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정말 멋진 건물이에요
취리히 국제공항.
출국장을 나오자마자 한글로 ‘홍성 인터내셔널 공은태 부장님’이라는 글귀가 써져 있는 팻말을 들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30대 초반이었다.
얼굴엔 억지로 감추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 감추지 못한 장난기가 스며 있었고, 비즈니스적인 첫 만남임에도 자유로운 캐주얼 복장 차림이 인상적이었던 남자, 최근우.
“저기….”
“공은태 부장님?”
“네, 홍성 인터내셔널에서 왔습니다.”
출국장 앞으로 쳐져 있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높이가 낮은 고정 바리케이드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악수를 나누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물론 악수를 하겠다면 할 수도 있었지만, 모양새가 이상할 거 같았다.
난 그 고정 바리케이드를 돌아 날 기다리고 있던 남자 앞으로 다가갔고, 악수와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그가 지난 며칠간 나의 스위스 출장 일정을 함께 체크해 줬던 신 사장 회사의 최 실장이라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조금 있을 줄 알았다.
스케줄 조율 전체를 메일로 주고받아서 직접적인 전화 통화를 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메일에 묻어나오는 내공이라는 게 있지 않나.
분명 몇 번 주고받은 메일의 무게로만 보면 어느 정도 비즈니스적인 내공이 쌓인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젊은 친구가 나와서 자기를 신 사장 회사의 최 실장이라고 소개를 하니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당황은 취리히 공항에서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내내 신 사장과 그의 회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회사에… 한국 직원이 많은 모양입니다?”
“많았죠.”
“…?”
“많을 때는 그래도 여섯 명… 아니구나, 저까지 포함해서 일곱 명까지 있었으니까요.”
연식이 최소 10년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BMW X5 차 안이었다.
최 실장이 운전대를 잡았고, 난 조수석에 앉아서 말도 안 되는, 말 그대로 그림에서나 나올 만한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펼쳐지는 풍경이 비현실적이어서 그런 건지, 아님 최 실장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비즈니스를 하러 왔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장님, 사모님, 그리고 저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전부예요.”
내가 여기서 잠시 오해를 했던 게 한국 직원이 네 명이라는 말을 그 회사의 전체 직원이 네 명이라는 걸로 잘못 이해를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투자를 유치해서 론칭을 시키는 공격적인 마케팅 브랜드가 아니라면, 두, 세 명이서도 얼마든지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가 있으니까.
브랜드 하나 만들어 내는 게 어디 일이겠나.
온라인이라는 무궁무진한 매장이 유통 판들의 그릇을 진작에 빼앗은 현재, 브랜드 론칭이라는 건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어디 동대문 같은 데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 몇 개 찾아내고 해당 디자이너를 컨택해서 가지고 있는 샘플본 받아다가 비용 조금 지불하고 그 디자인에 자기 상표 등록만 해도 그게 곧 브랜드 론칭이 되는 세상 아닌가.
난 강 대표를 통해 신 사장과 그가 론칭을 시켰다는 브랜드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딱 그 정도 수준의 브랜드일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인터라켄에 도착을 하는 순간 처참하게 빗나갔다.
“여기 이 건물입니다.”
최 실장이 차 핸들을 꺾으며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부터였다.
건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는 순간, 그때부터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예쁘죠? 진짜 외관 하나만 놓고 보면 인터라켄이 아니라 스위스 전체를 놓고 봐도 손꼽히는 디자인입니다. 정말 멋진 건물이에요.”
“건물이…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크네요?”
“그런가요? 어떤 사진을 보셨는지….”
“아니, 사진으로는 저기 저 뒤쪽은 전혀 안 잡혀서….”
놀랐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다.
나는 강 대표가 보여준 호텔 정면 외관 이미지만 보고 그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텔 규모의 3성급 호텔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실제로도 3성급 호텔이 맞고.
그런데 최 실장이 차 핸들을 꺾어서 호에벡 거리 쪽으로 방향을 트는 순간, 측면 뒤쪽으로 내가 상상도 못 했던 크기의 숨어 있던 공간이 나와 버렸다.
