는 줘야 할 거 같았다.
이 앞을 지나다니는 유동 인구가 얼마인가.
거기에 쇼핑 스트리트 입구다.
비록 패션 의류 단독 브랜드는 하나도 없지만, 호에벡이라는 거리의 명성과 또 그 명성을 만들어낸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들을 놓고 본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월세를 떠나서….”
신 사장은 지금껏 내게 보여줬던 따뜻한 표정을 싹 지우고 예리한 눈을 하며 말했다.
“강 대표님한테도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저희 브랜드를 홍성 본사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저는 폴앤크루에게 자리를 못 줍니다. 공간을 공유해야 할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이야기야 천천히 풀어가면 되는 거니까.
이미 당황은 건물 안으로 직접 들어와 본 뒤부터 충분히 했다.
난 무표정을 유지하며 신 사장을 빤히 쳐다봤다.
난 그저 듣고만 있을 테니, 말을 해 보라는 뜻으로.
“기존에 저희가 1층에 임대를 놓았던 시계 브랜드가 철수를 한 이후, 초대형 패션 브랜드 몇 곳이 절 찾아왔습니다.”
신 사장이 말했다.
“이 건물을 통째 자기네들에게 임대를 해줄 생각이 없느냐고 말이죠. 최소 헌드레드 싸우전드. 찾아오는 브랜드들마다 건물을 통째 임대하는 조건으로 최소 월에 한국 돈 1억 2천 정도는 챙겨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다 거절했습니다.”
“…!”
“제가 거절을 할 때마다 주위에서는 절 미친놈 쳐다보듯 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인터라켄 이 촌구석에서 건물 하나 가지고 있다고 그 월세를 받을 수는 없다면서 말이죠. 제가 이 건물을 8밀리언에 매입을 했었습니다. 이미 저는 이 건물을 매입하고 몇 년 동안 오른 건물 가치만으로도 충분히 큰돈을 벌었죠. 거기다 만약 생각이 바뀌어서 대형 브랜드들한테 건물을 통째 빌려주기만 하면 건물 가치는 무조건 더 오르겠죠? 이미 충분히 벌었는데, 만약 여기서 브랜드 본사들을 상대로 건물 전체 임대 장사까지 해버리면 월세로만 앞으로 7년 안에 이 건물을 처음 매입할 때 썼던 투자금을 다 회수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럼 전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
8밀리언, 한국 돈으로 100억 정도에 매입을 한 건물이란 소린데… 만약 내게도 이런 기회가 찾아만 온다면 달러 빚을 내어서라도 꼭 잡을 거 같다.
그만큼 로케이션 깡패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에 알이 박힌 완벽한 건물이었다.
“운때랑 시기가 잘 맞아떨어져서 이 정도 건물 하나 가질 수 있게 됐고, 또 브랜드 본사가 직접 찾아와 월에 그 정도 월세를 보장해 주겠다고 하면 사실 그것만 챙겨 먹어도 남은 인생 딩가딩가 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팔자가 그럴 팔자는 못 되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
“만약 제가 오로지 돈만 보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던 거라면 전 지금 당장 이 사업을 접어야 됩니다. 그동안 때려 박은 투자금? 그건 손해도 아니죠. 지금 이 상태로 계속 더 끌고 가면 끌고 가는 만큼 손해는 더 날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
백번 맞는 말인데, 그리고 상대 역시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는 눈치였는데… 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생판 경험도 없는 브랜드 사업에 뛰어들어서 직접 매장 관리를 하고… 그래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또 매장에서 직원들 인건비로 나가는 마이너스 커버 치겠다고 다른 사업에서 올라오는 매출을 끌어오는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겠죠. 그냥 속 편하게 월세를 놔버리면 말이죠.”
“….”
“그런데요, 부장님.”
“네.”
“제가 그동안 참 많은 사업을 시도해 봤고, 또 망해 봤습니다. 여러 번 사업을 말아먹어 보니까… 바닥을 찍었단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몇 차례 처참하게 망가져 보고 여기까지 올라와 보니까 예전엔 안 보였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돈만 보고 가다 보면 결국엔 방향을 잃어버리더라고요. 방향을 잃어버리니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방향도 모르면서 계속 가다 보니 결국엔 길까지 잃어버리더군요.”
이게 뭐라고 내 가슴에 파동을 만들어내는 걸까.
“그런데 돈이 아닌 가치를 보고 가다 보면 최소한 방향을 잃을 위험은 크게 줄어드는 거 같습니다.”
“가치요?”
“네, 가치요.”
“가치… 어떤 가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 *
어느새 호에벡 거리에도 어둠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디테일은 내일 다시 만나서 제대로 잡아보도록 하죠.”
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을 쳐다보며 오늘의 미팅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자는 뜻을 내비쳤다.
“디테일이라면….”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지, 아직 한국에 브랜드를 진출시키기 위한 서로의 조건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를 못 나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신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우선 숙소로 돌아가서 오늘 사장님께서 주신 정보들을 토대로 다시 한번 브랜드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품력이 너무 괜찮았고, 또 반대로 브랜드 콘셉트가 한국 시장에서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신 사장은 그 정도 평가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듯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 식사는….”
