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안 차장이 일을 참 잘합니다
“한 번 끌려가면 두 번, 세 번… 앞으로도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거라고 걱정을 하셨죠.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뭘 믿고 회사를 맡기겠냐시며… 리더에게 우유부단한 것만큼 치명적인 결점은 없다고 하시더군요.”
“….”
“실수 인정… 할 거면 진작에 해야 했다시며 이제 와서 지분을 나눠 주면서 그걸 명분으로 두 사람을 잡는다면 그림도 이상할뿐더러 분명 지울 수 없는 선례를 남길 거라고 하셨어요. 잡는 건 좋은데, 그 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하면 그땐 뭘 주겠느냐고… 끌고 갈 자신이 없으면 아까워도 그냥 놓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장 대표와 공 부장 건은 제가 끌려가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문제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정도도 구분을 못 할까요, 제가. 아무리 당시 제가 뭐에 씌어 있었다지만,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사장님을 제외하고 회사 일로 저에게 공 부장처럼 진심으로 화를 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
“공 부장처럼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 저부터도 못 하는걸요.”
“….”
“아버지, 사장님의 회사 운영 방식이 마음에 안 들고 또 이해를 못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럴 때마다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번번이 망설여야 했습니다. 결국 망설임 끝엔 침묵뿐이었고. 그래서 당시 공 부장이 홍성이 공 부장 본인의 회사인 듯 흥분을 하고 화를 냈을 땐, 당황이란 걸 해야 했고 지금은 공 부장한테 부끄럽고, 민망하고… 또 그 힘든 일을 하게 만든 게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본인이 책임질 일만 아니면 뭔가가 이상한 걸 알아도 모르는 척 대충 넘어가는 게 대부분인데… 안 그러시더라고요, 공 부장님은. 제가… 아무리 모자란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을 어떻게 놓치겠습니까? 강 대표 건은… 분명 너무 성급했고, 제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장 대표, 공 부장은 무조건 따라와야 한다는 식의 저의 오만함이 만들어 낸 잘못이 맞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따라와 주겠지… 하고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공 부장 아니었음 전 분명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야 했을 겁니다. 지금 공 부장 아이디어로 폴앤크루가 빠르게 궤도에 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약 그때 제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음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후우….”
잘 찾아왔다 싶었다.
용기를 잘 낸 거 같았다.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존심을 부려서 나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베팅을 걸어야 할 거래처 상대도 아니다.
안 그래도 힘든 직장 생활, 뭐 하러 내 편 해주겠다는 사람을 상대로 쓸데없는 자존심 세워야 할까.
뭐 하러 상대가 한 발 뒤로 물러났는데, 나까지 함께 뒤로 물러나서 그만큼의 거리를 더 만들어야 할까.
상대가 뒤로 한 발 물러났을 땐, 뒤로 물러난 그 거리만큼 다가가서 원래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 그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아예 안 보고 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랬다.
그동안 난 상무님을 이전 사장님의 장남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단 한 번도 인간적일 수도 있는 직장 상사로 봐주지는 못했던 거 같다.
그리고 사장님의 퇴임, 그리고 전무님의 사장직 취임, 이문 이사님의 전무직 임명이 날 허무하게 만들어놨던 거 같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고, 결점 역시 누구에게나 있는 건데, 그런 실수와 결점투성이인 우린 참 우습게도 자신의 실수에는 지나치리만치 관대하고 또 자연스러운 자기 합리화를 시키면서 상대의 실수와 결점엔 객관적이다.
그 역시 오너가의 장남이기 이전에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인간일 것이고, 또 그걸 하기 위해 자신의 하루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고, 또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 스트레스를 집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나와 같은 사람일 뿐인데….
“그리고 그동안 마땅한 기회가 없어서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제가 내민 손 잡아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상무님은 마치 대화가 끊어지는 순간 내가 자리를 떠날까, 그동안 이런 자리를 무척이나 오래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내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혼자 사과하고 또 혼자 감사했다.
그런 상무님의 모습에서 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 대표와 알렌 강이 폴앤크루로 넘어간 이후, 줄곧 혼자 계셨던 상무님.
그래서 이젠 어느 정도 정황이 잡힌 일임에도 모르는 척하고 물어봤다.
“혹시… 강 대표 스카우트 건 말입니다.”