쉽게 말해서 건물이 딱 맞아떨어지는 직육면체가 아니었다.
아파트처럼 정직한 직육면체의 건물이 아니라 뒤로 갈수록 더 넓은 공간이 나오는 부채꼴 형태에 가까웠다.
“객실이… 몇 개나 되나요?”
“64개짜립니다. 인터라켄에서는 제일 많은 객실을 가지고 있었던 3성급 호텔이었죠. 3, 4, 5…. 이 세 층에 객실 64개. 한 층에만 객실 스무 개가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까 오면서 웨스트역 지나서 보셨던 크랩스라는 4성급 호텔이랑 비교해서도 건물 면적만 놓고 보면 저희 본사 건물이 더 큽니다.”
“아….”
“실제 호텔 비즈니스를 할 당시에 부대 시설 좀 지어 놓고 4성급으로 업그레이드시켜서 객실 요금을 올려 보자고 제가 입이 닳도록 사장님께 제안을 했었죠. 제안이 아니지. 거의 뭐 하루가 멀다 하고 반협박 비슷하게 졸랐어요. 근데… 아마 사장님은 그때부터 호텔 비즈니스를 천천히 접을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거 같아요.”
“그럼 지금은 뭐 아예 호텔 장사를 안 하신단 말씀이세요?”
“본사 건물을 가지고는요.”
“그건 또 무슨….”
“다른 호텔들로는 호텔 관련 사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다만 저희 본사 건물에선 더 이상 호텔 관련 사업을 안 하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호텔이 이거 말고도 더 있나요?”
“아뇨, 회사 소유가 아니라 그저 장기 임대를 해서 지금껏 해왔던 대로 그렇게… 일종의 현금 만들기 식으로 하고 있는 거죠. 거기서 현금 만들어다가 여기서 다 까먹고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하하하…”
이게 과연 비즈니스를 같이 하겠다는 사람한테 할 소린가 싶을 정도로 최 실장은 자기네 회사 정보를 밝히는 것이 거침없었다.
“근데 왜…. 이 좋은 호텔의 객실을 그냥 놀리고 있나요?”
내 말에 최 실장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말로는 설명이 좀 복잡합니다. 그냥… 그냥 직접 보시면 바로 이해가 되실 겁니다. 호텔 체크인부터 빨리 끝내놓고 저랑 같이 가셔서 한번 보시죠. 건물 내부. 그럼 단박에 아실 겁니다. 사장님도 며칠 전부터 목이 빠져라 부장님을 기다리고 계셨고요.”
기분상 호에벡 거리로 들어선 지 1분 정도밖에 안 지났을 때였다.
내가 예약한 호텔 간판이 벌써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인터라켄의 유일한 쇼핑 스트리트인 호에벡 거리는 짧았다.
신 사장의 호텔 건물이 쇼핑 스트리트의 끝이고, 또 내가 예약한 호텔이 그 반대편의 끝인데, 차로 1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난 신 사장의 호텔 건물에서부터 내가 예약한 호텔까지 오는 동안 차 안에서 내 상식에선 이해를 할 수 없는 브랜드 포지셔닝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알렌 강은 스위스 시계 산업이 점점 무너지면서 세계적인 워치 스트리트인 인터라켄 호에벡 거리에서도 서서히 시계 브랜드들이 철수를 하고, 그들이 철수한 자리에 명품 의류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난 내가 예약한 호텔까지 오는 동안 명품 브랜드 단독 샵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물론 차로 이동 중이어서 미처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름 시장 파악을 하겠다고 눈을 크게 뜨고 살폈는데 브랜드 단독 샵은 하나도 발견을 못 했다.
다만 한국으로 따지면 멀티샵이라고 할 수 있는 복합 브랜드 샵 몇 개가 눈에 띌 뿐이었다.
“제가 인터라켄은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지하 주차장이 없는 호텔.
호텔 전용 주차장은 호텔 뒤편에 만들어진 공터로 대신하고 있었다.
최 실장이 후진을 하며 주차를 시도하는 동안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히 물었다.