“오늘 저녁은 좀 그렇고 괜찮으시면 내일 점심을 같이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먼 길 오셨는데 저녁은 저희가 대접을 해야죠.”
“쇼핑 거리의 저녁 느낌을 좀 보고 싶습니다. 낮엔 이미 오는 길에 대충 봤고… 아시다시피 출장 일정이 좀 빡빡합니다.”
그렇게 신 사장과 다음 날 점심 약속을 잡고 매장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어느 정도 걷다가 몸을 돌려 신 사장의 건물을 쳐다봤다.
“…?”
매장이 들어가 있는 건물 1층은 매장 조명 때문에 환했는데, 객실 장사를 하지 않다 보니, 객실 창 쪽은 모두 불이 꺼져서 꼭 유령의 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쉬웠다.
지난 3년간 브랜드를 론칭하고 새로운 컬렉션들을 뽑아내는 것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매장 관리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냥 갈까 하다가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다.
낮에 봤을 땐 정말 멋진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에 방마다 모두 불이 켜지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결국 왔던 걸음을 다시 돌려서 매장 문을 열었다.
“진짜 드디어 저희도 한국에 진출을 하는 겁니까?”
“그러게 내가 뭐랬어? 가다가 가다가… 그렇게 계속 가다가 보면, 결국엔 길이 나올 거라고 했냐, 안 했냐?”
“근데 확정은 아니죠?”
“뭐… 일단 내일…!”
신 사장과 최 실장이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타이밍이었다.
나의 등장으로 신 사장과 최 실장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난 그 둘의 대화를 전혀 못 들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저기….”
“네, 부장님. 뭐 놔두고 가신 거라도….”
두 사람이 동시에 내가 서 있는 매장 출입문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밖에서 봤는데… 객실에 불이 다 꺼져 있으니까 건물이 좀 뭐랄까… 보기가 별로네요.”
“…?”
“그냥 좀 궁금해서요. 만약에 객실에 불이 다 들어오면 느낌이 어떨지 보고 싶은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직원들에게 객실마다 돌아다니면서 불을 다 켜 달라고 부탁을 하고 최 실장이 돌아왔다.
나와 신 사장, 그리고 최 실장은 건물 밖으로 나와 건물에서 멀찍이 떨어져 객실에 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3층에 있는 객실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커튼이 열리면서 그냥 불만 켜졌을 때보다 더 환한 빛이 건물 밖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그 순간 난… 겁이 났다.
겁… 마치 뭔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작전이 내 머릿속에서 완성이 될 것만 같은 두려움….
가장 먼저 불이 들어 왔던 객실의 바로 옆방에서도 불이 켜졌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커튼이 열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환한 빛이 흘러나오는 객실 창문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알 수 없는 겁과 흥분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기….”
난 손끝으로 호텔 건물을 가리키며 최 실장에게 물었다.
“창문 밑에 달려 있는 라이트 있잖아요. 저거 작동합니까?”
“네, 아마 작동할 거예요.”
“지금껏 일부러 안 켜고 계셨던 겁니까?”
“객실 장사를 안 하니까요. 괜히 저거 켜놓으면 사람들이 호텔인 줄 알고 매장에 들어와서 호텔 프런트 데스크는 어디냐, 빈방은 있느냐… 좀 귀찮아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아… 진짜 죄송한데, 이왕 객실에 불 켜는 김에 저 라이트도 같이 한 번만 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부탁을 하기가 무섭게 최 실장은 신 사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신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을 유심히 보면 밤에 건물 자체를 밝히기 위한 야외 전용 라이트가 꼭 달려 있다.
그런 건물의 조명들로 인해 유럽의 밤은 낮에는 차마 보여주지 못하는 몽환적인 매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거고.
둥! 파팟….
수십 개의 야외 전용 라이트에 동시에 불이 들어오자 어둠에 숨어 있었던 건물의 진면모가 드러나며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까지도 잡아 세웠다.
그리고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건물 외관을 보며 탄성을 흘리자 신 사장의 얼굴엔 당황이 물들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너무 급하게 뛰고 있었다.
객실에 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이상하게 내 눈 앞으로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가 하나씩 스쳐 지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장님.”
“네.”
“저 객실들은 그럼 지금 현재로써는 그냥 저대로 놀려 두고 있는 겁니까?”
“아뇨.”
“아니라면….”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
“네?”
난 화들짝 놀라서 신 사장을 쳐다봤다.
“창고요? 무슨 창고….”
“지난 3년간 만들었던 재고들… 안 팔린다고 그냥 다 폐기시키기가 뭐해서… 객실에 쌓아 두다 보니, 결국엔 객실이 방마다 컬렉션별 재고 창고가 되어 버렸어요.”
“아이고야….”
절대 들키지 말았어야 할 탄식이었는데… 재고 관리를 호텔 빈방에 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