“…네.”
“사장님께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셔서… 혹시 그런 사정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던 겁니까?”
“음… 아뇨.”
하지만 상무님이 아니라고 말했다.
“성급하게 진행을 하다 보니 그 성급함이 연봉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잡음을 만들어낸 이유가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강 대표… 현재 폴앤크루로 해외 시장 개척해 나가는 거 보면 아시겠지만 분명 뛰어난 사람입니다. 같이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어요. 어딘가 특별한 부분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냥 단순하게 강 대표가 효과적으로 해외 시장을 뚫어주기만 하면 홍성은 날개를 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 의미로 아주 오래전부터 강 대표는 꼭 홍성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던 인재였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일해야죠.”
“그렇죠. 일… 일해야죠.”
“그냥 궁금했습니다.”
“뭐가요?”
“그냥 뭐….”
“전무님이 사장직에 올라서 지금 내 기분이 어떨지?”
“그런 것보다는….”
“좋아요.”
“…!”
“아직은 그 무게를 제가 다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행이란 생각도 좀 들고. 그렇다고 욕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그저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고 위안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이제 그만 내려가 보려고 상무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줘서….”
“…!”
“몇 번이나 공 부장과 이런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를 했어요. 그런데 이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라고. 공 부장이 마음을 열어 줄까 걱정도 됐고. 먼저 찾아와 줘서 핑계든 변명이든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해주신 말씀엔 그 어떤 핑계도, 변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 마음이 더 무거워지네요.”
“….”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네, 차장님.”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김 차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제는 폴앤크루의 영업부장 타이틀을 잡게 된 손 부장이 문 차장과 함께 홍성 본사를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사전에 약속된 방문은 아니었다.
폴앤크루는 나 역시 관심 있게 챙기고 있는 브랜드였고, 그걸 알고 있는 김 차장이었기에 사소한 내용까지도 일일이 다 보고를 넣어 주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전에 약속이 된 것도 아닌데, 오전부터 손 부장과 문 차장이 홍성 본사를 찾아왔고, 난 김 차장의 입에서 ‘연락도 없이’라는 표현과 ‘손 부장이 직접 왔네요.’라는 결과물에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같이 있으십니까?”
-아뇨, 로비에 있다길래, 직원 하나 내려보내서 출입증 카드 만들어 데리고 오라고 시켜 놨습니다. 느낌이 좀 싸하지 않습니까?
“계약 깨자고 오는 거겠죠. 아님 그걸 무기로 자기 쪽 마진을 좀 더 챙겨 달라는 이야기를 하거나.”
-마진 관련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요?
“저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거 같네요. 아직 단독 매장 차고 나갈 형편은 못 될 테니….”
-액션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굳이 늦출 이유도 없죠. 브랜드 하나에 장 대표, 손 부장 둘이나 붙어 있는데… 해외 진출 관련해선 강 대표가 다 맡아서 하고 있으니 장 대표, 손 부장 입장에선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하겠습니까? 거기다 장 대표 입장에선 손 부장까지 합류를 했으니 그만큼의 명분이 만들어진 거고….”
-어떻게 할까요?
난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댔다.
“어디서 만나실 겁니까? 저도 같이 자리하겠습니다.”
일부러 좀 늦게 내려갔다.
김 차장에겐 내가 자리에 참석한다는 걸 상대에게 말하지 말라고 지시를 했었고.
하지만 작정하고 호랑이 굴로 들어오는 상대들이 아닌가.
결국 손 부장의 목적은 장 대표를 대신한 나와의 담판일 텐데, 당연히 내가 직접 나가 줘야지.
사실 폴앤크루는 브랜드 매출만 놓고 보면 팀장 선에서 결정을 지어야 하는 브랜드가 맞다.
하지만 홍성에서 가지는 폴앤크루의 브랜드 의미나 그 브랜드로 하여금 파생된 현재 홍성의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절대 팀장 선에 맡길 수 없는 브랜드가 되어 버렸다.
난 손 부장과의 가벼운 몸풀기 게임을 시작하기 전, 17층으로 올라가 담배부터 한 대 피워 놓고 화장실에서 손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그래도 명색이 거래처 상대이기에 약한 향수까지 뿌린 다음 회의실로 내려갔다.