“인터라켄엔 브랜드 단독 부티크 같은 건 없나요?”
“많죠. 여덟, 아홉 개 정도는 될 거예요.”
“무슨 브랜드가 있나요?”
주차를 끝낸 최 실장.
그는 시계 브랜드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뇨, 시계 브랜드 말고 패션 의류 브랜드요.”
“아, 의류 관련은 하나도 없어요. 다 플렉스 샵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플렉스 샵은 한국으로 따지면 멀티샵과 그 개념이 매우 흡사한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멀티샵은 그나마 급이 맞는 브랜드들을 모아서 하나의 샵을 만들어 놓은 걸 말하는 거고, 플렉스 샵은 특정 브랜드와 장기 계약을 하지 않고 매 시즌별 브랜드를 바꿔가며 샵을 운영하고 있는 거라고 보면 된다.
대표적인 파리 플렉스 샵 브랜드인 ‘텐마’ 같은 경우는 안에 들어가 보면 10만 원, 20만 원대의 랄프로렌과 2천만 원을 호가하는 디올 프리미엄 뒤섞여 있기도 한다.
인터라켄 호에벡 거리….
정말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쇼핑 스트리트에 대한 이미지를 단 한 번의 첫인상으로 산산조각 내 주는 특이한 쇼핑 스트리트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최 실장이 같이 내리려고 했다.
그런 최 실장에게 난 체크인은 혼자 하겠다고 말했다.
“제가 지금 비행기를 너무 장시간 타서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닙니다. 아직 신 사장님과의 약속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괜찮으시면 먼저 가 계시죠. 거리도 하나밖에 없어서 뭐 찾아가는 동안 길 잃어버릴 일도 없을 거 같고….”
“그러시겠습니까?”
“네, 저는 우선 체크인하고 들어가서 샤워부터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렇게 사장님을 뵙기엔 상태가 너무 꾀죄죄해서….”
* * *
호텔 예약 역시 신 사장 측에서 그 동네의 가장 좋은 호텔로 예약을 해주겠다는 걸 극구 사양하고 내가 직접 했다.
그 어떤 부담도 떠안고 싶지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직접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와 폴앤크루를 대신해 홍성의 성의를 보여주고, 그걸로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들겠다는 게 스위스 출장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으니까.
체크인을 하고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다음 장시간 비행을 할 때 입었던 평상복 대신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신경 써 머리를 손질하고 호텔을 나섰다.
“우와….”
동네가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서 정말 유니크한 동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내가 예약을 한 호텔에서 신 사장의 건물까지는 대략 500미터 정도.
그런데 건물들이 하나같이 낮고, 도로가 마치 자로 대고 그어놓은 것처럼 완벽한 일자라서 500미터라는 거리가 있음에도 내가 예약한 호텔에서 신 사장네 회사 건물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천천히 쇼핑 스트리트에 포지셔닝되어 있는 브랜드들을 시계, 패션 의류 구분 없이 살피면서 걷다 보니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신 사장네 회사 건물 앞이었다.
확실히 알렌 강의 말처럼 임팩트가 강한 건물이었다.
거리 끝에 위치해 있어서 1층 윈도를 여러 각도에서 노출시킬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기도 했거니와 호텔 비즈니스를 중단하는 바람에 모든 객실 창이 닫혀 있고, 또 그 안으로는 커튼까지 쳐져 있어서 자칫 음산한 느낌이 들 만도 한데, 많은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
국내 시장에서 수입 명품 브랜드 컨트롤이 주력인 회사 홍성 인터내셔널.
그런 홍성에서 유통 판을 상대로만 브랜드 컨트롤을 해 왔던 나였기에 로드샵을 보는 안목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눈에도 신 사장네 회사 건물은 너무나 완벽한 로케이션에 알이 박혀 있었고, 어떤 브랜드가 어떻게 들어가느냐에 따라 단순히 그 건물 하나뿐만이 아니라 호에벡 거리 전체의 이미지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응.”
“왔습니다, 공은태 부장님.”
최 실장의 귀띔에 신 사장으로 짐작되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