“어쩐 일이십니까, 말씀도 없이….”
회의실 안엔 김 차장과 손 부장, 그리고 문 차장 이렇게 셋이 전부였다.
난 김 차장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런 내게 김 차장이 내가 오기 전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마진이 높다라….”
“호칭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손 부장이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뭐 저희끼린데 편하게 하시죠. 괜찮겠죠, 문 차장?”
“네, 저야 뭐….”
난 문 차장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손 부장에게 물었다.
“그냥 편하게 하시죠.”
“그럴까?”
“그건 그렇고, 어째서 마진이 높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정상적인 마진은 아니잖아.”
손 부장은 뭘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날 떠보기 시작했다.
“그 마진율에 2년 계약을 해놓고,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난 것도 아닌데, 계약 중에 마진 조정을 하자는 것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죠.”
난 웃으며 손 부장에게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손 부장님. 저희 입장 뻔히 다 아시는 분이….”
“같이 좀 먹고살자.”
“이번에 마진을 양보하면 그다음엔 뭘 양보해 달라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속셈이 너무 빤히 보인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손 부장은 그저 피식하고 웃으며 날 쳐다봤다.
“지금 이건 누가 봐도 의미 없는 마진 조정 요구 아닙니까? 안 그래도 계약을 깨자고 하실 분들이 바쁘실 텐데, 왜 이렇게 의미 없는 밑밥들만 잔뜩 챙겨서 오셨습니까?”
“사실 그래. 현재 강 대표가 해외 돌아다니면서 공 부장이 던졌던 아이디어로 진행하고 있는 해외 매장 직영 운영 콘셉트도 그렇고…. 국내에만 홍성 영업부에 위탁을 맡기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 우리 입장에선….”
“그럼 중국 시장도 직접 차고 나가실 생각이란 말씀이세요?”
“천천히 준비해야지.”
“아이고…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중국 시장이 그렇게 부장님 말씀처럼 브랜드가 단독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었음 그동안 만토바가 왜 홍성에 커미션 떼 주면서 우릴 통해서 들어갔겠습니까?”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들어갈 수 있어.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그럼 본사 영업부랑 헤어지고 중국 법인 쪽과 따로 접촉을 해 보시겠다…. 뭐 그런 뜻입니까?”
“뭐 따로 접촉을 한다고 할 거나 있나, 어디. 그동안 내가 있었던 곳이고, 한국 복귀하기 전에 법인장님이랑 따로 이야기 나눴던 것도 있어.”
“아… 그럼 한국 복귀하신 후엔 따로 이야기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
“얼마 전에 안 차장 모리엘츠 건으로 중국 출장 다녀왔잖아요.”
“…!”
난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안 차장이 일을 참 잘합니다. 그건 뭐 손 부장님도 중국 법인에 계실 때 안 차장과 같이 일을 해 봐서 아실 겁니다.”
“잘하지. 일을 참 쉽게 쉽게 하는 재주가 있더라고.”
“그렇죠. 참 잘하는데… 거래처 입장에서나 잘하는 거지, 제 입장에선 별로죠. 너무 많이 퍼줍니다, 거래처한테. 사람이 약지를 못해요. 통이 또 너무 커.”
“….”
“그동안 중국 법인에서 안 차장이랑 같이 일하실 때 얼마나 좋으셨습니까? 만토바 마진부터 시작해서 새로 들어간 링겐 물건들 마진까지…. 거의 뭐 만토바한테 다이렉트로 받는 수준의 마진으로 받아가셨죠?”
“…그랬나?”
“그렇죠. 본사 영업부에선 커미션 재미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만 많았지, 딱히 재미를 본 아이템이 아니었다고요, 만토바. 저희가 그걸 2퍼센트 정도는 올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
“만토바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에서… 만약에 중국 법인이 본사 영업부 통하지 않고 폴앤크루에서 바로 물건을 받는다면 그건 또 중국 법인이 홍성 본사를 상대로 계약을 깨는 건데, 저희 입장에선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 순간 날 바라보는 문 차장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저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문 차장의 모습은 참 오랜만이었다.
“음… 뭐 이런 식으로 변칙 공격을 하실 생각이시라면, 중국 법인부터 설득을 하시는 게 순서 아닐까요? 물론 뭐 쉽지는 않겠지만….”